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민주노동당, ‘진보정치’ 그리고 ‘사회이행’ 2

3. 좌파연대의 장벽: ‘제도정치와 운동정치라는 이분법’

좌파, 진보의 기준을 자본주의의 극복과 그 대안의 고민이라는 문제로 축소시킨다면, 민주노동당은 분명 좌파진보정당이다. ‘대중정당’인 민주노동당은, ‘계급연합적인 성격’ 또한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민주노동당 안에 ‘급진민족주의그룹’이 영향력 있는 당내 구성주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민족민주정당’을 지향하는 이들은 ‘노농동맹’을 이야기하지만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양상이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노동자대중운동이 민주노동당의 강력한 정치적 지지기반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민주노동당을 민족민주전선에 복무하는 ‘전술 단위의 합법정당’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정대연, 앞의 글 참조.
이 점에서 이들은 일부 급진좌파그룹과 상통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이처럼 아직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민주노동당에 주목하는 것은 이미 언급한 대로 좌파진보정치세력들의 연대문제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민주노동당 내부의 긴장관계들을 넘어 더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관계설정 문제이다. 부르주아정치 혹은 법에서 전자는 ‘공적인 것’으로, 후자는 ‘사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이들에게 정치는 제도정치로 특권화되고 운동정치는 이익집단의 사적 행위 정도로 인식된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존재한다. 정치에 대한 대중의 개입은 오직 선거라는 주기적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위상과 역할을 둘러싸고 좌파 내에서 전개된 논쟁 또한 이 틀을 넘어서 나가지 못하였다. 이런 결과는 당연한 것인데, 부르주아정치(법)가 주조해 놓은 ‘공적행위로서의 정치’와 ‘사적 행위로서의 이익표출 활동’이라는 이분법의 틀을 비록 ‘제도정치와 운동정치’라는 개념으로 변형시키고 후자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킨다고 하더라도, 그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한다면 실제 부르주아정치가 목표로 하는 동일한 정치적 효과는 여전히 산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에 무게를 두든 제도정치와 운동정치가 진보정치의 유기적 전체를 이룬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는 한, 진보정치는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이분법적 발상의 현실부정합성은 사회관계의 ‘미시적인 부분’으로 확장시키는 순간,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운동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급진적 지식인, 혹은 활동가들 또한 학교 등 기존 제도의 틀에 이미 직간접적으로 ‘포섭’되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람시와 알튀세의 논의에서 제시된 바 있다. A.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of Antonio Gramsci(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71), pp. 261; 루이 알튀세, ꡔ아미엥에서의 주장ꡕ(솔, 1991), pp. 88-94 참조.

물론 그 동안 아무런 성과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진보진영은 직간접적인 논의와 실천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접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외견상 그것은 첫째, 자본주의의 모순이 해소,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 둘째,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연대로 요약할 수 있다. 가장 최근의 논의는 「토론: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과 좌파정치의 방향」, ꡔ진보평론ꡕ21(2004/가을) 참조. 하지만 이 토론조차도 제도정치의 한계, 당과 사회운동과의 관계 등을 둘러싼 기존의 상이한 인식을 확인하고 권고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 사회당, 그리고 ‘노동자의힘’ 등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이들 정치세력들 모두는 자본주의가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관계를 재생산하는 근원적 힘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또한 그것의 현재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글로벌 신자유주의,’ ‘무장한 세계화’에도 반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중의 고통은 심화되고 있는데, ‘연대의 정치’는 의미 있는 행동으로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이에 관한 좌파의 성찰은 홍석만, 「전진하지 않는 자는 발밑을 잃는다」(미디어 참세상, 2004.4.26); 김세균, 「노동자정치운동, 새로운 연대를 위하여」, 「좌파연대를 위하여 토론회 발제문」(미디어 참세상, 2004.6.18) 참조.

