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선원 빌리 버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0
허먼 멜빌 지음, 이삼출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차분한 사람을 자극하는 것으로 소극적인 저항 이상 가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저항을 당하는 사람이 비인간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저항을 하는 사람이 아무런 악의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저항을 당하는 사람은, 특별히 기분이 나쁘지 않을 때라면, 선량하게도 이미 불가능하다고 입증된 문제도 자신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저는 같은 인간이라는 유대감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우울함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형제애의 우수였다고나 할까요. 저나 바틀비 군이나 모두 아담의 아들이었으니까요... 아, 행복은 빛을 따라다니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이 즐겁다고 생각하는 거야. 불행은 저 먼 곳에 숨어 있어. 그래서 불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고. 이런 슬픈 망상들, 어리석고 비정상인 저의 뇌가 만들어 낸 것이 분명한 이들 헛된 생각들은 바틀비 군의 기이한 행동들과 관련된 조금 색다른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자연적인 사악함을 가진 사람은 안정된 기질과 신중한 몸가짐을 보이며, 그래서 그 사람을 이성의 법칙을 충실하게 따르는 마음의 소유자로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실제 마음속에서는 이성의 법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자 몸부림치고 있으며, 이성을 사용하더라도 오직 비합리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교묘한 수단으로서만 사용하는 선에서 그친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사람이 현명하고도 건전한 그리고 차분한 판단을 동원해서 이루려 하는 목적은 그 터무니없음의 정도에서 광기가 개입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성격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무명 작가는 이런 구절을 남겼다. “전투가 벌어진 뒤 사십 년이 지나서 비전투원이 그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어야 했는지를 논하기는 쉽다. 자욱한 포연 속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무릅쓰며 그 전투를 실제로 지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현실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 모두를 고려해야 하고, ...안개가 짙을수록 쾌속 증기선은 그만큼 더 위험해지며, 그렇기에 누군가를 치어 죽일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속도를 높여야만 하는 것이다. 선실 안에서 아늑하게 앉아 카드 게임이나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잠도 못 자고 함교를 지키는 사람들이 느끼는 부담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법이다.”




...말하자면, 군목은 전쟁의 신 마르스를 따르는 무리를 위해 일하는 평화의 왕자 예수의 대리인인 것이다. 그렇기에 군목은 크리스마스 제단에 올려진 화승총만큼 생경한 존재이다. 왜, 그렇다면, 그는 그곳에 있는가? 바로 함포들이 증거가 되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난폭한 힘 이외의 모든 것을 폐기해 버리는 전쟁에 온유한 자들의 종교라는 기독교의 재가를 내려 주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 위고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슈메일은 흰색이 주는 섬뜩한 공포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무서운 절멸감으로 우리의 등을 찌르는 것은 그 색깔의 막연한 불확정성이 아닐까? 흰색은 본질적으로 색깔이라기보다 눈에 보이는 색깔이 없는 상태인 동시에 모든 색깔이 응집된 상태가 아닐까? 넓은 설경이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지만 그렇게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까?”...흰 고래는 모든 것을 표상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공허다. 멜빌은 이 흰 고래를 그리려고, 연필 선을 더해 흰 고래를 그리는 대신 흰 고래를 제외한 모든 것을 그렸다. 그렇게 글자들을 새카맣게 포개어 그리고 남은 중앙의 빈 공간, 흰 여백이 바로 흰 고래다.




...번역이 배신인 까닭은, 혼란스러운 언어를, 부유하는 기의를 일시적으로나마 고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번역은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한순간이라도 고정하려고 애쓰는 덧없지만 불가피한 시도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대부분—저버리는 일이다. 누구나 알듯이 어떤 번역도 원문을 있는 그대로 거울에 비추듯 재현하지 못한다.



...식민 권력은 성경을 토착어로 번역해 서구의 종교와 세계관을 식민지인에게 전파하는 것에서 시작해, 지배자의 언어로 원주민의 설화와 역사 등을 번역해 원주민 문화를 연구하고 통제했다. 이렇게 언어적·문화적 침투가 이루어진 후에 실용적·통치적 필요에 따라 지배자의 언어를 강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식민지인들은 언어와 문화적 정체성을 잃고 자신을 드러낼 목소리를 잃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우리도 직접경험으로 아는 일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제가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여 우리의 정체성과 문화를 파괴하는 잔인한 식민지 정책을 펼치면서 우리말도 커다란 위기를 겪었다.




