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기완을 만났다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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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과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들이란 어쩌면 생각보다 지나치게 허술하거나 혹은 실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도와 관계없이 맺어지는 사회적 관계들, 관습 혹은 단순한 호감에 의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커뮤니티, 실체도 없이 우리 삶의 테두리를 제한하고 경계짓는 국적이나 호적 같은 것들은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는 줄 수 있겠지만 그 위로는 영원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다...그러니 우리는 그저 나무둥치에 주저앉은 날개가 젖은 새처럼 하늘로 날아갈 수도 땅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재이는 연민이란 자신의 현재를 위로받기 위해 타인의 불행을 대상화하는, 철저하게 자기만족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 같았다...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타인을 관조하는 차원에서 아파하는 차원으로, 아파하는 차원에서 공감하는 차원으로 넘어갈 때 연민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자신의 감정이나 신념 혹은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




...프랑스의 한 철학자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운다는 건 자신의 고통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행위라고 쓴 바 있다. 그 철학자의 명제를 사랑뿐 아니라 관계 전체의 차원으로 확장한다면, 나는 내 고통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 내가 취하게 될 자세와 그 자세에 맞게 조율될 마음까지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으므로 나 자신의 슬픔에까지 진심이라는 잣대를 들이밀어 어리석은 검열을 했던 것이리라.




....로도 알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시신을 내준 대가로 자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뼈를 녹이는 듯한 후회와 고통으로 견뎌내야 할지에 대해. 후회는 주기적으로 반복될 것이고 고통은 점점 더 강도가 높아질 것이다. 한참을 달려왔다 믿어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순간의 선택에 대해 준엄한 질문을 던질 것이며, 로가 들여다보게 될 거울은 언제까지고 자기모욕적인 언어로 얼룩져 있을 터이다. 나는 지금, 로의 시간이 궁금하다.




....나는 재이에게서 듣고 싶다. 우리가 사랑의 고백에 인색했던 것은 더없는 행복, 완벽한 충만, 한순간의 천국 대신 다만 끊임없이 우리 사이의 감정적 불충분과 관계의 결여를 원해서였던 것뿐이라는, 그리고 바로 그것이 우리 사랑의 정체성이라는 그런 말을 간절하게 듣고 싶다. 그럼 나는 내가 부족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너를 더 아껴줘야 한다는 신념을 저버린 적 없노라고 대답해주리라. 뜨거운 입김이 없었던 우리의 지난 시간이 편집된 필름처럼 한낱 픽션에 불과했을지라도 네가 안쓰러워 너를 지켜주고 싶었던 내 마음은 언제나 내가 일을 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노라고도.




...그 과정에 나의 책임은 없다는 식의 부질없는 위로는 해주지 않는다. 자세한 것을 묻지도 않고 섣부른 판단도 하지 않는다. 박은 그저 묵묵히 들어준다. 내 이야기가 다 끝난 후에야 박은 조심스럽게 말할 뿐이다.
“때로는 미안한 마음만으로도 한 생애는 잘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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