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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의 빛 : 시인이 말하는 호퍼 (리커버)
마크 스트랜드 지음, 박상미 옮김 / 한길사 / 2016년 8월
평점 :
<빈방의 빛> 마크 스트랜드 지음, 박상미 옮김
103p
1963년에 그려진 호퍼의 마지막 걸작인 이 그림은 우리가 없는 세상의 모습이다. 단순히 우리를 제외한 공간이 아닌, 우리를 비워낸 공간이다. 세피아색 벽에 떨어진 바랜 노란빛은 그 순간성의 마지막 장면을 상연하는 듯 하니, 그만의 완벽한 서사도 이제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책의 표지이자 이름이기도 한 호퍼의 마지막 작품, <빈방의 빛>.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이 가장 인상 깊었다. 에드워드 호퍼는 어떤 마음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을 알았을까.
책에 적힌 것처럼 우리는 이 작품에서 '연속성보다는 종말의 기미'를 느낀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며 슬로우모션을 떠올렸다. 시간이 정지된 채로 놓여 있는 빈 방. 가구도 없고, 사람도 없이 '남겨진 방'의 이야기.
이 방은 어떤 용도로 쓰이는 방이었을까? 침실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침실은 개인적인 공간이다. 거실과 침실 사이에는 선이 있다. 그 선은 외부인이 함부로 발을 디딜 수 없도록 경계를 만들어낸다. 침실은 오직 나만의 공간이고, 때문에 비밀스럽고 낭만적이다. <빈방의 빛>은 그 공간이 비워졌을 때 느끼는 애틋함과 허전함을 전한다.
내가 세상을 떠난다면, 나의 방도 이런 느낌을 주게 될까. '나를 비워낸 공간, 나를 비워낸 세상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이 작품에 마음이 갔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 것 같다. 해설을 읽고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모든 게 빈 방에 빛이 들어오는 그 순간이 아름다우면서도 적적함을 남겨서.
책 <빈방의 빛>은 시인 마크 스트랜드가 들려주는 '호퍼의 작품 해설'이다. 총 서른 점의 작품을 천천히 파악해가며, 감상자가 그 작품에서 느끼는 미묘한 감정들을 글로 표현한다.
읽는 내내 '내가 느낀 이 감정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 하면서 감탄했다. 특히 작품 <햇빛이 비치는 이층집>을 보며 느낀 아이러니를 '그림 속 다른 요소들은 서로에 대한 관계가 명확한 데 반해 두 사람의 관계는 모호하다'라는 말로 표현한 구절을 보면서는 내가 가진 단어들이 얼마나 단편적인지 느낄 수 있었다.
딱딱하지 않은 해설이라 좋았다. 내용은 짧지만 시적인 표현들이 있기에 오래 곱씹어야 하는 문장이 꽤 있다. 이 문장을 보면서 '시인은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생각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본문을 읽고 그림을 보고, 그림을 보고 본문을 읽고, 그림을 들여다보며 본문을 읽고. 이렇게 총 세 번 감상하며 호퍼의 작품들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본으로 만들어져 그림을 보는 데에 무리가 없다. 책이 180도로 잘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림이 실리는 책에서는 책이 접히는 부분이 최대 난관으로 꼽힌다. 접지선으로 그림이 잘리고, 그 부분이 붕 뜨면서 그림이 왜곡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것을 최소화 하기 위해 실제본을 택했다.
독자의 감상도 존중한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여백도 마음에 들었다. 그림을 다 채우지 않고 여백을 남겨두었는데, 이 여백에 나의 감상을 적으면 딱 알맞을 것 같다.
5월 한 달 동안은 에드워드 호퍼와 함께 보냈다. 조예가 깊지 않았던 에드워드 호퍼에 대해 알 수 있어서, 그의 작품에 대해 알 수 있어서, 그 작품의 해설에 대해 알 수 있어서 좋았다. 6월의 첫 책으로 <빈방의 빛>을 읽으며 이제 또다른 시작을 마주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