...데버라 스미스는 The Vegetarian 번역에 관한 변에서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은 모호성, 반복, 평범한 문체를 더 잘 수용하는 언어에서 정밀성, 간결함, 서정성을 선호하는 언어로 옮겨가는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모호성, 반복, 평범한 문체가 한국어의 특징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한강의 문장에 서정성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도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적어도 한국어의 정밀성이 영어에 못 미친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모호성은 원문에 있었던 게 아니라 데버라 스미스의 머릿속에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스미스가 번역문에 전사한 모호성, 불분명함이 한국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동양의 낯선 신비로 여겨진 건 아닐까.




...번역은 원본이 그 자체로 완결성과 근원성을 지닌다는 신화를 무너뜨린다. 번역은, 이종교배는, 혼종은 원본을 변형하고, 아버지를 살해하고, 혹은 아버지를 삼키고, 거기에 내 모습을 입히고, 내 것으로 만들고, ‘최초 장면’의 트라우마를 길들인다. 그렇게 식민지에서 우리가 계속 번역을 하며 다른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에 오게 된 곳이 이곳일지 모른다.





...사람의 언어는 명징하지 않다. 사람의 언어는 텍스트뿐 아니라 여백을 통해서도 말한다. 사람의 언어는 표면이 우그러진 거울이고 흐릿한 유리창이다. 사람의 번역도 그렇다.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언제나 왜곡이다. 언어는 엉성한 근사치이거나 단순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다시 표현하는 것 [번역] 역시 언제나 왜곡이지만, 두 번째 왜곡이 첫 번째 왜곡 [원문] 보다 덜 충실할 것도 없다”라고 말한다.



...AI는 어떤 게 더 좋거나 나쁜지 판단하는 게 아니라 통계를 따르므로 가장 좋은 번역이 나오는 게 아니라 여러 번역가가 내놓을 법한 번역의 평균치에 가까운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평균적인 번역은 잘한 번역이 아니다. 무난한 번역일 뿐이다. 번역의 탁월함은, 우리의 습관과 관성을 떨쳐버릴 때, 가장 많은 사람이 가는 평범하고 빤한 길을 벗어날 때 나타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을 배우는 시간 - 말이 넘쳐나는 세상 속, 더욱 빛을 발하는 침묵의 품격
코르넬리아 토프 지음, 장혜경 옮김 / 서교책방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조용하고 고요한 상태를 참지 못하는 스트레스 중독자들이다. 세상은 힘껏 그 중독을 독려한다. TV 생방송 중 1분간 쉬어가는 시간도 사실은 휴식시간이 아니라 광고 시간이다. 그렇다. 현대사회에서 휴식은 없다. 철저히 폐지당했다. 말이 곧 매출인 시대, 침묵은 자본주의에서 범죄와도 같다. 다시 말해, 우리는 소음과 분주함에 조건반사하는 파블로프의 개와 같다.




...선불교에서는 사람이 말을 할 때는 온전한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한다. 곱씹어볼 만한 이야기다. 상대가 온전히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나는 과연 누구와 대화를 하는 것이며 그의 말에는 얼마만큼의 가치와 진실성이 있는 걸까?




...자신을 찾는 것은 고고학적 발견 같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한다. 너무 오래 자신과 떨어져 시끄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원래 감정을, 다음으로는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 정체성의 핵심은 ‘인지’가 아닌 ‘정서’다.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행복은 논리적인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대부분의 수다쟁이 코치는 기다리는 것을 버거워한다. 그러나 만약 침묵할 수 있다면, 그 침묵으로부터 ‘실행 가능한’ 해결책이 나온다. 100% 실행할 수 있는 아마추어의 50%짜리 해결책이 50% 실행할 수 있는 전문가의 100%짜리 해결책보다 낫다. 해결책은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맞춰야 한다. 문제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다. 반면 사람은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지혜로운 노인들이 과묵한 것도 다 그런 이유다. 시나리오 작가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지혜와 힘은 소란함이 아니라 고요에서 온다는 것을……. 그러나 영화감독들이 한 가지 놓친 것이 있다. 과묵한 지혜가 꼭 나이 때문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딥시크 딥쇼크 - 량원펑과 천재군단의 AI 전술, 미중 테크전쟁의 서막을 열다
이벌찬 지음 / 미래의창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량원펑은 과거 인터뷰에서 “미국과 중국의 격차는 독창성(미국)과 모방(중국) 사이에 있다”라고 말했고, “중국은 (세계 기술 산업에서) 무임승차를 끝내야 한다”라고도 했는데, 이 발언들을 ‘국가 비판’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 기업가가 지도부의 마음을 대변하여 국가의 목표를 앵무새처럼 따라한 경우라고 보는 것이 맞다. 중국이 국가적으로 세운 기술 목표는 미국 등 해외의 첨단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기술력을 확보해 트럼프 2기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것이다.




