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원래 공부 못해 창비아동문고 244
은이정 지음, 정소영 그림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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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거기 서! 찬이 뭐 하는 짓이야? 공부해야지.
담임이 상황을 파악했는지 벌떡 일어섰다.
"난 원래 공부 못해! 난 할 일이 있어!"
찬이가 교실이 왕왕 울리도록 크게 소리 질렀다.
쾅!
뒤쪽 교실이 문이 닫혔다. 한참 동안 미닫이 나무 문이 부르르르 떨렸다.
<난 원래 공부 못해! 137면>

 

그래, 이렇게 박차고 나가는 거야. 찬아. 아니 우리 아이들아, 내 안의 아이야.
 

창비아동문고 244  난 원래 공부 못해 (은이정 장편동화/정소영 그림)

제목은 불량스럽다. 그림은 환하고 맑다. 건강하게 웃는 남자아이가 푸른 하늘을 날고 있다. 손가락을 쫙 피고 두 팔을 날개처럼 앞 위로 흔들며 건강한 다리로 성큼성큼 하늘을 걷고 있다. 까맣고 작은 아기 염소가 웃고 있고 숲 길을 따라 가면 푸른 기와집 한 채가 동그마니 서 있다. 산벚나무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작은 새가 노래하고 있다. 아, 그림 좋다.

책을 읽는내내 십 수년전 첫 발령을 받은 가곡초등학교가 떠올랐다. 그 때 만났던 스무명 아이들과 같이 걸었던 과수원길과 산길, 가재잡던 금실내가 떠올랐다. 고소하고 알싸한 쨍쨍한 햇볕에 말린 이불냄새 같은 향기가 내 주위를 감쌌다.

'스물 셋 어린 여선생은 시외버스와 시내버스를 연달아 갈아타고 꼬불꼬불 산길을 넘어 일월산 밑 가곡리를 그렇게 찾아갔었지.'
아마 멋진 연희샘도 그러지 않았을까? 혼자 상상해 본다.

그런데 연희샘이 처음 만난 아이는 책을 많이 읽고 심하게 공부를 잘 하는 진경이다.

바로 주인공 '나'이다. '나'는 멋진 연희샘이라 불러달라는 '밑동이 발길질당한 나무의 이파리처럼 말소리가 부르르 떨리는' 초보선생을 '그 여자'라고 부른다. '여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내가 보기에 처음인 걸 너무 티내는 담임의 행동과 이에 장단 맞추는 같은 반 아이들이 다들 유치했고, 진짜 이유는 끝까지 같이 있을 것처럼 말했던 3학년 담임이 아무 말도 없이 전근을 가 버렸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냥 좋았던 선생님. 잘 생긴 남자선생님이고 이야기도 재미있게 해 주었는데 ....... 선생님을 좋아하는 마음에 선물까지 준비한 '나'는 3학년 담임이 다시 학교에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새로 만나 담임에게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진경이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아이들에게 선생님과 관계는 참 소중하다.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선생님이 참 많다.
"선생님, 어때?" 하고 물으면 "어떤 선생님요?" 하고 되물을만큼 그래서 이별도 쉽다.
학원은 맘에 들지 않거나 사정이 생기면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으니 그렇고 학교도 일 년만 버티면 또 다른 아니 다르지 않은 그저그런 교사를 만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여기 선장초등학교는 시골학교이고 6년내내 똑같은 반에서 같은 동무들하고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특별하다. 아니 특별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아이들에게 반짝거리는 얼굴로 인사하는 '멋진 연희샘'은 좋아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여자'도 곧 작은 시골학교를 떠나 큰 학교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왕초보 연희샘과 연희샘을 너무 좋아하는 그러나 지독하게 공부를 못하는 찬이와 4학년 아이들의 관계는 <오오오대작전>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멋진 연희샘은 최대한 많은 관심을 여러분한테 쏟을 거야. 그래서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도시 아이들처럼 똑똑한 아이가 되도록 할 거야." 라고 선언을 한 다음 이렇게 쓴다.

 
영어 단어 다섯 개 외우기
수학 문제 다섯 개 풀기
한자 다섯 개 외우기
(위 책 53쪽)

 

이름하여 오오오 작전과 오오오 공책이 나누어진다.

 
연희샘의 논리는 이렇다.

영어 단어를 많이 알면 앞으로 어른이 돼서 많은 일들을 잘 할 수 있다.
수학문제를 꾸준하게 풀면 연산 능력이 좋아져서 중고등학교 가서 문제를 빨리 풀고 논리적인 사로를 할 수 있다.
한자 공부를 하면 어려운 책을 읽을 때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와~ 우. 지금 우리 학교에서 하는 각종 인증제에 나오는 말이다. 영어 스텝 점프 과정, 수학 단계별 학습, 장원급제 한자 인증제, 아, 여기다 줄넘기 급수제와 리코더 단계별 연주장까지 더 하면..... 아니지 아니지 독서지도 단계장도 있구나. 그리고 동시 100선까지.

우웩~ 생각만 해도 멀미가 나는데 3학년만 되면 이런 저런 인증장과 급수장 그리고 해법 수학, 왕수학, 토플 시험까지 봐야 하니 .......
 

