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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0
막스 뮐러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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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고 서정적인 마음을 그려낸 <독일인의 사랑>은 개인적으로 정말 아끼는 작품이다(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이 책을 두고두고 펼쳐 보곤 했다 - 나에게는 주기적으로 펼쳐 보게 되는 책이 늘 있다. 예를 들어 중요한 시험이 끝나면 무조건 해리 포터를 마법사의 돌에서 죽음의 성물까지 - 이가 출간되기 전에는 가장 최근에 발간된 파트까지 - 전부 읽곤 했다). 책을 펼쳐 보는 것만으로도 풀꽃과 잔디, 그리고 초여름의 푸릇한 나뭇가지와 바람 향기가 '나'의 마음과 함께 아스라이 쏟아져나오는 것만 같다. <독일인의 사랑>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부터 시와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묘사와 설명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화려함은 독자의 시선을 흩뜨리는 대신 오히려 '사랑'이라는 책의 메세지를 강조한다. 이 책에 담긴 '나'와 '마리아'의 마음은 결국 주체하지 못한 채 다양한 은유들과 함께 '쏟아지고 흘러나오게' 된다. 마음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토해내는' 두 인물의 상황은 오히려 그 동경과 사랑의 애절함과 순수함을 부각시킨다.

어찌하여 이 같은 무의식과 지순의 현존이 종식을 고할 수밖에 없는가? 무엇이 우리를 이처럼 완전하고 편재하는 행복감에서 몰아내어, 우리로 하여금 느닷없이 어두운 생의 한가운데 외롭게 홀로 서게 하는가?

"대체 낯선 타인이라는 게 뭔데요? 그럼,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좋아하면 안 된다는 건가요?"

"그들을 좋아할 수는 있단다. 그렇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면 안 되는 거야."

"그럼,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인가요? 왜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보이면 안 되는 거지요?"

<독일인의 사랑>이라는 제목은 마리아에 대한 '나'의 애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한 소년이 청년으로 자라나면서 겪고 깨닫는 마리아에 대한 동경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자, 이를 통해 깨닫는 삶에 대한 고찰이자 예찬이기도 하다. 어린아이 시절의 '나'가 애정을 느끼는 존재에게 어째서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건지 질문하는 부분에서도 이와 같은 주제의식은 잘 드러난다. 독일인인 '나'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나면서 삶을 경험하고, 서서히 삶과 타인에 대한 애정과 아이러니를 느낀다. 결국, '독일인'인 '나'가 이해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대상은 마리아 단 한 사람이 아닌 자신을 둘러싼 세계 전체가 된다.

그래서 나는 곧잘 생각에 잠겨 앞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여자도 낯선 타인에 속할까?' 하고 자문해보곤 했다. 그럴 때 그녀는 종종 내 머리에 손을 얹곤 했다. 그러면 마치 무엇인가 내 온몸을 통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나는 도망칠 수도, 뭐라고 입을 뗄 수도 없이 꼼짝없이 사로잡혀 그녀의 그윽하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래서 너희들 모두에게 반지를 하나씩 가져왔어. 지금은 이것을 너희들 집게손가락에 끼워두렴. 그리고 너희들이 자라면 그 반지를 차례로 옮겨 끼는 거야. 나중에는 새끼손가락밖에는 맞지 않게 되겠지만...... 그렇지만 평생 동안 이 반지를 끼는 거야, 응?"

어린아이에서 소년으로 자라난 '나'는 애정을 적절히 표현하는 방법을 어느 정도 배우고, 성에 살고 신분이 높으나 몸이 매우 약한 마리아를 만나게 된다. '나'는 마리아를 만나고 그의 눈을 마주하자마자 마리아에게 사로잡힌 채 서로가 같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마리아가 마치 유품처럼 남기고자 한 마지막 반지를 받기를 거부하고, 이를 마리아에게 돌려준다. '나'는 마리아의 희생을 거부하고, 삶에 대한 의지이자 사랑을 마리아에게 돌려준다.

