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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음은 설명되지 않는다 - 우울증 걸린 런던 정신과 의사의 마음 소생 일지
벤지 워터하우스 지음, 김희정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8월
평점 :
<어떤 마음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들을 진료하던 벤지 워터하우스가, 환자의 자리에 서게 되며 써 내려간 기록이다.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정신과 의사와 심리치료사의 역할 차이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정신과는 주요 증상에 집중하고, 심한 정신병에도 약물 처방을 통해 치료를 진행한다. 이는 일회용 반창고처럼 즉각적으로 고통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심리치료사는 환자의 삶과 개인사를 깊이 들여다보며,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도록 돕는다. 따라서 정신과에서는 비교적 빠르게 자신의 정신 질환을 인지하고 약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반면, 심리상담은 긴 대화를 통해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움직이는 과일에 스티커를 붙이듯, 저자를 비롯한 정신과 의사들은 매일같이 조현병, 양극성 장애, 우울증, 감정 불안정성 인격 장애라는 이름으로 분류된 환자들을 만난다. 환자는 많고, 이를 진찰하는 의사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의사들은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절차적으로 환자들을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각각의 환자들이 가진 다양성은 딱딱한 의학용어로 표시되고, 약 처방으로 단순화된다. 처음에는 너무 기계적인 태도가 아닌가 싶다가도, 한정된 병상과 의료진 현실을 떠올리면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의료진의 딜레마가 선명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또한, 환자들이 가진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며, 나도 모르게 정신질환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의 문제를 '정신 질환'으로 치부하거나, 반대로 대중적으로 알려진 단편적인 정보로 질환을 오해하곤 한다. 저자가 지적하듯,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우울증은 '화학적 불균형'이 원인이고, 양극성 장애는 창의적 천재를 낳고, 조현병은 '분열된 뇌를 가진' 도끼를 휘두르는 살인자를 만들어낸다고 믿는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러한 통념 속에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 안의 편견을 인식하고, 그것이 틀릴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라는 점을 깨달았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저자가 곳곳에 담은 유머 덕분에 끝까지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살아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 이 책을 통해, 타인의 마음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조금은 달라졌다. 누군가의 행동이나 감정을 쉽게 판단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고, 그 사람만의 이야기와 맥락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설명되지 않는 마음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 그리고 이해하려는 작은 시도 자체가 치유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가슴 깊이 새기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 책은 정신의학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갖게 해준 귀한 작품이다.
어느새 나는 극도의 충격, 공포, 슬픔 같은 감정도 전문가답게 로봇처럼 흡수한다. 감정에 너무 많이 동요되지 않는 편이 더 견디기 쉬우니까. - P27
"괜찮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 분야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는 뜻이긴 해요.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경력 전체를 인간의 고통을 대하며 보내겠다고 선택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정신의학과 종사자가 다른 정신의학과 종사자의 도움을 구하는 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자기 머리를 자기 손으로 자르면 얼마나 엉망이겠어요?" - P88
환자들은 가공 처리되기 위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움직이는 과일과도 같다. 사과, 오렌지, 바나나 등에 붙는 스티커 대신 우리의 베스트셀러는 조현병, 양극성 장애, 우울증, 감정 불안정성 인격 장애다. - P105
정신의학은 온통 ‘보통,‘아마도‘,‘설마 아니겠지‘로 이루어져 있어요. 인간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정밀과학이 아니니까. 우리는 그저 임상적 평가와 육감, 그리고 가끔 기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그걸로는 늘 충분하지가 않아요. - P306
"항상 아슬아슬해요. 환자를 입원시키려면 병상을 확보하기 위해 싸워야 하고, 입원시키지 않으면 환자 안전을 걱정하고요. 정신과 의사 노릇이 이럴 줄 몰랐어요." - P358
어쩌면 오랫동안 끔찍한 무감각 속에서 헤맨 끝에 이제 감정을 느낀다는 것, 아니 감정과 다시 연결된 느낌이 든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P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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