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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 문
서맨사 소토 얌바오 지음, 이영아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8월
평점 :
*출판사 '클레이하우스'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클하서포터즈1기 #협찬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양자역학적 세계관이다.
손님들은 지난 선택에서 생긴 후회를 전당포에 맡긴다. 전당포에 맡겨진 후회는 곧 실현되지 못한 또 다른 우주의 흔적, 즉 선택의 가능성 중 사라진 잔해라고 할 수 있다. 양자역학의 '중첩 이론'에 따르면, 선택의 순간마다 여러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중첩 상태는 붕괴하고 하나의 현실만이 확정된다. 그렇다면 전당포에 후회를 맡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선택의 기록을 지움으로써, 그 선택이 없었던 것처럼 삶이 재구성된다는 뜻이다. 그 영향이 크든 작든 말이다.
하나는 운명이 정해진 세계에 살고, 게이신은 선택을 통해 미래가 달라지는 세계에 살고 있다. 두 세계는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근본적인 물리 법칙이 다르다. 하나의 세계는 모든 사건이 이미 예정되어 있으며, 인간은 단지 그 운명 위를 걷는 존재에 불과하다. 반면 게이신의 세계에서는 선택이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그 선택이 현실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하나의 닫힌 세계에 게이신이라는 '변수'가 들어오면서, 예측 불가능한 불확정성의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시쿠인이 등장한다. 하나의 세계에서 시쿠인은 질서를 유지하는 관리자로, 누군가 자기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즉,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 새로운 선택의 가능성이 생겼을 때 그들을 추적한다. 시쿠인은 선택으로 생긴 수많은 가능성을 제거하고, 사람들을 자신의 운명대로 살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가 게이신과 함께 사라진 아버지와 도난당한 선택을 찾겠다고 '선택'하여 떠나는 여정에서 시쿠인에게 쫓긴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지 모른다. 하나는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는 선택을 한 것이고, 이는 시쿠인이 용납할 수 없는 파동함수의 붕괴, 즉 결정론적 우주에 균열을 내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후회와 선택, 그리고 인간의 운명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양자역학적 관점과 결합해, 우리가 '선택'과 '후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재구성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리고 <워터 문>은 물에 비친 달처럼 닮았지만 다른 두 세계를 의미하며, 현실과 환상이 겹치는 이야기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선명하게 보이지만 손에 닿지 않는 것, 닮았지만 다른 두 세계, 우리가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들. 바로 그 갈망이야말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싶다.
책을 덮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까지 내린 선택들. 그것이 나를 만들었다. 후회도 있고, 아픔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다. 만약 그것들을 지운다면? 아마도 나는 나일 수 없을 것이다.
"망가진 건 뭐든 아름답지요. 의자든, 건물이든, 사람이든." 이즈미는 찻잔에서 고개를 들었다. "사람도요?" "사람이 특히 그렇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방식으로 망가지거든요. 움푹 파이고, 긁히고, 갈라진 곳마다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눈에 안 보이는 흉터는 가장 깊은 상처를 숨기고 있어 무척 흥미롭지요." - P21
"끝과 시작은 시간의 같은 지점에 있지. 오늘 밤은 나뿐만 아니라 너한테도 중요해. 어쩌면 너한테 더 중요할지도 모르지." - P40
"실패가 뭐가 나빠요?" 하고 게이신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어때서요? 어떤 방식을 써왔다고 해 서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실패하면, 뭐 어때요? 잘못된 방향이 하나 제거되고 옳은 길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인데. 과학은 위대한 사람들의 어깨 위에 지어졌죠. 그들이 이룬 업적뿐만 아니라 실수를 발판으로 삼아서요. 내가 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탐구하는 겁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가능한 일." - P175
게이신은 이제껏 저지른 실수들을 하나하나 훑으며, 잃는다 해도 아쉽지 않을 실수를 찾으려 애썼다. 저마다 다른 민망함과 실망, 고통을 초래한 실수들이지만, 그중 없어도 상관없는 것을 고르려니 어려웠다. 미련 없이 쉽게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힘들게 싸워 얻은 보물처럼 느껴졌다. 각각의 실수가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상처 같았다. 기쓰네는 그의 인생에서 딱 한 알갱이를 떼어 달라 요구했지만, 혹시 다른 모든 것이 그 알갱이 위에 지어진 건 아닐까 게이신은 의문이 들었다. - P200
"여기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다 그래. 생각할 시간이 많으니까.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의 공간에서 기쁨을 찾는 게 바로 인생이라는 걸 깨닫게 된단 말이지. 내가 가고 싶은 곳에 영영 못 닿을지 몰라도, 인생을 돌이켜보면 단 1초도 괴로움에 시간을 낭비한 적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소. 행복은 장소에 있는 게 아니라오. 우리가 쉬는 모든 숨에 깃들어 있지. 그러니까 숨을 들이마시고 또 들이마셔야 해." - P371
생물학이 뭐라 가르치든 간에, 누군가를 진정 살아 있게 하는 건 혈관 속의 피가 아니라 삶의 목적이었다. 목적을 잃어버린 게이신은 자신이 아직도 숨 쉬고 있음에 깜짝 놀랐다. 이것이 인간의 기묘한 점이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을 때도 우리의 일부는 죽기를 거부한다.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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