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언어
김겨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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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른 이가 비록 그 경험은 다를지라도 각자의 고통을 겪었음을 알게 될 때, 그래서 시집을 붙잡고 울 때, 그 열띤 고통은 잠시나마 진정된다. 시인의 단어들로 시의 몸이 되어본다. “내게 칼을 겨눈 그들은 내 영혼의 한 터럭도 건드리지 못했어.”소리 내어 읽어본다...그러니까 늘 꿈꾸다 말고 마시는 자리끼처럼 나는 시를 필요로 했던 것 같다. 악몽과 꿈 사이에 청량한 물을 흐르게 하고, 꿈이 혈관에 스며들게 해서, 그토록 땀 흘리며 삼키던 열도 잠시 내려놓게 하는 것. 대체 이것을, 시가 아니면 무엇이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속에서만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가볼 수 있다. 누구든지 태어나서 해볼 수 있는 경험보다 해보지 못하는 경험이 까마득하게 많기에 우리는 함께 있을 때만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 그래서 함께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 혹은 예술만이 서로의 연장延長이 된다.



...책 300페이지를 읽는 일. 40분짜리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 일.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일. 미술관 내부를 아주 천천히 걷는 일. 그러는 동안 나의 편견과 아집을 내려놓고 마음을 활짝 열어두는 일. 그럴 때 왠지 인류의 일원이 되었다고 느낀다. 표현하고 경청해온 사람들의 커뮤니티에 한 발짝씩 다가선다고 느낀다. 이 바쁜 세상에서 시간을 견디는 인내심이란 진화에 불리한 성정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인내심이 없다면 내가 꿈꾸는 다정한 사람들의 세계는 그 꿈의 흔적조차 파르르하게 사라질까 두렵다.



...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이행해가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읽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그 연속적인 열린 과정만이 책의 경이를 담보한다. 그는 책과 책을 거치며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더 넓은 사람이 되어간다. 이것은 단순한 ‘갈아타기’가 아니라 인간의 애석한 운명을 넘어 다른 이의 몸을 입어가는 ‘확장하기’의 과정이다. 그리고 ‘확장’은 필연적으로 홀로 성공하기보다 여러 삶을 끌어안기를 요청한다. 그렇기에 동일하게 맞부딪히는 주문 속에서 “인간이라면 모두를 제치고 성공하라”라는 주문은 유일하게 힘을 잃는 주문이 된다.



...죽음을 맞이할 때는 아침의 찬 바람이 깨운 서늘하고 명징한 정신이었으면 한다. 매일같이 축하한 작은 부활의 순간처럼 날카로웠으면 한다. 죽음 앞에서마저 미몽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으면 한다. 무너지게 될까. 포기하게 될까. 신체의 고통 앞에서 다른 것은 모두 부질없어지게 될까. 나는 이토록 허약한데.