어느덧 소년은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나'는 그동안 마리아를 수호천사로 여겨 왔으며,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고 독자에게 고백한다. '나'는 마리아를 절대적인 삶의 기준으로 삼아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해 왔다. 즉, '나'가 마리아에게 품는 감정은 단순한 애정이나 에로스적 사랑이 아닌 동경이자 플라토닉한 사랑에 가깝다. 마리아는 'Du'(가까운 사람을 부르는 2인칭 단수)라고 '나'를 칭하며 반겨주고,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영혼의 충만함을 느낀다. 마리아 또한 '나'가 돌려준 반지를 아직까지도 새끼손가락에 낀 채로 간직하고 있다. - 다음 장에서 마리아는 "내가 이렇게 오래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견신례날 이 반지를 당신에게 드렸을 때, 이미 곧 세상을 하직하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토록 여러 해를 살아오며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일을 누리다니요"라 고백한다. - 그러나 마리아는 '나'가 손에 키스를 하는 것을 신분의 차이와 자신의 병세 때문에 허용하지 못한다.

그렇게 그녀는, 마치 한아름 꺾어 모은 꽃을 서슴없이 잔디 위에 다시 던지는 어린애처럼, 자신이 수집한 생각을 남김없이 털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처럼 기탄없이 내 마음을 열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괴롭혔다.

그녀에게 그런 점을 솔직히 털어놓고, "당신은 나를 모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게 간절한 나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진실 그대로 구현할 말이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마리아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충만해하고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 '나'와 마리아는 초상화와 시, 그리고 신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나누면서 견고한 우정을 쌓아 간다(이는 '죽음'과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던 마리아의 환경에서 기인하지만, '나'는 이를 방해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나'는 마리아처럼 자신의 마음을 훌훌 털어내고 고백하지 못하는데, 이는 '나'가 진정으로 마리아를 사랑하고, 그 점을 뼈저리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아의 친구로 남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느꼈던 '나'에게도 고난이 찾아온다. 마리아의 주치의 선생님은 마리아의 건강을 위해 '나'가 그를 떠나 여행을 갈 것을 권한다. '나'는 별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이고('나'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마리아였으므로) 여행을 떠나 자연에서 깨달음을 얻고 돌아온다. 그 깨달음이란, 자신은 '도피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 왔으며, 최대한 빨리, 그리고 오래 마리아의 곁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마리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데 성공한다. 성공하나 후회한다. 괴로워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으니까.

나는 당신에게 다정하고 솔직하게 대했지요. 왜냐하면 당신을 그토록 오래 알고 지냈고, 또 당신 곁에 있으면 아주 편안했으니까요. 왜 이런 말까지 내가 모조리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당신을 사랑했으니까요.

결국 마지막 장에서 마리아에 대한 '나'의 마음은 흘러넘쳐 터져나오고야 만다. '나'를 향한 마리아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마리아는 결국 자신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고야 만다 - 이를 어째서 말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로. '나'의 억눌러 온 마음은 마리아를 향한 절절한 고백이자 약속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신분제나 필멸과 같은 인간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하나, 이는 결국 사랑과 두 사람의 의지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그녀는 결정의 순간을 마냥 미루려는 듯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왜라니요? 마리아! 어린애한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꽃한테 왜 피었느냐고,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많은 독자들이 그러했듯이, 나 역시 이 대사 덕분에 이 책을 읽었고, 결국에는 사랑하게 되었다. 플라토닉하고 순수한 사랑일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는 결국 소리높여 터져나올 정도로 강력하다. '나'는 마리아에게 고난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하고, 마리아는 결국 '나'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튿날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남긴 채 사망하고 만다. 여기서 주치의 선생님의 비밀이 밝혀진다. 그는 마리아의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어머니의 안녕을 위해 후작과 어머니가 결혼하게끔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다. 하지만 마리아의 어머니는 마리아를 출산하다 사망하고야 말았다. 주치의 선생님의 삶에 대한 사랑은 곧 마리아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몇 년이 지난 이후에도 '나'는 마리아에 대한 사랑, 곧 삶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를 비통하게 여기는 대신, 오히려 이를 통해 위로를 받고 아직까지도 세상을 둘러싼 사랑을 느낀다. 마리아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는 결코 비극적인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단순한 러브스토리보다는 '나'의 성장을 그린 이야기에 가깝다.

