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예보: 호명사회 시대예보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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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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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친구들이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뱉는 문장들은 어쩌면 그렇게 상투적이었을까. 한두 문장으로 요약한 타인의 삶이 얼마나 진부해질 수 있는가를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무수한 시간들이, 기억들이, 몸짓들이, 지극히 통속적인 한 문장으로 완결되었다. 나는 소음 속에서 입을 굳게 닫았다.




....나는 내가 느끼는 미묘한 감정들을, 사소한 차이들을 결코 제대로 전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여기, 우리의 대화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에 진실한 것이 하나라도 존재했다면 그것은 다만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행위,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는 게 꼭 물속을 걷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노라고. 넘어질 듯, 넘어질 듯, 위태로운데 힘겹게 발걸음을 떼야만 하는 날들이 너무 많았노라고. 두 발을 떼면 몸이 떠오를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자칫 바닥에 가라앉으면 영원히 잠들고 말 것 같아 뒤뚱뒤뚱 물속을 걷는 꼴이 우습게 여겨지는 날들이 많았노라고. 그래서 바다 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말했다. 네가 같이 간다고 하지 않았다면 바다 같은 데 오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수많은 취객들 사이에 마주앉아, 폴이 들려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지금, 삶이란 신파와 진부, 통속과 전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 의해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자 내게 실연을 안겨준 그가 더이상 원망스럽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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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문해력 - 끊어진 대화의 시대, 텍스트와 세상을 새롭게 읽는 법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26
조병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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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마이크로 프로파간다 시대, 거짓말이 초미세먼지 수준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디지털적 현대의 거짓말은 생각보다 체계적이다. 거짓말로 사소한 권력을 지탱하는 자들은 거짓말들 사이의 정합성을 마련하고, 거짓이 삶의 원리와 규범이 되는 그럴듯한 허구 세계를 축조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그들 세계에서 아무 탈 없이 편히 살고 있다는 ‘착시’를 주사하려 한다. 이런 시대에 환각과 사실, 참과 거짓을 판단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우리가 진실로 거짓된 것들을 가리고 도려내지 않아도 아무런 지장 없이 이 세상을 그럭저럭 살아가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문해력은 세상과 자신의 기울어짐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섬세한 의식에 도달하여 작동하는 자잘하면서도 굳건하며, 질기면서도 탄력적인 ‘생각의 근육’으로 완성된다. 글과 사람, 세상은 기울어질 수 있을지언정 문해력은 결코 기울어질 수 없다. 문제는 기울어지지 않으려는 우리의 노력이다.
 



...지식의 역설이란 이런 것이다. 지식은 글 읽기에 필수적이지만, 그 지식이 글 읽는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지식이 많고 구체적이면 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분석적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지식이 왜곡되어 있거나 지식의 활용법이 적절하지 못하면 그것은 오히려 정확한 글 읽기, 명민한 분석과 합리적인 해석을 방해한다. 아예 지식이 부족하거나 결핍되면 두말할 것 없이 글 읽기는 아무리 애를 써도 풀리지 않는 난제가 된다.




...직관적 사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직관적 사고에도 치밀한 근거가 필요하다. 내가 지금 읽고 보고 듣는 것의 전체를 잘게 썰어 근거와 주장을 살피고, 이 둘을 접착시켜 보이지 않는 전제와 가정을 따져보는 분석적 사고가 필요하다. 직관적 사고와 분석적 사고가 균형을 이루면 ‘보이는 것’과 ‘보아야 하는 것’을 통합하여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다. 글도 도마에 놓고 착착 썰어 이해하는 문해력이 필요하다.