오오오작전이 아이들의 반발과 울음으로 삼삼삼 작전까지 내려왔지만 찬이는 여전히 숙제도 과제도 시험도 다 못한다. 멋진 연희샘이 '왜 안 하니?' 하고 물으면 "난 원래 공부 못하는데...." 라며 우물쭈물거린다.
이런 찬이를 위해 담임은 차까지 사고 나머지 공부를 시킨다. 담임의 무모한 열정에 아이들은 숨을 쉴 수 없고 고통스러워 한다.

 

담임한테 한바탕 욕을 해 주고 싶었지만, 흔한 욕 한마디 떠오르지 않았다. 피곤에 지친 얼굴로 시험지를 넘기는 모습을 떠올리면 담임도 찬이만큼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삼삼삼 대작전은 아이들을 위한 것도, 그렇다고 담임을 위한 것도 아닌 괴상한 괴물로 변해 버렸다.

(같은책 107면)

 

아이들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교사.

"왜 공부를 못해? 하면 된단다. 노력도 안 하고 못 한다고 하는 건 게으르다는 거야. 게으른 건 죄악이야."

아마 교사가 된 많은 사람들이 공부 못하는 아이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일 것이다.

나도 처음엔 이해를 못했으니까. '왜 공부를 안 하지? 왜 책 읽기를 싫어할까? 이렇게 선생이 열심히 가르치면 따라와 줘야 되지.

하려고도 안 하는 그래서 너무 바보같고 게을러 터진 아이들이 불쌍하고 안쓰럽고 내가 아니면 누가 구제하나!' 싶어 어떨 땐 회초리를 들기까지 했지.

 

아~ 내 경험으로 비춰 볼 때, 나는 딱 한 달만에 이 생각을 접을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4월 5일 우리반은 전체가 모여 가정방문을 다녔다. 숲길을 걸어 윗 마을과 아랫마을을 거쳐 공동묘지를 지나고 삼밭을 돌아 고추밭과 담배밭을 지나며 아이들이 사는 산골집으로 가 보니 몸으로 알겠더라. 공부란 거 ...... 꼼짝 달싹 못하게 해서 달달 외우는 거.... 살아가는 데 몸을 움직여 부지런히 삶을 보듬는데 최소한 필요한 만큼만 하면 된다는 것을.

그런데 멋진 연희샘은 차까지 사고 찬이가 교실을 뛰쳐나가게까지 만들다니.... 쩝. 맘이 아팠다.

그래도 다행이다. 찬이네를 찾아간 연희샘과 담임의 맘을 알게 된 찬이, 산길을 걷다 넘어진 연희샘은 학생인 '나' 앞에서 속옷을 보이기까지 하고 도움을 받게 되고 그런 담임을 보며 상처를 걱정하는 '나'. 이렇게 셋은 아프고 쓰라린 상처를 통해 서로를 알게 된다. 마음을 열고 소통하게 된다.

그리고 멋진 연희샘은 그냥 연희샘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간다.

(음~ 그래 나도 아이들이 은경샘이라 아니 은경쌤이라고 부르는게 정말 좋아...... 가끔 이쁜 우리 쌤이라 불러주면 입을 닫지 못할만큼 바보 같지만 말이야.)

 

'나' 진경은 3학년 담임에게 주려 했던 책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를 다시 풀어서 편지를 쓴다. 연희샘에게 술술 잘도 쓰이는 편지.


내일 아침 일찍 연희 샘 손을 내밀 때 손 대신 책을 내밀어야지 마음 먹었다. 그런데
악수 아님 포옹?하고 물어오면 어쩌지? 확 포옹해 버릴까, 여자끼린데 어때.

 

이만큼 성큼자란 '나'와 여전히 활기차게 계란삶아서 할아버지께서 오신다는 이야기를 꺼리낌없이 하는 찬이와 욕심장이에 거짓말까지 했다고 고백하는 '연희샘'까지 그들과 함께 자랄 열 여덟명의 아이들이 환하게 다가온다.

 
정말 동화다운 결말이다. 내가 가는 길말고 다른 길도 있음을 알려주려는 작가의 소망이 느껴진다.  다음 주가 개학이다. 다시 파도처럼 밀려올 학교 현실을 생각하니 <난 원래 공부 못해>는 정말 동화라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관계가 변화의 시작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뭐가 문제인가 생각해 본다. 

방학 내내 같이 공부한 새발가락이 했던 말이 가슴가득 차 오른다.


"나는 아이들을 가만 앉혀놓지 않을거야. 자꾸 움직이게 할 거야. 아이들 곁에 바짝 붙어있을거야. 아이들 이야기를 솔깃하게 듣고 눈을 맞출거야. 그리고 노래하고 자꾸 놀거야. 이렇게~"

 나는 새발가락만큼 아이들 곁에 바싹 붙어있진 못해도 손을 잡고 같이 생각하고 또 생각할거다.
난 원래 공부 못 해 하는 아이들의 말도 솔깃하게 듣고 고개를 끄덕일거다. 그리고 눈도 맞추고 가끔 뽀뽀도 할 거다. 히~


2008. 08. 22. 쇠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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