그렇다면 왜 이러한 지루한 양상이 반복되는가. 첫 번째 이유로 지적해야 할 것은 진보정치세력, 특히 그 리더들이 진보정치의 목적을 실천 속에서 내면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 정치세력들이 수행하는 진보정치는 그것이 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노동자계급과 대중의 해방, 나아가 인간해방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단지 그러한 영역의 구분은 부르주아정치, 법의 구분일 뿐이다. 연대의 정치 또한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노동자, 대중들의 현실을 자기 문제로 공유하고 운동의 내포와 외연을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이른바 제도정치, 운동정치 나아가 그 양자 사이의 연대의 정치는 그 어느 것도 노동자, 대중 위에 군림할 수 없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사회당 그리고 ‘노동자의힘’ 등은 이러한 인식에 동의하면서도, 실천의 수준에서는 ‘제도정치와 운동정치’를 대립시키는 이분법의 틀에 빠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동안 민주노동당은 당 외부에서 제기되는 급진적 비판에 대해 ‘근본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며 선거 시기 대중이 던질 표의 향방에 주로 경사되어 왔다. 제도 밖의 ‘노동자의힘’ 또한 자신들이 벌이는 사고와 활동 자체를 도덕적 우위를 지닌 ‘진보정치의 진수’로 인식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사회당은 제도와 비제도의 중간에서, 더욱 정확히 말하면 ‘제도의 형식으로 비제도의 정치내용’을 담으려는 ‘어정쩡한 자세’를 취해 왔다. 그 결과 스스로 좌파, 진보정치세력의 일원이라고 자임하면서도 이들은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전도사인 자유주의정치세력과 수구정치세력들의 ‘희화된 좌파논쟁’을 그저 옆에서 바라보아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좌파진보정치의 현존재와 관련하여 이 기이한(grotesque) 논쟁은 좌파진보진영의 정치적 영향력이 여전히 미약하다는 것, 아직도 이들이 부르주아정치세력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반증해 주었다. 최근 노무현정권, 혹은 그 정책에 대해 ‘좌파정권,’ ‘좌파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천박한 논쟁과 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여전히 정치가 보수(신)자유주의자들과 수구파시스트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운동정치’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노출하고 있는 ‘정치적 고립화’이다. 운동정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이라는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대중의지의 직접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 의지를 걸러내는(screening) 제도정치보다 근원적이다. 제도정치는 이미 부르주아의 헤게모니가 역사적으로 선점, 각인되어 있는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영역으로, 진보정치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그 영향력을 축소시켜나가야 할 부분이다. 따라서 운동정치는 제도 밖에서 조성되는 갈등과 모순을 제도 속에 투영시킴으로써 그 틀의 재구성을 촉진시켜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제도정치를 운동정치의 외부에 놔두는 것이야 말로 양자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부르주아정치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좌파 운동정치는 이러한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실행할 만큼의 조직적 역량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 제도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이 지니는 한계에 그 책임을 돌림으로써 빈약한 정치력을 스스로 위무하고자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계급정당’이 아닌 제도 내의 진보적 대중정당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로부터 노출하는 한계 때문에 그것을 진보정치의 외부에 두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미리 예단할 수는 없지만, 역사를 뒤돌아 볼 때, 민주노동당 또한 체제 내로 포섭되고 관료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경향을 ‘과두화의 철칙’으로 규정한 고전적 연구는 로베르트 미헬스, ꡔ정당사회학: 근대민주주의의 과두적 경향에 관한 연구ꡕ(한길사, 2002) 참조.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진보정치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운동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 사회당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계급정당’의 건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노동자의힘’ 또한 이 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제도 내의 대중정당임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이 많은 한계를 노출함에도, 그것이 좌파진보정당으로 존재하는 한, 진보정치의 중요한 축이라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좌파운동정치의 핵심은 제도 외부의 긴장과 모순, 갈등을 민주노동당 내부에 어떻게 투영시키고 그것을 통해 민주노동당의 내용적 변화, 나아가 제도정치 전체를 진보적인 방향으로 추동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에 있다. 민주노동당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지 않고 내부 정치세력들의 다양한 발상과 행태, 특히 ‘사회운동적 정당’으로의 지향이라는 발상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제도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을 외재적인 것으로 놓아두지 않으려면, 그리하여 그것을 노동자, 대중의 삶에 기여하도록 만들려면, 무엇보다 ‘제도정치와 운동정치’를 경계지우고 그것을 넘어설 수 없는 본질적 대립구도로 강제하고자 하는 부르주아정치(법)의 굴레와 단절해야 한다. 그리고 다차원의 연대를 통해 대중이 민주노동당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을 강화시키고 그 위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좌파계급운동’의 블록화 또한 이러한 과정과 분리되거나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이해는 박성인, 「사회주의 정치진영(계급적 좌파)의 혁신과 연대를 위해」, ꡔ진보평론ꡕ21(2004/가을) 참조.

세 번째 이유는 민주노동당에 있다.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를 극복하여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고 자신들의 강령에서 선언하고 있다. 미래의 목표인 강령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민주노동당 뿐만 아니라 모든 진보정당이 직면했던 딜레마이다. 진보정당은 미래를 꿈꾸는 정당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진보정치에서는 지나간 과거도, 다가올 미래도 단지 현실일 뿐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축적인 현실 속에서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미래와의 간격’을 현실 속에서 어떻게 좁혀나갈 것인가가 진보운동의 중요한 과제이다. 독일 사민당은 그 괴리를 1959년 고데스베르크강령을 통해 해소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실현가능한 정책’의 제시라는 구호가 전면에 부각되었으며 결국 당의 목표인 집권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스스로 그렇게 대표하고자 했던 기층 노동자와 대중들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과정이었다. 현재 독일 사민당은 ‘자본질서극복 계급정당’에서 ‘자본질서유지 국민정당’으로 전환하였다고 평가된다. 정병기, 앞의 글, pp. 63-64 참조.

