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
류근 지음 / 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오랜 만에 산문집을 읽었다. 감히 글을 쓰신 류근님의 삶의 깊이가 느껴진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맨날 그렇게 취해 있으면 시는 도대체 언제 써요? 라고 어떤 분이 물었다. 나는 말없이 또 한 병을 비우며 혼자 조용히 천장을 바라봤다. 파리똥 무늬가 고요했다. 술 안 마실 때에만 골라 쓰느라 18년 만에 시집을 냈다는 걸 말해주기 싫었다.”(p.25)

 

우리 시대, 풍문으로 존재했던 천재 시인 류근, 스스로를 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 시인이라고 말하는 시인 류근의 산문집은 분위기 있는 표지에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라는 부제까지 달았다. 흔히 생각하는 시인의 격에 맞는 고즈넉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다.

 

책을 읽다가 보면 꽃들이 자꾸만 암내를 풍기는데, 시답잖은 시 읽으며 시가 오지 않는 강의실에 시 팔러 가야 하는 나도 참 조낸 시시한 인생이다. 시바’(p.125)와 같은 글들을 만날 수 있다. “아프다. 링거 한 사발 얼음 둥둥 띄어서 원 샷 하고 싶다. 너무 멀리 왔다. 어려운 책을 읽고, 쉬운 영화를 보자. 그건 내가 내리막에서 자전거 타는 것보다 잘 할 수 있는 일, 어제는 초조와 분노 때문에 아름다웠으니까 내일은 새로운 고통이 배달될 것이다.”(p.126)

 

내가 까마득한 공포에 사로잡혀 헉헉, 숨을 헐떡이는 그 순간, 그가 아주 단호하고도 아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인이여, 지상에서의 삶은 얼마나 불행했던가……. 지상에서의 삶은 얼마나 불행했던가…… 그 순간 나는 생애의 모든 공포를 잊고, 공포의 감미로운 매혹을 잊고 하느님이 베푸신 허공의 한 평화로움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철새라도 몇 마리 비행기 날개에 앉아 쉬었더라면 더 아름다웠으리라. 그날 내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은 소설가 이외수였다.”(p.12)

 

선글라스를 낀 국방색의 남자 밍규는 커피를 마시러 다방에 가는 길이었고, 나는 라면 사러 가는 길이었으므로 그냥 그렇게 길 위에서 그럭저럭 헤어졌다. 나는 또 속으로 아, 밍규가 돈을 좀 많이 벌어야 할 텐데하면서 그의 건승을 진심으로 빌어줬다. 선글라스를 낀 국방색 남자는 지가 소설가 박민규라고 말했다.”(p.18)

 

이 책에 실린 류근 시인의 산문은 다른 시인들이 쓴 것들과는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자세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끙끙 앓는 품이 매우 견결하고 순정하게 느껴진다. 특히 시인의 고향이 문경이라 더욱 친근해진다. 나의 고향은 문경과 가까운 상주이기 때문이다. 고향에 갈 때는 언제나 문경을 거쳐 가는 나로서는 문경은 고향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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