...잘 알지 못하는 주제에 관해 AI의 글을 읽을 때,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가 대단히 난감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번지르르한 기계의 말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인식의 한계 바깥쪽에서 충분히 우리는 기계에 농락당할 수 있다.
공상과학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와 『숨』을 펴낸 테드 창은 챗GPT가 “인터넷을 복사한 흐릿하고 뿌연 이미지 파일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인공지능이 마치 새로운 무언가를 창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것은 인터넷에 흩뿌려진 데이터를 긁어모아 한데 놓고 찍어놓은 조잡한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산에서는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가는 것이 가장 가까운 길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다리가 길어야 한다. 잠언은 봉우리여야 하고, 봉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몸집이 크고 키가 껑충 큰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가 텍스트로써 사람과 소통하고 사회적 관계를 만들며 세상을 감각하고 변화시키는 것, 그것은 큰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품위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크게 읽고 크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 크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맥락을 읽고 의미를 만드는 사람, 인간을 포함한 생명의 타자와 함께하는 사람, 평범하지만 특별한 세상 지식과 소통 의지로 명랑하게 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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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챗GPT - 폭주하는 AI가 뒤흔든 인간의 자리
박상현 외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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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성장기 때 교육과 학습을 통해 형성한 인지 방식과 사고 구조를 변화한 환경에 맞게 업그레이드하기를 꺼리는 ‘인지적 구두쇠’ 속성을 지니고 있다. 심리학자 애덤 그랜트는 《싱크 어게인》에서 “대상이 물건일 때 사람들은 열정을 다해 업데이트하지만 대상이 지식이나 견해일 때는 기존의 것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개발한 도구는 인간의 지능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똑똑하고 강력해졌지만 그를 사용하는 인간은 똑똑한 도구에 압도당할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다. 호모 파베르의 역설이다.




...대규모언어모델에서 만들어내는 문장은 통계에 기반하여 거대한 양의 텍스트에서 패턴을 찾아 그다음 단어를 추측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런 언어 모델은 모방에 능하고 사실에 약하다. 왜냐하면 대규모언어모델은 문제를 일으키는 문어와 마찬가지로 실제 세계의 대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언어 모델을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는 책 《개소리에 대하여》에서 듣는 이를 현혹시키는, 도덕적으로 상관하지 않는, 속임수 전문가가 하는 개소리의 정석이라고 한다. 프랭크퍼트는 이런 ‘개소리’들이 거짓말보다 나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개소리’들은 거짓이든 진실이든 상관하지 않고 독자를 설득하는 것만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기술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에 반응하는 사람의 문제인 것이다. 에밀리 벤더는 단어의 형태와 의미를 혼동하지 말라고 이렇게 역설한다. 기계는 마음이 없이도 텍스트를 생성해낸다. 문제는 우리가 그 텍스트 뒤에 마음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 침입하는 것은 억압적인 빅브라더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사적인 근거 하에 각자와 관계를 맺게 되는 수많은 호의적 ‘리틀 시스터스’이다.

쉽게 말해 정보 사회의 통제란,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차갑고 거대한 감시탑이라기보다 우리 곁을 맴도는 따스하고 친밀한 반려동물처럼 작용한다.




...‘그럴듯한 이야기’가 곧 진리는 아니다. 서사는 인과 관계로 빽빽하게 채워지곤 하지만, 실재에는 우연적 요소들도 많다. 이야기는 연속적이고 자극적이다. 진리는 대체로 비연속적이며 권태롭다. 음모론이 과학적 설명보다 훨씬 각광받으며 빠르게 확산되는 이유는 인지적 소모를 줄이면서 사태를 흥미롭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서사 중독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증상을 가리키는 개념이며, 이 증상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 ‘서사 과잉narrative excess’이 된다.




...인지 빈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간단히 정리하면, 압도적인 정보량과 인간의 인지적 한계 때문에 타당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물론이고 터무니없는 허위정보를 감지하는 일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라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확실히 “우리의 뇌는 점점 더 해킹당하기 쉬워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챗GPT의 등장이나 ‘자유 의지’라는 신화 때문만이 아니다. 가상 공간에서 정보의 폭발적 유통이라는, 꽤 오랫동안 지속된 과정을 통해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난 사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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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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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모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해도 흑마술이 작용했다 해도, 돌은 내게서 앗아 간 그만큼 나를 채워 줬다. 돌은 늘 내게 말을 걸었는데, 석회암이든 변성암이든 땅속에 누운 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내가 곧 몸을 뉘일 묘석이든 간에, 모든 돌이 그러했다.



