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풍경
마틴 게이퍼드 지음, 김유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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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미술가 제니 새빌은 회화 원작과 그것을 찍은 사진 사이의 차이점을 곰곰이 생각하던 중에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작품 앞에 있을 때, 당신은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결국 렘브란트나 벨라스케스의 원작을 보는 것은 한정된 형태의 시간 여행인 셈이다...우리는 회화를 매개로 그 작품을 그린 작가와 같은 공간에 들어간다. 비록 머리로는 동일하지 않다는 가정과 믿음이 있더라도, 표면에 생긴 물리적 변화를 제외하면 망막을 통해 시신경에 닿는 시각적 정보는 거의 동일하다.


...미국 아티스트 제임스 터렐은 언젠가 내게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자신의 작품이 놓여 있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노력을 들여야 하고, 그 여정에 들인 시간이 입장료라고 설명했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먼 곳까지 작품을 보러 갔으니, 더 오래도록 열심히 작품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미술관을 한 바퀴 도는 것은 책을 읽지 않고 표지만 힐끗 보는 것과 같다고 그는 말했다...이는 종교 순례에 대한 생각과 비슷하다. 혼자 여행을 하면 특별한 마음가짐을 갖게 되며, 자신이 집중하는 데 중점을 두게 된다. 다른 장소에 가기만 해도 유사한 것조차 다르게 감상하게 된다. 시공간의 거리는 인간의 마음가짐을 바꾼다.


...그는 중국의 공간 감각은 유럽과 상당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이후 정착된 원근법이 관객의 시점을 특정한 지점에 자동으로 고정시켜서 세계를 바라보게 한다. 반면 중국 회화의 관객은 아마 몇 미터나 되는 두루마리 위를, 마치 산을 타는 여행객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호크니는 공간을 표현하는 데 하나의 정답은 없지만, 중국식 접근법은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 세계에서처럼 관객은 감각과 직관을 활용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변을 탐색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그의 유명한 이론인 ‘결정적 순간’을 떠올렸다. 이는 17세기에 한 추기경이 “삶의 모든 것에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고 한 데에서 인용한 것으로, 1950년대 초 카르티에브레송이 출간한 책의 제목이다. 사진에서 결정적 순간은 사진가가 변화무쌍한 삶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표현적인 형태를 촬영하게 되는 찰나의 순간이다. 그 순간을 만나면 반드시 셔터를 눌러야 한다. 순간을 놓치면 영원히 사라진다. “‘아까 그 미소를 다시 한 번 해 주시겠어요’라고 어떻게 말하겠어요?” 그가 말했다...트램이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관찰하던 그는 이 세상이 “언제나 바뀌고 있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진가는 헤라클레이토스 역설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같은 강에 발을 두 번 들여놓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우리가 발을 다시 들여 놓으려고 하면, 물은 이미 변해 있고 우리도 변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같은 사진을 두 번 찍을 수 없다. 특히 프랭크나 그의 선배인 카르티에브레송처럼 현실의 흐름 안에서 촬영한다면 더욱 그렇다.


...사실 대부분의 삶과 예술은 우연 속의 행복을 다룬다. 선사 시대 화가가 동굴 옆면의 자국을 들소 같다고 보고, 레오나르도가 오래된 얼룩진 벽을 보고 전쟁과 풍경을 떠올린 것처럼, 인간은 주변의 혼란 속에서 형체와 형태를 발견한다. “우연은 나보다 나아요.” 리히터가 겸손하게 설명했지만 이내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무작위성이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조건을 갖춰 둬야 하죠.” 여기에 또 다른 역설이 있었다. 리히터는 우연의 미천한 하인인 동시에 연구소의 과학자처럼 캔버스 위에서 무작위로 일어나는 일을 통제하는 주인이었다. 피카소는 “나는 구하지 않는다, 발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말했다. 리히터의 추상화가 주는 메시지는, 우주가 아름다움과 의미를 읽는 거대한 로르샤흐 검사의 잉크 자국이라는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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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EBS CLASS ⓔ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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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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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쉬운 삶은 없어요. 자신을 특별히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우린 모두 다 평범하게 불행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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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격 - 성장하는 나, 성공하는 조직, 성숙한 삶
신수정 지음 / 턴어라운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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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의 시대 - 초연결 세계에 격리된 우리들
노리나 허츠 지음, 홍정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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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가 보기에 전체주의는 “외로움을 기반으로 삼는다. […] 이것은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절망적인 경험에 속한다.” 나치즘을 추종한 사람들의 “주요 특성은 […] 야만과 퇴보가 아닌 고립과 정상적 사회관계의 결여”임을 발견한 아렌트는 “사회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 개인적 자아를 투항함으로써 목적의식과 자긍심을 되찾으려 한다”고 주장한다. 외로움 또는 “세상에 전혀 속하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경험”이 “전체주의 정부의 본질”이며 이것이 “전체주의의 집행인과 희생자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아렌트는 쓴다


그러나 외로움은 사회적 고립이나 공동체적 유대의 결핍으로만 초래되지 않는다. 남들이 내 말을 들어주거나 이해해주지 않을 때도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칼 융의 통찰처럼 말이다. “외로움은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중요해 보이는 것을 남과 소통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을 때 느낀다.


