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벌레를 위하여 (양장) - 열세 마리 가중나무고치나방 애벌레 이야기
이상권 지음, 오정택 그림 / 창비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똥이 어디로 갔을까?>나 많은 동화 속에서 구수하고 정겨운 자연이나 고향에 대한 작가 이상권의 느끈한 믿음과 생각들을 아이들과 나누며 난 참 많이 생각하고 되돌아보기를 했었다.

또 책을 읽으면 행간에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색다른 맛이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수닭/창비어린이>을 읽으며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내가 아는 작가 이상권이 맞나?
할 정도로 읽기가 힘들었다.
이제 다시 <애벌레를 위하여/창비>를 읽으며 이상권의 세계에 한 발 더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상권선생의 글은 온 몸으로 쓴 것이 보인다. 생태라기보다 존재 전체에 대한 묵시록 같은 느낌이다.

가중나무고치나방의 수컷과 암컷의 생애가 조용하지만 묵직하고 죽음을 이긴 사랑과 처절한 생을 흥미로운 상상력의 세계와 맞물려 인상 깊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암컷과 수컷이 한 몸이 되는 장면은 어떤 종의 결합보다 더 숭고하고 아름다웠다.

둘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배와 배를 맞댔다.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몸과 몸 사이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끌어안았다. 다리와 다리를 서로 엇갈리면서 서로의 몸을 더 강하게 자기의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더듬이와 더듬이도 서로 맞닿으면서 무엇인가 느낌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으므로 천적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황홀했으며, 어둠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계곡 아래쪽으로 찬란한 아침 햇살이 드리워지기 시작하자 더욱 단단하게 상대방의 몸을 잡아당겼다.(42-43면)

어떤 짝짓기도 이런 황홀하고 파격적인 몸짓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진정 오감이 열리는 모습이었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은 이렇게 온 몸을 열어 자신과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 나악 건강한 유전자를 남겨 생을 이어가게 하고 있다.

인간이 가진 사랑에 대한 어떤 열망보다 더 강렬함을 알 수 있었다. 작가의 상상력은 마치 정교한 카메라에서 비추는 곤충의 짝짓기를 보는 듯하고 이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깊은 속살을 들춰 본 경험이었다. 

암컷들의 생존 방식은 가장 건강하고 유능한 2세를 낳을 수 있는 수컷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 능력은 암컷 DNA 속에 내재되었다고 한다.

<여자의 뇌>를 읽으며 흥미로웠던 글 몇 부분을 떠올려본다.

흔히 사랑을 남녀간의 우발적인 ‘화학작용’으로 간주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사실이 아니다. 여자의 뇌는 재생산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파트너를 선택할 수 있도록, 즉 최상의 남자가 나타났을 때 미리 알아볼 수 있도록 준비돼 있다. - 106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여자나 남자 모두에게 있어 가장 불합리한 행동이다. 새로운 로맨스의 격랑 속에서 뇌는 ‘비논리적’인 상태가 된다. 연인에게 어떤 결함이 있든지 간에 맹목적으로 빠져들며, 이 과정은 거의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이뤄진다. 열정적 사랑은 뇌에 기록되면서 강박, 열광, 중독, 갈망, 허기와 같은 뇌회로를 공유한다. 그리고 단순한 하나의 감정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감정들을 강화하거나 감소시킨다. 사랑의 신경회로는 성적 충동을 부추기는 신경회로와 다르면서도 일부 겹치기도 한다. 또한 도파민, 에스트로겐, 옥시토신, 테스테스테론과 같은 호르몬이 활발하게 흐르도록 자극한다. -  119면

애무, 키스, 응시, 포옹과 같은 사랑의 행위들과 오르가슴은 뇌에 사랑과 신뢰의 신경화학물질, 즉 도파민과 옥시토신을 공급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뇌에 공급된 도파민과 옥시토신은 다시 사랑의 신경회로를 강화하는 한편, 불안과 염려의 신경회로를 억제한다. - 121면

과학적 사실을 토대로 쓴 글이 퍽 인상적이다.
다시 애벌레로 와서, 짝짓기를 마친 암컷나방과 수컷나방의 행로를 따라 가보면 인생은 결국 죽음이란 시간의 문을 행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하더라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연약한 애벌레 한 마리가 험한 자연 속을 헤쳐가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세워가는 여정을 지켜보며 우리는 우리 안에 또 다른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베르베르가 쓴 <개미>란 소설을 떠 올렸다.

<애벌레를 위하여>도 좀 더 깊이 장편의 특성을 빌려 역동성과 전환점을 마련하였다면 좋았을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수컷 나방의 죽음은 너무 이른감이 있다. 좀 더 살려두고 이야기의 새로움을 주었다면 그 흐름이 깨지 않았을텐데......

작가이상권의 또 다른 작품을 기대하며 그가 꿈꾸는 자연과 인간의 공생관계를 내 삶 속에서 실천할 일만 남았다.

<2007. 10. 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