... 그 애는 내 가슴 위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댔다.
  「미모 비탈리아니,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 앞에서, 비올라 오르시니가 날도록 도울 것이며, 결코 추락하게 놔두지 않겠노라고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그리고 나, 비올라 오르시니, 나는 미모 비탈리아니가 그와 같은 이름을 지닌 미켈란젤로에 필적할 만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조각가가 되도록 도울 것이며, 그가 결코 추락하게 놔두지 않겠노라고 맹세합니다.」




...묘지의 밤, 대낮의 열기에 그을린 색채로 가득한 밤에, 이러한 만남, 예기치 못한 동등함에 거의 놀라다시피 하며. 찰나 동안, 나는 어느 결엔가 그 무엇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벌써 그 애를 쑥쑥 크게 하는 힘들이, 그러니까 쌓여 가는 세포들과 늘어나는 뼈들이 작동하고 있고, 분자가 하나씩 하나씩 늘어날수록 비올라는 나로부터 멀어진다.




「중요한 건 네가 무엇을 조각하는가가 아니야. 왜 그것을 하는가이지.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봤니? 그게 뭘까, 조각한다는 게? 〈형체를 부여하기 위해 돌을 쫀다〉라는 답은 하지 마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잖니.
  스스로에게 단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던 질문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었고, 나는 아는 척하지도 않았다. 메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조각을 한다는 게 뭔지 깨닫는 날, 넌 단순한 분수대만으로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게 할 거다. 그동안, 미모, 충고 하나 하지. 인내해라. 이 강, 변함없이 고요한 이 강처럼 말이야. 이 강, 아르노강이 화를 낸다고 생각하니?」
  1966년 11월 4일, 둑을 터뜨려 버린 아르노강은 강변으로 흘러넘치며 도시를 작살내게 되리라.



「태어난 뒤로 우리가 하는 단 하나의 일이 바로 죽는 거란다. 아니면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그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늦추려고 하거나. 나의 고객들은 모두 같은 이유로 온단다, 미모. 표현 방식이야 제각각일지라도, 그들 모두 겁에 질렸기 때문이지. 나는 카드를 뽑고 위로할 말들을 지어내. 그들 모두 올 때보다는 조금 더 고개를 쳐들고 돌아가고,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조금은 덜 두려워해. 그들은 그걸 믿으니까. 그게 중요한 거야.」
  「그것만 보더라도 분명히…….」
  「맞아, 그것만 봐도.」
  「그럼 당신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다스리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나는 대추야자를 먹지.」



...어머니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고, 아직도 바래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보랏빛 불길로 내 눈을 삼켜 버렸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만약 전부 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다르게 선택할 수도 있겠지, 미모. 네가 단 한 번도 틀리는 법 없이 처음부터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넌 신인 거야. 네게 품은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조차 신을 낳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메티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내 끌을 소년의 손에 쥐여 줬다.
  「잘 들어라. 조각한다는 건 아주 간단한 거야. 우리 모두, 너와 나 그리고 이 도시 그리고 나라 전체와 관련된 이야기, 훼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그 이야기에 가닿을 때까지 켜켜이 덮인 사소한 이야기나 일화들을,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 내는 거란다. 그 이야기에 가닿은 바로 그 순간 돌을 쪼는 일을 멈춰야만 해. 이해하겠니?」




...트라몬타나, 시로코, 리베치오, 포넨테, 미스트랄. 나는 이 모든 바람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나는 나의 삶을, 겁쟁이와 배신자와 예술가의 삶을 사랑했고, 비올라가 내게 가르쳐 줬듯이 우리는 사랑하는 어떤 것을 돌아보지 않고서는 그것과 이별하지 않는 법이다. 누군가가 나의 손을 쥐는 게 느껴진다. 어떤 수도사, 어쩌면 그 선량한 빈첸초 본인일 수도.트라몬타나, 시로코, 리베치오, 포넨테, 미스트랄 나는이 모든 바람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아, 코르누토, 코르누토! 우리에게 출발에 대해 말해 줘. 다 같이 노래 한 곡 뽑자고! 번개가 칠 때 그 빛에 드러나는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들을 꼭 보기를…




...기계적으로 빈첸초는 목에 두른 열쇠를 쓰다듬는다. 나중에 그는 피에타를 보러 다시 돌아갈 거다. 그러고 나서도 이해할 때까지 보고 또 보리라. 아마도 조각가가 떠나기 전에 그에게 하려던 말이 그것일지도 모른다. 보고 또 봐라. 어쩌면 사소한 것을, 정말로 별것 아니지만 모이면 혁명을 만들어 내는 그런 작은 뭔가를 놓쳤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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