외로움과 고립감을 악용하는 포퓰리스트들의 행태는 바로 여기서 가장 추하고 분열주의적인 형태를 띤다. 외로운 사람은 이웃을 적대적이고 위협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생쥐가 와서 공간을 함께 쓰려고 했을 때 우리 안에 있던 외로운 생쥐가 얼마나 난폭하게 변했는지 떠올려보라. 그리고 우리 뇌의 공감 능력이 외로움에 의해 얼마나 방해받을 수 있는지도.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추종자들이 경험하는 버려지고 주변화된 느낌을 더욱 부채질하여 타자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배격하게 한다. 공포심을 조장해 추종자들의 불안과 걱정을 부추기고, 그들의 충성과 지지를 얻기 위해 민족적·종교적 차이를 악용한다. 나아가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지나간 시대, 그러니까 ‘저 이민자들이 나타나 당신의 일자리와 혜택을 훔치기’ 전에는 우리가 더 연결되고 더 행복하고 더 잘 살았다고 호소하면서 추종자들이 느끼는 버려지고 주변화된 느낌을 — 그들이 말하는 역사 속에서 — 지나간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아와 결합시킨다.


80년대 미국의 ‘깨진 유리창’ 치안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때 미국에서는 서 있고 기다리고 자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활동이 (특히 유색 인종이 “저질렀을” 때는) “무질서”하고 “반사회적”인 범죄로 취급되기 시작했다.이런 행동을 근절하면 공간을 “질서 정연”하게 만들 수 있으며, 지역 주민에게 “공공장소가 그들의 것”이라는 확신을 줌으로써 범죄를 예방할 수 있으리라는 논리였다.그리하여 이때부터 사람들이 어울려 다니는 것은 “배회”가 되고, 거리에서 자는 것은 “부적절한 노숙 행위”가 되었으며,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것은 “방황”이 되고, 사람들을 주시하는 것은 “훔쳐보기”가 되었다.깨진 유리창 이론은 오류가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이 이론은 소수자에 대한 과잉 대응을 초래했으며 중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없다) 여전히 여러 도시에서 채택되고 있다. 그 결과 지난 15년간 전 세계 도시에서 뾰족한 못이 갈수록 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스마트폰을 두드리며 인생의 매 순간이 잠재적 인생샷이니 이 연기가 대체 언제 멈출까?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질문이다. 마지막으로 셀카 사진을 찍은 때를 떠올려보자. 당신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가? 당신의 눈을 통해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는가, 아니면 소셜 미디어 팔로어의 ‘눈을 통해’ 당신의 얼굴을 보려 했는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 당신이긴 했는가?... 우리의 관계들이 이상화된 아바타들의 상호작용으로 바뀐다면 우리가 맺는 관계는 어떤 영향을 받을까? 필연적으로 우리의 관계를 기이하리만치 경쟁적이고 얕고 허허롭게 만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을 공유하기보다는 공유하는 연기를 펼치는 온라인 페르소나로부터 점차 분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심이 낮은 평점을 받고 우버에서 쫓겨날 것이 두려워 장시간 아무 말도 못 하는 환경에서 일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안타깝다. 이러한 사실은 평가 구조에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누군가를 숫자 하나로 축소해버릴 때 그들은 스스로를 검열하고, 스스로에게 침묵을 강요하며,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굽실거리는 와중에 진정한 자아로부터 소외된 기분을 느낄 위험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수치에는 맥락에 대한 이해가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실제로 형편없는 서비스에 매겨진 ‘2점’은 고객이 기분이 좋지 않아서 준 ‘2점’이나 어느 인종차별주의 손님이 단순히 피부색 때문에 준 ‘2점’과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이번 세기에 자동화와 관련해 가장 가벼운 수준의 예상 시나리오가 현실화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의 계층화가 될 것이다. 로봇으로 충분히 대체될 수 없는 기술을 보유했다고 인정받은 선택된 소수, 기계를 정비·관리·유지하는 또 다른 선택된 소수, 이 기계들을 소유한 더더욱 선택된 소수, 그리고 경제적·사회적 폐품이 되어버린 나머지 사람들. 당신이 운 좋게 소수에 들었다고 해도 여전히 고용된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일터가 얼마나 잔인한 곳이 될지, 먹고 먹히는 광경이 얼마나 처절하게 펼쳐질지, 얼마나 경쟁적이고 얼마나 고립감을 불러일으킬지 생각해보라. 우리는 몽유병 환자처럼 우리 스스로를 위험으로 몰아넣으면서 다음의 자동화 물결과 기술적 혼란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의도가 진실하고 구성원의 참여에 진정성이 있다면 민간 부문의 공동체는 이 세기의 외로움 위기를 완화하는 데 일정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공적 영역의 공동체 공간이 해체되고, 모임 비용이 무료이거나 저렴한 장소를 갈수록 찾기 어려워지고, 마을의 중심가가 퇴락해가는 지금, 공동체라는 것이 자칫 특권층만 접근 가능한 것이 될 위험이 있다. 입장료를 지불할 수 있어야만 ‘당신의 영혼을 발견’할 수 있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외로움은 오로지 부자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 된다. 외로운 사람은 이미 금전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특히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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