지금 민주노동당도 강령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그리고 상이한 발상과 행태를 보이는 당 내 정치세력들 사이의 긴장 속에서 자유스럽지 못하다. 17대 선거를 통해 10명의 의원을 배출한 민주노동당은 집권의 청사진을 제출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왜 집권하고자 하는가이다. 그리고 그 동력을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이다. 민주노동당은 지금 10명의 의원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의원수가 힘의 상징인 제도정치에서 몇 명 되지 않는 의원수는 상징적인 정치적 효과 이상일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이것은 지금처럼 당과 원내로 이원화된 활동구조의 적절한 운영을 통해, 더 세련되고 국민에게 어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정책 등의 개발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민주노동당의 집권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과거 자유주의정치세력들이 원내 소수파의 한계를, 대중을 겨냥한 직접적인 ‘장외투쟁’을 통해 극복한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소, 극복할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특정한 정치적 국면에서 구사한 ‘선택적 장외투쟁’이 아니라, 따라서 그 성과를 대중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집권으로 삼는 그런 투쟁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고 바로 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 속에서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정치를 구사해야 한다. 선거공학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의 본령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진정 진보정당임을 보이고자 한다면, 수권정당을 넘어 대안정당으로 역할을 하고 싶다면, 부르주아정치가 ‘이익정치’로 왜소화시켜 놓은, 다양한 사회관계들의 긴장과 모순에 근거한 ‘운동정치’를 복권시키는 것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의원 10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며 더 많은 의원을 획득하기 위한 가장 올바른 접근법이다. 거기에 부르주아정치가 ‘제도와 비제도’를 나누기 위해 그어 놓은 완고한 경계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정치의 한계를 넘어서는 유일한 길이다.
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지금 민주노동당의 행보는 불투명하다. 실제 이들에게 운동의 정치는 매우 협소하게 해석되고 있는 듯하다. 민주노동당의 진보정치세력과의 포괄적 연대는 정책 마련을 위한 영역으로 협소해지고 있으며 그 결과 연대의 파트너는 민주노총과 ‘진보적 시민운동’으로 좁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서 급진진보정치세력, 진보적인 민중운동들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좌파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딜레마이다.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 지금 민주노동당 내부의 상이한 주체들이 냉정히 뒤돌아보아야 할 문제이다.


4. 나아가는 글: 다시 국가, 민주주의 문제로

이제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국가,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 논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간단히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문제들은 진보정치의 가장 핵심적 사안들임에도 그 동안 뜨거운 감자로 취급되어 왔으며 그 결과 80년대 이후 진보운동의 논의와 실천을 매개로 복원된 ‘국가론,’ 민주주의론은 지금 그 수준이 어떻든 논쟁의 목록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간과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과 달리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심화는 이 문제를 더욱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글로벌 신자유주의는 기존 국민국가의 계급성을 지구적 수준에서 질적으로 균질화시키고, 공간적으로 확장시키면서 민주주의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적대적 공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규정된 기존 국민국가의 무게중심이 기존의 자국내 자본을 보호하는 것으로부터 유동하는 자본을 자국의 영토 내에 고정시키는 것으로 이동함으로써 더욱 촉진되고 있다. 존 할러웨이, 「지구적 자본과 국민국가」, ꡔ신자유주의와 화폐의 정치ꡕ(갈무리, 1999), p. 189.
그 과정은 그 동안 노동자계급과 대중의 투쟁을 통해 유지되었던 삶의 조건들, 제도적인 틀조차도 무화시키고 정치적으로 노동자, 대중을 개별화시키며 최소한의 의사결정구조에서조차 배제시키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서구 복지국가의 해체는 이러한 상황의 극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국가, 민주주의 문제는 좌파진보정치의 대중적 헤게모니의 확보를 위해 더 이상 우회할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익숙한 질문에 다시 대답하고 고민해야 한다.
첫째, 국가는 노동자, 대중이 맺고 있는 다양한 사회관계의 외부에 있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국가는 그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총자본으로서의 부르주아국가’라는 점을 최종적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분명 국가는 노자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다양한 사회관계들의 응집된 표현이다. 물론 거기에는 역사특수적인 것으로서의 부르주아의 이해가 선점, 각인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국가가 이 관계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를 사회관계에 ‘외재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것은 부르주아정치학, 그 법이 오랜 동안 노동자계급, 대중에게 강제한 발상이었다. 그것을 대표하는 발상들이 바로 다양한 종류의 ‘계약국가론,’ 다원주의국가론임은 주지하는 대로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발상을 넘어 나가야 한다. 따라서 제도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부르주아의 이해를 강화하는 측면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물론 이것이 제도정치를 특권화시키는 이유로 기능해서는 안된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부르주아사회체제가 그람시적 의미의 ‘확장된 국가(extended state)’ 혹은 ‘통합국가(integral state)’를 매개로 재생산된다면, 그것에 대항한 진보정치 역시 통합정치(integral politics)를 통해 그것을 돌파할 수밖에 없다. A. Gramsci, Ibid., pp. 262-263 참조.
부르주아정치는 역사적으로 형태분리된 근대 국가와 시민사회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자본주의체제가 실제로 재생산됨에도 그러한 형태분리를 내용적인 수준으로까지 절대화시킨다는 점에서 항상 모순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유주의적 발상은 정치사회와 경제활동이 포함되는 시민사회를 구분하고 국가가 거기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른바 자유방임조차도 법률적, 강압적 수단들에 의해 유도되고 유지되는 국가조절의 형태라는 점은 이러한 발상의 이데올로기성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국가와 시민사회는 실제 ‘하나’(one)이며 동일한 것(the same)이라는 주장의 의미를 음미해야 한다. A. Gramsci, Ibid., pp. 160-161 참조.
진보정치는 바로 이 모순적 상황을 지양해야 하는데,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통합만이 그것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맥락에서 무게중심의 이동은 있을 수 있으나 사회변화를 위한 ‘기동전’과 ‘진지전’ 또한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에 있다.
사민주의를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국가를 자본주의사회관계, 거기에 내재되어 작동하는 노동자계급투쟁, 대중투쟁과 분리된 사물(the thing)로 규정하면서 ‘국가의 역사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민주의는 결국 당을 기술관료 중심의 조직으로 만들고, 기층민주주의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추동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사회이행을 위한 국가,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은 사라져버린다. 플란차스는 사민주의의 국가주의가 기층민주주의 및 민중주도권에 대해 근본적으로 불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탈린주의와 깊은 공범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니코스 플란차스, 앞의 책, p. 331.