싱그럽고 풋풋한 풀밭을 밟아 가며 철학과 시를 노래하는 이 책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마리아와의 사랑을 얘기하는 부분 외에서도 깨닫게끔 돕는다. <독일인의 사랑>을 통해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무언가를 사랑함으로써 나의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충만해질 수 있는지를 다시금 알게 되었다. 지금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우리 고양이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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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 필링스 -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앳(at) 시리즈 1
캐시 박 홍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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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손목의 염증이 심해진 요즘, 필사는 주로 SNS와 핸드폰을 통해서 한다. (검색이 가능하고 내 글씨는 너무 못생겼으므로...) 가장 먼저 쓴 말을 그대로 긁어오자면, "서문부터 완벽하다 진짜 이렇게 문제의식을 풀어낸 책이 존재하다니..." 가 된다. <마이너 필링스>를 읽는 것을 고려하고 계신다면, 부디 "한국 독자들에게""옮긴이의 글"을 빠짐없이 읽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책을 덮은 지금, 초록이라기보단 '쪽빛'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푸르른 테두리가 고운 분홍빛 표지를 침범하고 그 경계선이 모호해지는 표지를 보면서, 그리고 표지 하단의 가독성이 좋지는 않은 폰트를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서 이 책의 주제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책의 본문, (아마도 한국의 독자들만을 위해서 쓰여졌을) 들어가는 말, 그리고 표지까지 이 책은 굉장히 날카롭게 주제의식을 궤뚫고 있다.

"저자와 공감한다는 것은 저자와 동일한 체험을 공유한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 주장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어릴 적(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지 모르겠다 - 어리다고 표현할 수 있는 기간은 너무 기니까) 내가 늘상 가장 잘 하던 과목은 영어였고(나는 네 살 무렵부터 북클럽을 통해 동화책으로 영어를 배웠다), 고등학생 때의 나는 무표정하고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애였기 때문에(그리고 대외활동이 활발한 학교 특성상 교무실로 불려다닐 일이 많았으므로) 선생님들이 곤란한 얼굴로 미국과 연관지어 나를 설명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선생님이 이해하세요. 얘는 미국에서 살다 와서 그래요." 정작 나는 13살 때 한 달 정도 오렌지 카운티에 머무른 게 다였다. 이 에피소드를 말할 때면 지금까지도 이 말을 덧붙인다. "진짜 웃겨, 내가 그렇게 부자로 보였나(그때와 지금의 내 모습은 절대 그렇지 않았으므로)?" - 이 말을 보면 내가 아시안-아메리칸, 혹은 코리안-아메리칸에 대하여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내가 아무리 이 책을 몇 백 번을 읽어도, 아무리 영어를 유창하게 구상하고 수많은 책을 원서로 술술 읽어도, 그리고 만일 내가 N년 후 미국에서 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캐시 박 홍과 동일한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다른 아시아인들과 함께 있으면 결속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경계선이 흐려지고 한 무리로 뭉뚱그려져서 더 열등해지는 기분이 든다."

같은 한국인 사이에서도 정체성은 수없이 갈라지는데, '아시안-아메리칸'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묶여 순종적이고, 모범적이며 눈에 띄지 않는 (중국계 미국인의 이민은 1800년대 후반에도 이루어졌는데 말이지), 그리고 언제든지 백인으로 대체가 가능한 존재가 된다. asian이라는 말도 뭉뚱그려 사용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통틀어서 asian이라 칭하고, '얼굴을 식별하지 못하거나 그 사람의 국적을 잘못 아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넷플릭스 시리즈 <굿 플레이스>의 제이슨은 나는 필리핀 사람인데! 여기도 인종차별적이야! 라는 대사를 한 적이 있다. 한중일의 경우 세 나라는 전쟁, 심지어 식민 통치로 인해 뿌리깊은 악연으로 얽혀 있고, 영화 <샹치>의 케이티의 집에서 드러나듯이, 각 집안, 즉 각 나라의 전통과 역사는 매우 중시된다. 이때 백인에 대항하기 위하여 갑자기 '한 편이 되어 목소리를 낸다'는 발상은 우리에게 상당히 곤혹스럽게 들린다.