...삶에는 의미가 없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과제로 부과되어 있기에, 한 가지 답이 없기에 삶이란 피곤한 것이라고. 삶은 우리와 합의를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삶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기에 합의에 응해주지 않을 것이다. 삶은 인간에게 마음대로 통제되고 라벨이 붙을 만큼 약하지 않다. 삶은 혼돈이고, 무질서는 승리하며, 성취는 무너진다. 삶은 인간의 자존감이 편안히 기댈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우리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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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긴 행복 탐구 보고서 - ‘행복의 조건’을 찾는 하버드의 연구는 지금도 계속된다
로버트 월딩거.마크 슐츠 지음, 박선령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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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선원 빌리 버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0
허먼 멜빌 지음, 이삼출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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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한 사람을 자극하는 것으로 소극적인 저항 이상 가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저항을 당하는 사람이 비인간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저항을 하는 사람이 아무런 악의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저항을 당하는 사람은, 특별히 기분이 나쁘지 않을 때라면, 선량하게도 이미 불가능하다고 입증된 문제도 자신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저는 같은 인간이라는 유대감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우울함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형제애의 우수였다고나 할까요. 저나 바틀비 군이나 모두 아담의 아들이었으니까요... 아, 행복은 빛을 따라다니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이 즐겁다고 생각하는 거야. 불행은 저 먼 곳에 숨어 있어. 그래서 불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고. 이런 슬픈 망상들, 어리석고 비정상인 저의 뇌가 만들어 낸 것이 분명한 이들 헛된 생각들은 바틀비 군의 기이한 행동들과 관련된 조금 색다른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자연적인 사악함을 가진 사람은 안정된 기질과 신중한 몸가짐을 보이며, 그래서 그 사람을 이성의 법칙을 충실하게 따르는 마음의 소유자로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실제 마음속에서는 이성의 법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자 몸부림치고 있으며, 이성을 사용하더라도 오직 비합리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교묘한 수단으로서만 사용하는 선에서 그친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사람이 현명하고도 건전한 그리고 차분한 판단을 동원해서 이루려 하는 목적은 그 터무니없음의 정도에서 광기가 개입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성격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무명 작가는 이런 구절을 남겼다. “전투가 벌어진 뒤 사십 년이 지나서 비전투원이 그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어야 했는지를 논하기는 쉽다. 자욱한 포연 속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무릅쓰며 그 전투를 실제로 지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현실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 모두를 고려해야 하고, ...안개가 짙을수록 쾌속 증기선은 그만큼 더 위험해지며, 그렇기에 누군가를 치어 죽일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속도를 높여야만 하는 것이다. 선실 안에서 아늑하게 앉아 카드 게임이나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잠도 못 자고 함교를 지키는 사람들이 느끼는 부담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법이다.”




...말하자면, 군목은 전쟁의 신 마르스를 따르는 무리를 위해 일하는 평화의 왕자 예수의 대리인인 것이다. 그렇기에 군목은 크리스마스 제단에 올려진 화승총만큼 생경한 존재이다. 왜, 그렇다면, 그는 그곳에 있는가? 바로 함포들이 증거가 되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난폭한 힘 이외의 모든 것을 폐기해 버리는 전쟁에 온유한 자들의 종교라는 기독교의 재가를 내려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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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 위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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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일은 흰색이 주는 섬뜩한 공포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무서운 절멸감으로 우리의 등을 찌르는 것은 그 색깔의 막연한 불확정성이 아닐까? 흰색은 본질적으로 색깔이라기보다 눈에 보이는 색깔이 없는 상태인 동시에 모든 색깔이 응집된 상태가 아닐까? 넓은 설경이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지만 그렇게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까?”...흰 고래는 모든 것을 표상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공허다. 멜빌은 이 흰 고래를 그리려고, 연필 선을 더해 흰 고래를 그리는 대신 흰 고래를 제외한 모든 것을 그렸다. 그렇게 글자들을 새카맣게 포개어 그리고 남은 중앙의 빈 공간, 흰 여백이 바로 흰 고래다.




...번역이 배신인 까닭은, 혼란스러운 언어를, 부유하는 기의를 일시적으로나마 고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번역은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한순간이라도 고정하려고 애쓰는 덧없지만 불가피한 시도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대부분—저버리는 일이다. 누구나 알듯이 어떤 번역도 원문을 있는 그대로 거울에 비추듯 재현하지 못한다.



...식민 권력은 성경을 토착어로 번역해 서구의 종교와 세계관을 식민지인에게 전파하는 것에서 시작해, 지배자의 언어로 원주민의 설화와 역사 등을 번역해 원주민 문화를 연구하고 통제했다. 이렇게 언어적·문화적 침투가 이루어진 후에 실용적·통치적 필요에 따라 지배자의 언어를 강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식민지인들은 언어와 문화적 정체성을 잃고 자신을 드러낼 목소리를 잃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우리도 직접경험으로 아는 일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제가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여 우리의 정체성과 문화를 파괴하는 잔인한 식민지 정책을 펼치면서 우리말도 커다란 위기를 겪었다.




