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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청설모 까치 ㅣ 작은거인 13
장주식 지음, 원혜영 그림 / 국민서관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장주식선생님을 만나면 늘 우직한 오라비를 만나는 느낌이다.
오빠가 아닌 오라비 그것도 큰 오라비처럼 든든하다. <매화꽃 향기>를 읽고
'이런 글을 쓰는 교사가 있구나! 덜 부끄럽겠다.' 하믄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매화꽃>은 많은 아쉬움을 주는 책이었다. 그 뒤 <깡패 진희>를 거쳐 <전학 온 윤주, 전학 간 윤주>까지 그의 책 속에 나오는 아이들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대개 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여자 아이라 남자 아이 이야기는 언제 나오나? 혼자 궁금해했던 적이 있다.
장주식선생님은 서울을 거쳐 지금 경기도 여주에서 살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라는 말이 어울릴만한 그런 집에서 넉넉하고 소박한 모습의 삶이 그려진다.
그래서 일까? <토까 청설모 까치>는 작가가 무지 아끼고 살갑게 키운 자식같은 느낌이 들었다. 토끼며 청설모, 까치는 작가가 살고 있는 마을에 가까이 둥지를 틀고 동네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며 사는 건 아닐까?
봄,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다.
상미네 집에서 토끼가 풀렸다. 수컷 한 마리, 암컷 두 마리다. 사람들은 참 좋아했다. 하얀 토끼가 마을 고샅길과 텃밭과 뒤란과 마당을 오가며 뛰어노니 평화롭고 한가해서 너무 좋다고들 했다. (10면)
첫 문장이 깔끔하다. 아이들에게 읽어주니 금방 이야기 속으로 들어왔다. 토끼를 본 아이나 보지 않는 아이라 하더라도 '토끼'라는 말에 아이들은 토끼같은 눈을 뜨고 내가 읽어주길 기다렸다. 그 뒤 토끼 잡는 이야기나 토끼 가죽 벗기는 이야기를 듣더니 신기해 했다.
그런데 교회집 아저씨가 풀어놓은 진돗개에게 잡힌 수토끼를 요리하고 술상차려 먹는 어른들 이야기에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뚱했다. 어떤 아이는 "웩, 우웩!" 그리기도 했다.
그렇겠지. 자기가 키운 토끼가 죽었는데 그걸 먹으려면 술이 있어야겠지.
남은 두 마리 토끼도 고추 모종을 갉아먹으면서 명을 달리 했다.
인천 할배 그물에 잡혀 <산 채로, 꽁지는 빼앗긴 채로 토끼는 두 귀가 잡혀나왔다.>
토끼가 만들었던 평화로운 풍경은 채 보름이 가지 못했다.
뒤이어 나오는 청설모이야기는 더 현실적이다.
밤잠을 못 자게 하는 청설모 어미와 새끼들을 잡기 위해 다복아빠는 쥐 잡는 틀도 쓰고 찍찍이도 붙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청설모들은 기와장을 뚫고 지붕을 점령한다. 몽둥이로 청설모를 잡은 다복아빠는 팔을 부르르 떨며 생명을 없앤 경험 앞에 무기력해진다.
동쪽 산 위로 떠오른는 해를 차마 보지 못했다(77면)
청설모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이다. 긴 여운이 남는다. 차마 보지 못하는 것이 어찌 다복아빠 뿐이겠나? 고속도로나 국도를 달릴 때면 길 위에서 죽어가는 동물들의 시신들을 볼 때마다 섬찟한 느낌이 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걔네들이 조심해야지...... 하며 눈을 돌렸던 기억이 났다.
마지막 까치 이야기는 작가 '그들과 같이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다음에 살 아이들한테 어떤 이야기를 해 줄까?'를 오래 고민하고 쓴 글이 느껴진다.
깊은 뜻이 숨겨져 있지만 그림처럼 글도 간결하고 자세하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다복이나 다정이는 토끼나 청설모를 잡을 때는 강건너 불구경 하듯 토끼국까지 맛있게 먹더니 까치이야기에는 전면으로 나온다.
"아빠, 까치 좀 밟로 밟아!"
"응?"
"발로 밟으라니? 까치를 어떻게 발로 밟아?"
"아빠가, 청설모를 발로 밟아 죽였잖아. 그러니까 까치도 발로 밟아."
"........"
"시끄러워서 텔레비젼을 못 보겠어." 다정이는 그 말만 해 놓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84면)
아이들 세계에서 토끼나 청설모나 까치는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존재들인가 보다. 그러니까 까치의 시끄러운 소리에만 신경을 쓰지...... 하지만 아이들은 다 보고 있다. 그러니까 아빠가 나중에 큰 벌 받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하고, 옛날이야기에 작은 동물 해치면, 그 동물이 엄청나게 커져서 원수를 갚는다는 말을 하면서.
다복이 이모부가 "사람 사는 집에 동물이 들어오면 좋은 거여......"
하는 말은 오래 것이 아니다. 우리 어릴 적엔 다 그렇게 살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젠 다복이 아빠나 엄마처럼도 살지 못하고 있다.
두꺼비나 꽃뱀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 챌 수 없는 그들이 다 떠난 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더 늦지않게 그들과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 길에 동화도 시도 이야기도 같이 동무하여 가야함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