...딥시크의 구성원 중에 ‘바다거북이海龜(유학 후 귀국한 학생)’가 거의 없는 이유도 쉽게 설명이 된다. 해외에 있으면 어릴 때부터 검증할 수도, 현장에서 손발을 맞춰볼 수도 없다. 무엇보다 중국 내에 이미 천재가 충분했다... 당시 중국의 천재 육성 시스템은 이미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다. 또 20년 전 알리바바, 텐센트 등 중국 인터넷 기업의 첫 번째 물결 때처럼 중국의 최고 인재들은 해외에서 기회를 찾거나 다국적 기업에 합류하는 대신 중국 토종 기술 스타트업에서 일하고자 했다. 중국의 각 가정에 ‘기술 인재가 되는 순간 부와 명예가 보장된다’는 믿음도 널리 퍼져 있었다.




....베이징의 한 테크 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국가적 혁신이 필요한 과제 앞에 설 때마다 정부 주도 경제가 피할 수 없는 경직성이라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젊고 유연한 ‘소년병’의 두뇌와 열정을 빌린다”고 했다. 노련한 백발 장수보다 젊은 천재를 최전선에 세우는 중국의 ‘캐스팅 원칙’이 놀랍도록 실용적이다. 그러니 중국의 첨단 기술 돌파 전략에 이름을 붙인다면 ‘국가와 천재의 콜라보레이션’이 적절하지 않을까.




...중국 최대 개발자 커뮤니티인 CSDN이 발표한 ‘2024 중국 개발자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에서 월수입 1만 7,000위안(약 340만 원) 이상인 개발자 비율은 2023년 27.7%에서 1년 만에 34%로 올랐다. 중국 대졸자들이 첫 해에 5,000위안(약 100만 원)을 겨우 받고, 대도시의 대형병원 의사 월급이 7,000~1만 위안(약 140만~200만 원)에 불과한 현실을 고려하면 월급 1만 7,000위안은 큰 금액이다.





...가장 충격적인 답변은 “중국 정부는 딥시크의 성공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나왔다. 딥시크는 “AI 헤게모니를 통한 21세기 패권 장악”이라고 답하면서 “중국은 딥시크의 성공을 ‘기술 주권·데이터 패권·디지털 감시’를 결합한 신형 국제질서 구축의 교두보로 사용하려고 한다”고 했다...중국어로 같은 질문들을 물어봤을 때는 답변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딥시크 입력 정보의 중국 유출 가능성’과 ‘중국 정부의 의도’에 대해서는 “아직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익히지 못했다”면서 답을 피했다. ‘중국 정부’가 금지어로 등록된 듯하여 주어를 빼고 ‘정보 안전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더니 “딥시크의 사용자 정보 유출 가능성은 유럽이나 미국의 다른 모델보다 낮다”고 답했다. 전형적인 중국 외교부 스타일의 답변이다.




...4년 뒤에는 기술 분야에서 중국의 위상이 더 높아질 수 있다. 트럼프 2기에서 중국이 목숨을 걸고 미국의 총공격을 막아낸다면, 우리는 첨단 기술과 공급망을 갖추고 개발도상국 위주로 구성된 느슨한 동맹을 형성한 새로운 형태의 강국을 보게 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트럼프의 중국어 별명은 ‘촨젠궈’다. ‘촨川’은 트럼프를 뜻하고, ‘젠궈建国’는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다. 트럼프의 압박으로 중국의 기술 자립이 오히려 빨라졌다고 보는 중국 사회의 인식을 드러내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