...데버라 스미스는 The Vegetarian 번역에 관한 변에서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은 모호성, 반복, 평범한 문체를 더 잘 수용하는 언어에서 정밀성, 간결함, 서정성을 선호하는 언어로 옮겨가는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모호성, 반복, 평범한 문체가 한국어의 특징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한강의 문장에 서정성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도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적어도 한국어의 정밀성이 영어에 못 미친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모호성은 원문에 있었던 게 아니라 데버라 스미스의 머릿속에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스미스가 번역문에 전사한 모호성, 불분명함이 한국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동양의 낯선 신비로 여겨진 건 아닐까.




...번역은 원본이 그 자체로 완결성과 근원성을 지닌다는 신화를 무너뜨린다. 번역은, 이종교배는, 혼종은 원본을 변형하고, 아버지를 살해하고, 혹은 아버지를 삼키고, 거기에 내 모습을 입히고, 내 것으로 만들고, ‘최초 장면’의 트라우마를 길들인다. 그렇게 식민지에서 우리가 계속 번역을 하며 다른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에 오게 된 곳이 이곳일지 모른다.





...사람의 언어는 명징하지 않다. 사람의 언어는 텍스트뿐 아니라 여백을 통해서도 말한다. 사람의 언어는 표면이 우그러진 거울이고 흐릿한 유리창이다. 사람의 번역도 그렇다.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언제나 왜곡이다. 언어는 엉성한 근사치이거나 단순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다시 표현하는 것 [번역] 역시 언제나 왜곡이지만, 두 번째 왜곡이 첫 번째 왜곡 [원문] 보다 덜 충실할 것도 없다”라고 말한다.



...AI는 어떤 게 더 좋거나 나쁜지 판단하는 게 아니라 통계를 따르므로 가장 좋은 번역이 나오는 게 아니라 여러 번역가가 내놓을 법한 번역의 평균치에 가까운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평균적인 번역은 잘한 번역이 아니다. 무난한 번역일 뿐이다. 번역의 탁월함은, 우리의 습관과 관성을 떨쳐버릴 때, 가장 많은 사람이 가는 평범하고 빤한 길을 벗어날 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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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배우는 시간 - 말이 넘쳐나는 세상 속, 더욱 빛을 발하는 침묵의 품격
코르넬리아 토프 지음, 장혜경 옮김 / 서교책방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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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용하고 고요한 상태를 참지 못하는 스트레스 중독자들이다. 세상은 힘껏 그 중독을 독려한다. TV 생방송 중 1분간 쉬어가는 시간도 사실은 휴식시간이 아니라 광고 시간이다. 그렇다. 현대사회에서 휴식은 없다. 철저히 폐지당했다. 말이 곧 매출인 시대, 침묵은 자본주의에서 범죄와도 같다. 다시 말해, 우리는 소음과 분주함에 조건반사하는 파블로프의 개와 같다.




...선불교에서는 사람이 말을 할 때는 온전한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한다. 곱씹어볼 만한 이야기다. 상대가 온전히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나는 과연 누구와 대화를 하는 것이며 그의 말에는 얼마만큼의 가치와 진실성이 있는 걸까?




...자신을 찾는 것은 고고학적 발견 같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한다. 너무 오래 자신과 떨어져 시끄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원래 감정을, 다음으로는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 정체성의 핵심은 ‘인지’가 아닌 ‘정서’다.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행복은 논리적인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대부분의 수다쟁이 코치는 기다리는 것을 버거워한다. 그러나 만약 침묵할 수 있다면, 그 침묵으로부터 ‘실행 가능한’ 해결책이 나온다. 100% 실행할 수 있는 아마추어의 50%짜리 해결책이 50% 실행할 수 있는 전문가의 100%짜리 해결책보다 낫다. 해결책은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맞춰야 한다. 문제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다. 반면 사람은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지혜로운 노인들이 과묵한 것도 다 그런 이유다. 시나리오 작가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지혜와 힘은 소란함이 아니라 고요에서 온다는 것을……. 그러나 영화감독들이 한 가지 놓친 것이 있다. 과묵한 지혜가 꼭 나이 때문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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