내가 미국에 아주 잠시 머물렀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같이 다니는 친구들은 그저 같은 한국인이 단 한 명 있다는 이유로 '아시안-아메리칸'으로 이루어진 그룹이 되었다(그 아이가 할 줄 알던 한국말은 '엄마' 단 한 마디밖에 없었다 - 그 친구는 이민 2세대였으므로). 오히려 베트남계 미국인이었던 한 친구와는 성격이 전혀 맞지 않았고(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학살과 같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그 그룹에 속하지 않은 서아시아계, 라틴계, 그리고 코카시안 소녀 세 명이 나에게 훨씬 다정하고 친절한, 관심사가 맞는 친구가 되었다.

넷플릭스가 상용화되고 인생 드라마인 <길모어 걸스>를 주구장창 틀어놓고 지낼 수 있는 요즘, 그리고 유튜브나 SNS로 밈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요즘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밀접한 정서를 공유하게 되었으나, 우리의 인종적인 지위는 결코 동등하지 않다. Youtube나 SNL을 봐도 그렇다. 최근에 합류한 Bowen Yang은 SNL Asian guy로도 검색이 가능하다. 얼마나 모멸적인 일인지. 사람들은 결코 다른 백인 호스트를 White guy라는 인종적인 특징만으로 검색하지 않는다. 점차 자라나면서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인종'이 된다는 점을 한국에서도 여실히 느낀다. 나는 14살 때부터 지금까지도 취미로 국제 펜팔을 이메일로 하고 있는데, 성인의 경우 동양 여자를 노리는 '변태'가 대부분이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 그 플랫폼을 더 이상 마음 편히 쓸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관심사나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대상화'를 피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상대방의 성별과 국적을 살펴봐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자동으로 규정하는 낡은 인종 서사, 우리의 삶을 백인 청중의 구미에 맞추면서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다양한 현실을 삭제해버리는 낡은 인종 서사를 갈아치우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어진 공식에 따라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 일을 그만두자는 것이다."

"그게 확실히 문젯거리였다. 영어로 써놓으면 한국어에 서린 친밀감과 우수가 사라졌다. 영어는 내가 어릴 때부터 세관 직원, 위협적인 교사, 홀마크 카드와 연관 짓던 언어였다. 영어를 배운 지 그렇게 여러 해가 흘렀어도 영어로 글을 쓰려면 아직도 빈칸 채우기를 하거나 남의 원문을 재인용하는 것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영어는 자신의 언어가 아니고, 자신의 의식을 결코 진정으로 반영할 수 없고 하나의 표현 형식인 만큼이나 자신의 의식에 지워진 부담이라는 것을 내비쳤다는 점에서 차가 구사한 언어는 나의 언어였다."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한 나에게는 캐시의 아버지가 지은 경직된 미소가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룸메이트의 아버지는 단지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차별은 무지에서도 오기 마련이니까). 우리가 먼저 UN군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도 문제는 없다. 우리는 정말로 삶 자체가 파괴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나와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들, 그리고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언제까지 시혜적인 태도에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입맞에 맞춰 감사함을 '표현해야만' 하는가? 아르바이트를 할 때, 포스기 앞에서 당당하게 영어로 모든 것을 말하고 오타를 지적하고 간 (억양상)북미계 손님이 있었다. 당연히 사장님은 감사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하지만 여기는 영어권 국가가 아닌 한국이다.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 혹은 (경험상)대다수의 백인들은 여행을 오면서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적어도 이 세 마디도 하지 못하거나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것은 게으르기 짝이 없는 무례한 행동일 뿐이다.

"그때 우리는 경력을 쌓는 모든 단계에서 매번 과소평가 당했기 때문에 각자 능력을 되풀이해서 증명해야 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우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시안-아메리칸"에 관한 문제 의식을 (그 주제 의식이 워낙 명확하고 날카로우니 이는 매우 힘들 것이지만 말이다)제쳐놓아도, 책을 사랑하고 대학을 다니고 강의를 듣던 작가의 유년 시절에는 우리가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는 수많은 에피소드와 통찰이 존재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 그 중 하나이다. 나 역시 필기구 두 자루를 사기 위해 밤 아홉 시에 버스까지 타고 핫트랙스를 헤매고 다닌 적이 있으니까. 또한,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멘탈리티'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다. 우리는, 즉 한국인들은 정말 수도 없이 사회에게 자신을 증명해내기 위해 번아웃과 싸우고 있다. 우리는 아마 인종과 관련된 압박에서는(아시아인은 주류 사회에서 그 존재감이 쉽게 지워진다) 조금 자유로울지 몰라도, 사회경제적인 압박과 성별에서 오는 압박을 이겨낼 방도는 도무지 없다.

