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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세트 - 전5권 ㅣ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먼저 발화가 시작되면 즉각적으로 무의식의 언어를 뱉어내기 때문에 그걸 순차적으로 종합해서 철두철미하게 합성할 방안이 결여된다. 그로 말미암아 세련되고 수사적으로 풍부한 언어의 아수라장을 현현할 수 없으므로, 당신은 좀더 폄하되어 얼간이로 치부되기 십상일 테다. 왜냐하면 사람들이란 간사하고 멍청하기 때문에 피상적인 연설의 측면에서만 당신의 포부와 의도를 선정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발언에 책임지고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없으므로, 따라서 이러한 연설의 일회성은 당신에게 정신의 진검승부를 펼치게 할 당위성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어를 직설적으로 선점함에 있어 어느 정도 여유를 두고 배후에서 이를 교묘하고 치밀/치열하게 사변적으로 학술의 연역적 접근의 지점에서 기관총처럼 무식하게 쏘아붙일 게 아니라 제대로 조준을 하는 저격용 라이플처럼 깨끗하고 비인간적/기계적으로 조준하는 ‘차가운 지성으로서의 정신적 냉엄성’이 필연적으로 명멸되는 바이다. 대부분의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들은 담화에서 언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학식과 교양이 부족한 게 첫째 원인이요, 둘째는 그들이 정신적으로 치열하게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무위도식하면서 엘리트주의자로 사회에서 호령할 때 자기정신의 귀감을 얻을 양식은 지향하지 않고 표면적이고 근시안적으로 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경멸한다. 이들은 단지 돈으로 대학을 갔고, 얼간이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부르주아의 소산물이자 찌꺼기며 이들이 서민에 숙주하면서 빨아들이는 많은 피와 땀의 소산물인 ‘돈’은 모두가 인민의 ‘정한’으로 남을 것이리라. 나는 대부분의 명문대를 나온 공무원들, 의사, 법조계 인물들이 나와 대화를 시작하면 결국 그들의 정신적 밑천이 드러나는 발언의 선형적인 연쇄를 자승자박으로써 부끄럽게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꼴들을 대개 발견한다. 내 앞에선 지위니 명예니 부르주아니 하는 그들의 계급과 소유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내 앞에 올바른 수신과 인격과 의를 지니지 않은 ‘진정으로 배우지 못한 꼴통들’은 전혀가 엘리트주의자의 범주에 예속된다. 나는 그들이 사회의 보수를 연장시키는 목적론적 지적 방기의 실천을 놓고 진보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변증법적 이성 비판’의 활시위를 겨냥한다. 그들의 삶은 사실상 허구요, 그들의 존재는 어떠한 근원적이라던지 시대정신을 거슬러 올라가서 본질의 시원이 뿜어내는 에너지의 역학작용의 아우라가 그들의 주위에는 허용되지 않음을 난 직시한다. 난 이런 얼간이들이 좋다. 왜냐하면 그들을 마음 놓고 유희 삼아 조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적은 어떠한 경우든 대중의 수치와 경멸의 중심부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비극을 유발하는 ‘빗나간 기투’의 허용 범위를 그대로 수용한다. 이리하여 나는 내 증오의 대상이 사회의 상층부를 점유하는 계급 전부임을 생득적으로 파악하고 모든 사회의 비극을 발생시키는 반동분자들의 무리들을 숙청할 ‘지극히 동적인 음모 이론’을 배출시킬 힘을 선천적인 내 지적 분노의 본원에서 발견하는 것이리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언사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정확히 서민의 시각에서 기실 진중한 생활의 개혁은 충분한 대가를 받고 이 전제 조건에서부터 합의된다고 볼 수 있는 신학에서 말하는 그 위대한 ‘신성한 노동’이 합출되는 것이고, 이 유위변전한 세상의 큰 틀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그대로 의미론적인 입장에서 표명하는 것이리라. 즉 의미생산의 주체가 프롤레타리아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무소불위할 정도로 전격적으로 확보되는 것이며 따라서 선진적 유물론 철학사상의 선행, 마르크시즘-레닌이즘 이데올로기의 시현의 진기는 괄목적으로 성취되는 질과 양의 선별적인 상호작용의 시너지즘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정적이며 주도면밀한 언어사용을 선이해시키려는 나의 의도는 부연된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에서 유일하게 그들이 대항할 수 있는 질료는 ‘간지의 정치한 발화’의 변연인 것이다. 우리의 형식의 강력한 근거는 정확히 사르트르가 자신의 대저작 ‘존재의 무’에서 표명한 중심 주제의식인 ‘과거와 현재를 배제하고 오직 탈아적으로 미래를 향해 기투하는 존재로 변용하라’는 데 있으며. 이 항진명제는 절대적으로 인민에게 하달되었다. 그러니까 오직 투쟁의 기로는 그 대상의 시간성은 ‘미래’라는 아직 오지 않은 불안정한 부피와 질량을 갖춘 공간, 수학적으로 그래프로써 계산할 때 ‘의식이 소모해야 할 현재진행완료 시제의 지점’이며 이를 향한 학술적 프롤레타리아의 초인적인 고군분투-인간을 넘어섬으로써 간단히 말해 정신을 자신의 의식지평의 과제로 삼음으로써’의 변별적인 종횡무진은 역사상 유래 없는 대미증유의 한 획을 그을 것일 테다. 하기야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무상교육을 지원했거니와 그로 인한 자기파멸을 자초했다. 왜냐하면 장막 뒤에 있는 부르주아와 엘리트들에게 맞설 무기를 공짜로 자신의 노예들에게 선사한 꼴이 되었으니, 그렇지만 그들 역시 최소한의 것을 내놓음으로써 최대한의 것을 취하려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하려는’ 간교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 따라서 나는 사회를 믿지 않는다. 사회는 개를 부리는 데 유용한 전체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노동하는 자를 개로서 공고히 하는 사회의 영악함은 사회가 프롤레타리아의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와 고위 계층의 것임을 충분히 역설하고도 남는다. 이러한 사회의 양태를 ‘절대지’의 한 이면인 윤회라는 이름의 변증법적 사이클은 마치 동전의 앞뒤의 회전과 같이 부르주아와 관료들에게 앞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마침내는 뒤를 나타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재현되는 그러니까 세상이 완전히 전복되어 이 혁신의 지점에서부터 모든 게 개혁의 선고를 알리는 ‘메시아의 귀환’이 직접적으로 지구를 구원하리라. 오직 ‘구원’, 프롤레타리아의 승리, 사회주의의 승리만이 필연적으로 도래할 날을 고대하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