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스 크로싱
존 윌리엄스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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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느꼈던 열등감과 압박감은 자신을 둘러싼 자연 속에서 흩어졌다. 참석했던 강연에서 에머슨이 했던 말이 다가왔다. “나는 투명한 눈동자가 된다.” 들판과 숲에서 그는 무(無)였다. 모든 걸 보았다. 이름 모를 힘의 흐름이 내면에서 순환했다. 킹스 예배당, 강의실, 케임브리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방식으로 신의 일부이자 한 조각이 되었고, 억압받지 않고 자유로웠다. 나무들 사이를 지나 완만하게 경사진 풍경 너머 서쪽 멀리 지평선의 극히 일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의 발견되지 않은 본성만큼 아름다운 무언가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러한 일상은 종교의식과 같아졌고, 되풀이되면서 갈수록 무의미해졌다. 그렇지만 이 의식만이 지금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형태를 가졌다. 광활한 평원의 공간 위를 힘겹게 한 발짝 한 발짝 전진했지만,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시간이 그와 함께 움직이고, 구름이 위에서 맴돌다가 그가 앞으로 나가면 달라붙는 것 같았다.




...평원은 오랫동안 알아 왔던 친구의 모습을 했다. 안도감과 편안함을 주었고, 평원에 대해 알게 된 이제는 원할 때면 언제든 그 안도감과 편안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몸을 돌렸다. 미지의 평원이 위와 앞을 뒤덮었다. 어디로 가는지 볼 수도, 알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아래 있는 평원과 다른 평원들을 보고, 자신이 보게 될 것을 생각하자 평온함을 느꼈다.





....겨우 조금 전만 해도 당당하고 고귀하며 생명의 위엄으로 가득했던 존재가 이제 속절없이 가죽이 완전히 벗겨진 채 죽은 고깃덩이가 되어, 존재 자체 또는 그 존재에 대한 앤드루스의 개념을 완전히 빼앗긴 채 기괴하게 조롱하듯 눈앞에 걸렸기 때문에 구역질이 나서 도망쳤다. 그것은 들소 자신도, 앤드루스가 상상했던 들소도 아니었다. 그 들소는 살해당했다. 앤드루스는 그 살해를 통해 자기 안에 있던 무언가가 파괴되는 걸 느꼈다. 그걸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맥도널드가 말했다. “자네는 거짓 속에서 태어나고, 보살펴지고, 젖을 떼지. 학교에서는 더 멋진 거짓을 배우고. 인생 전부를 거짓 속에서 살다가 죽을 때쯤이면 깨닫지. 인생에는 자네 자신, 그리고 자네가 할 수 있었던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자네는 그 일을 하지 않았어. 거짓이 자네한테 뭔가 다른 게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지. 그제야 자네는 세상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 그 비밀을 아는 건 자네뿐이니까.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어. 이미 너무 늙었거든.”




....˝서부를 떠날 거야.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가겠어. 어쩌면 보스턴이나 뉴욕으로 갈지도 모르지. 서부는 오래 있을수록 감당이 안 돼. 너무 크고 너무 텅 비었어. 그리고 거짓이 자네에게 찾아오게 하지. 거짓을 다룰 수 있기 전에는 거짓을 피해야 해. 그리고 더는 꿈같은 건 꾸지 말게. 난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만 해. 그밖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




....그 허영심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깜빡거리던 합숙소 등불의 불빛 아래서 맥도널드가 말했던 그 무(無)였다. 찰리 호지의 시선에 있었던 밝고 푸른 공허감─그는 찰리의 눈 안에서 그 공허감을 언뜻 보고 프랜신에게 말해 주려 애썼다─이었다. 슈나이더가 강에서 말발굽이 얼굴을 당혹하게 만들기 직전에 보였던 경멸적인 표정이었다. 산에서 하얀 눈보라가 몰아치기 전에 밀러의 얼굴에 나타났던 맹목적인 인내심이었다. 찰리 호지가 꺼져 가는 불에서 몸을 돌려 밀러를 따라 밤 속으로 따라가기 전에 그의 눈에 있었던 텅 빈 반짝임이었다. 맥도널드가 가죽이 불타 버리는 데 광분해 밀러를 쫓아다니는 동안, 얼굴에 격노한 가면을 쓴 것처럼 만든 끝없는 절망이었다. 베개 위에 죽은 듯 늘어진 프랜신의 잠든 얼굴에서 지금 보고 있는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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