"침묵의 문제점은 침묵하는 이유를 목청 높여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침묵은 쌓이고, 증폭되고, 우리의 의도 밖으로 자체의 생명을 얻어 무관심이나, 회피나, 심지어 수치심으로 잘못 해석될 수 있으며 결국 이 침묵은 망각으로 이어진다."

<딕테>의 저자이기도 한 차의 이야기(그 처리과정)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큰 충격을 받지 않았는데 - 이는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자괴감을 느낀다 - 우리는 사회경제적으로도 반듯하고 눈에 띄지 않는, 그래서 "쓸모가 많은" 인종이기도 하나(대학에서는 어쩌면 아시안-아메리칸의 입학을 한 명이라도 막기 위해 인종별 쿼터제를 시행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만큼 우리에 대한 혐오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인종이기도 하다. 그 예시로, 우리는 2020년 이래로 '코로나'라고 칭해지거나, '중국인'으로 오해를 받는 사소한 혐오 범죄micro-aggression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는 이를 핑계로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 미디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시아계 캐릭터들은 늘 존재하지 않고, 그 캐릭터가 극 중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보통 존재감이 없거나 스테레오타입에 꼭 들어맞게 된다(그 예시로 우리는 아시아 여성 캐릭터들의 상징인 보라색 브릿지 머리를 증오한다).

"나는 "소속되지 못한 상태"와 "중간에 끼인 느낌"이라는 이민자 관련 쟁점이 늘 불만족스러웠다."

"만족을 모르고 사들이는 물질적 소유물이든 주류 사회에 편입했다는 마음의 평화로서의 소속감이든 belonging은 언제나 약속되며, 아슬아슬하게 손 닿지 않는 곳에 있어서 우리가 유순하게 처신하도록 유도한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의식이 해방되려면 우리는 이 조건부 실존으로부터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

사실 저자의 말처럼 "소속되지 못한 상태"라는 쟁점에 나는 잘 공감하지 못한다. 미국인을 단순히 "부자"라고 칭한 내 편협한 인식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옮긴이의 말에서 나왔듯, 어쩌면 나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을 이를, 그리고 일반적인 2-30대가 꿈꾸는 '탈조선'을 이미 이루어 낸(그것을 이루어 낸 게 자신이든 누구이든간에)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공감하고 지지와 연대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가 단순히 '안락함'에 편입되기 위해, 그들(주류 사회를 이루는 백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들의 기준에 우리를 "끼워맞춘다면", 아시아계,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은 영영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주류 사회에 포함된 아시아인은 단순히 돈이 많거나, 머리가 좋은, 그리고 여전한 "아시아인"일 뿐이다 (이는 <놉>의 주프를 통해서도 단적이고 섬세하게 드러난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책의 뒷표지에서와 같이 차별을 마주하는 것은 정말이지 수치스럽고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캐시 박 홍은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개인적인 이야기와 아시안-아메리칸, 그리고 코리안-아메리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을 정교하게 비판한다. 앞서 말한 대로 해외 문화가 쏟아져 들어오는 지금, 우리는 그만큼 더 많은, 이유모를 불편함과 마주하게 된다.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도 이 책을 반드시 권하고 싶을 만큼, 우리 모두는 동양인과 한국인에 대한 차별에 더욱 예민해져야 하며, 이를 용기있게 맞닥뜨리고 대응할 방법을 배워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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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야행로 창비세계문학 17
시가 나오야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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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야행로는 주인공 켄사꾸의 묘연한 삶을 따라 '끝없는 방황'에 가까운 고뇌와 그에 따른 여행으로 가득찬 소설이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간다는 뜻인 제목만큼 켄사꾸는 끊임없이 고독함과 고뇌에 빠져들고 그 속을 마음껏 배회하며, 정처를 잃고 떠도는 삶을 지속한다. 삶은 소설보다 이상하고 기이하다고 했던가. 부정하고만 싶었던 기이한 운명은 켄사꾸를 시시때때로 궁지로 몰아넣고, 켄사꾸는 이로부터 도망치려고 끝없이 괴로워하면서 시도하나 결국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구조로 소설은 구성되어 있다. 소설은 켄사꾸가 맞닥뜨리는 운명에 따라 1부와 2부로 나뉘어지는데, 운명을 '뚫고 나가려는' 시도를 과감하게 하는 대신 이에 좌절하고 굴복하는 것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주인공의 모습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켄사꾸는 운명에 그대로 순응하는 대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에반게리온의 캐릭터들처럼 끝없이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진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코로나 시대를 겪는 2022년 누구보다 낯선 풍경이 그리울 시점에 마주한 1800년대 말- 1900년대 초반 끝없이 이어지는 여행길은 이 소설의 매력을 끌어올린다. 국권침탈기에서 대일항쟁기로 이어지는 격동과 투쟁의 시대 대신 일본의 지방과 같이 지나가는 길목의 하나로만 그려지는 조선의 모습도, 전통적인 일본의 복색이나 가옥과 어우러지는 기차나 서양의 의학과 기차와 같은 현대 문명도 그러하다.

