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알아야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즉 질문의 수준은 ‘앎’에 달려 있다. 질문은 얼마나 모르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아는지를 드러낸다. 아무런 질문도 할 게 없다면 알아서가 아니라 몰라서, 혹은 알고 싶지 않아서일 수 있다....소크라테스가 캐묻는 질문에 답하다가 자기주장에서 모순을 발견한(아포리아)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무엇이 어디에서 어떻게 잘못됐는지 스스로 물을 것이다. 답을 찾기 위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샅샅이 뒤질 것이다. 이 과정은 산고와 같으며 그 끝에 태어난 것은 영혼의 아이로서 내면에서 스스로 발견한 진리이다. 이 때문에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사고를 이끌어내는 산파 역할을 맡았을 뿐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고 했다. ...질문은 본성을 거스르는 대표적인 행위다. 집중해서 생각하고 요약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편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편하다. 내부나 외부에서 발생한 현상이나 문제를 발견해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판에 박힌 대로 반복하거나 무시해버리면 질문할 것이 없다. 그 결과 더 많은 문제가 생겨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비효율성이 발생한다. 기억하자. 인간의 뇌는 숨만 쉬고 있어도 수많은 정보를 처리해야 하기에 최대한 효율성을 추구한다. 그 결과 나타나는 대표적인 인지오류 중 하나인 인지편향은 쉽고 편할지 몰라도 인간의 정신을 화석으로 만든다. 질문은 화석화를 방지할 뿐 아니라 생각의 화석, 정신의 화석을 무너뜨린다....우리가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평범’이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라면 아렌트가 사용한 평범함은 ‘생각하기의 무능함’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누구라도 논리적 사고나 비판적 안목을 갖추지 못한, 생각하기의 무능함이 일상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악을 저지를 수 있다. 이들은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자신하며 직감을 믿는다. 그러니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한다. 생각하기의 무능함은 말하기의 무능함으로 연결된다. 말이나 글이 오염된 상투어로 나열된다. 이런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한 연설이 있다. “해로운 물에 오래 노출되다 보면 결국은 병원균에 감염되어 판단력과 저항력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한 말일까? 1936년 9월 14일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한 연설 중에 한 말이다. 여기서 해로운 물은 ‘민주주의’였다. 세상에 그 자체로 옳은 말은 없다. 상황과 맥락에 부합하느냐를 먼저 따져야 한다. ...‘무엇을’이라는 의문사가 인간관계에서 따듯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K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은 관심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지만 질문부터 하면 관심이 생긴다. 우리가 주로 하는 ‘왜’를 ‘무엇을’로 바꿔 질문하면 관점이 바뀌면서 상황을 다르게 만들 수 있다....한편으로 어떤 질문이나 답변에서건 자기감정에만 충실하면 맥락에서 벗어나기 쉽다. 관련해 대표적인 사례가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렇게 반응하는 경우이다. “정말 그랬어?” “나는 몰랐어.” “나도 힘들어.” “사는 건 다 힘들어.” “원래 인간이 다 그래.” 공감하고 못하고는 둘째치고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어디에나 갖다 쓸 수 있는 반응은 어디에도 적절한 응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의도와 목적이 명확한 질문은 상대가 이해하기 쉽도록 배경이나 상황을 맥락으로 언급하고, 알고 싶은 내용을 핵심 어휘 중심으로 묻는다. 이러한 질문은 여러 차례 생각을 정제해야 나올 수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점은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질문하는지 솔직하지 못해서 배경이나 상황 등에 그럴 듯해 보이는 포장을 씌우면 질문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엉뚱한 데로 흘러간다....‘멀쩡한 세상이 날 미치게 한다.’ 고흐가 말한 멀쩡한 세상이란 무엇일까. 그 답을 천재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 일기에서 찾는다. ‘세상의 느낌 없음에 절망한다.’ 가난한 열정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견고해서 멀쩡한 세상,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어서 멀쩡한 인간. 이런 멀쩡함이 과연 보통이고 정상이라 할 수 있는가. 과연 무엇이 정상이고 이상인가. 간극 본능을 추동하니 질문을 바꾸자. 당신은 무엇을 보고 정상이라 느끼는가, 또는 이상이라 느끼는가. 그것은 정말 정상인가? 그것은 정말 이상인가? 그 느낌에, 단지 느낌일 뿐인 느낌에, 그러나 일상에서 생각보다 많은 판단과 선택의 근거가 되기에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그것에, 뿌리 깊게 심긴 인위적 관점이 있다.
...농밀하게 자란 오리나무 사이에서 한 무리 새떼가 날아올랐다. 능을 완전히 나서기 전,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두고 온 것만 같았다. 푸른 기운을 띄던 숲이 자줏빛으로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비정에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다정에는 좀체 그럴 수 없었습니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손을 대면 스러지는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증발해버릴까, 멀어져버릴까 언제나 주춤.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가감 없이 표현하고 바닥을 내보이는 것도 어떤 관계에서는 가능하고, 어떤 관계에서는 불가하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태어난 것일까요. ...제게 등을 진 채 어머니는 한참 울었습니다. 고여 있던 것을 흘려보내듯 잠잠히. 어떤 울음이 안에 있던 것을 죄다 게워내고 쏟아낸다면, 어떤 울음은 그저 희석일 뿐이라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농도를 묽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