#창비세계문학 #세계문학전집 #창비 #시크릿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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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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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애착


  엄마와 딸 사이의 관계를 그린 작품 중 내가 가장 처음으로 접한 것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사나운 애착을 사랑하는 독자께서는 분명 유명 시리즈인 길모어 걸즈도 알고 계시지 않을까. 시리즈에서는 엄마 로렐라이와 딸 로리의 인생을, 그들 사이의 유쾌한 수다와 진한 유대감을 따뜻한 시선으로 함께 그려나간다. 엄마와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친밀하고 가까운 사이로 자라난 나는 그 드라마를 십 년 넘게 돌려보면서 끊임없이 웃었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엄마와 딸 사이가 저토록 가까운데 저렇게 평화로울 수 있다니!(변명을 하자면 늘상 그렇지만은 않다)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은 예측할 수 없는 극심한 폭풍우처럼 변화무쌍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안에서 살아 움직일 수 밖에 없는 보다 현실적인 모녀관계를 누구보다도 통찰력 있고 날카로운 문체로 거침없이 써내려가고 있다. 나 또한 오늘 엄마와 단 둘이(어쩌면 고양이를 포함하여 셋이) 커피와 파와 오뎅을 잔뜩 넣은 국물떡볶이를 신나게 만들어 먹었고 남동생이 일으키는 소음 때문에 곧바로 한바탕을 했다. 

  비비언 고닉은 유년시절 거주하던 아파트의 계단을 뛰어다니듯이 과거와 현재를, 브롱크스와 맨하탄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린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서술은 그녀가 그려내는 모녀관계와 이웃들과의 관계와도 잇닿아 있다. 과거는 흐려지기도 하지만 엄마와 딸의 한 마디에 파도처럼 기억과 감정은 휩쓸리듯 쏟아진다. 모녀의 대화도 그러하다. 고의 여부와 관계없이 던져진 한 마디, 한 단어는 지나치게 짧은 도화선, 제어장치가 없는 스위치로 변하고 모녀는 모든 감정을 서로에게 쏟아부으며 전력을 다해 싸워낸다. 어머니가 없을 때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서도 그러하다. "말도 안 돼!" 와 같이 어머니는 갑자기 딸의 내면에서 튀어나와 자신의 절대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딸은 그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저자가 떠올리고 그려내는 이미지와 기억은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고 산만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일직선상으로 흘러가는 타임라인은 적어도 꿈과 기억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여기도 써 있네. 여자도 대학에 가야 한다고." 와 같은 응원, "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와 같은 최고의 찬사를 어머니에게 받은 후로도, 작가는 '엄마한테 어떻게 보일 지는 나도 모른다'라 말한다, 모녀는 여전히 한 마디에 폭발해 분노를 서로에게 쏟아내고 자신을 방어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기억과 여정과 삶을 공유하며 떨어지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불안정하지만 영원한 공존이야말로 지극히 어머니와 딸 다운 결말이자 관계가 아닐까. 

 

이 책이 글항아리의 비비언 고닉 선집의 제 1편이라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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