둘째, 그렇다면 사회이행과 관련하여 민주주의는 어떤 성격과 위상을 지니는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의 실현을 위한 자발적, 목적의식적 수단을 강구하는 모든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언제나 피지배계급 운동 그 자체와 같이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규정에 대해 인민주의적 민주주의의 계보의 선상에 있는 쁘띠부르주아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즉, 계급사회에서 현존할 수 없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관념적이라는 비판이 그것이다. 채만수, 「(소)부르주아민주주의와 노동자계급운동의 독자성」 참조.

그것이 관념적이라면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을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부르주아민주주의), 아니면 다수에 의한 소수의 지배(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라는 틀로 인식할 것인가. 하지만 문제는 부르주아민주주의이든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이든 그 모든 것은 노동자계급투쟁, 대중투쟁의 성과라는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배체제가 확립된 이후에 그들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 어떤 민주주의이건 그것은 대중투쟁의 결과이며, 따라서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대중투쟁의 외부에 내버려둘 수 없다. 따라서 운동의 결과인 선거조차도 그것이 오랜 대중 투쟁의 성과물이라는 점에서 지배계급들의 것인 양 내버려둘 수 없다. 제도로서의 선거를 부정하는 것은 그것을 민주주의와 동일시하고 거기에 민주주의를 위한 다양한 대중투쟁을 종속시키며 그것을 사회모순을 감추는 기제로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이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규정, 그것을 위한 운동은 기존 자본주의체제에서의 민주주의의 확장은 물론,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 그리고 역사적인 ‘프롤레타리아독재’에서 보이듯 그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노동자, 대중으로부터의 ‘권력의 자립화’를 예방할 논리적, 실천적 기제로 된다. 그것은 대중의 참여를 지속적으로 자극할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모아진 힘은 진보정치세력이 취할 행위의 지적, 도덕적 우위를 보증해 주는 기본동력이다. 따라서 제도 안팎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관철될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은 비록 시공간적으로 불균등하게, 때로는 중첩되면서 긴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겠지만, 억제될 수 없는 진보정치의 토대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것은 노동자계급과 대중의 해방, 인간해방의 목표를 위한 핵심논리이자 실천의 수단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와 그 운동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과 그것의 실현을 위한 끊임없는 운동이라고 규정할 때, 여전히 고민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칠레 인민연합의 좌절이 반증하듯이 과연 기존의 국가가, 부르주아계급이 이행의 과정에 합의하고, 평화롭게 놓아둘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미리 제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이라는 민주주의 개념이 사회이행의 와중에 나타날 수 있는, 선험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길고 지루한 긴장의 시간 혹은 파국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와 부르주아지는 결코 병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가올 수도 있는 그 파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할 수는 없으나,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을 위한 대중의 자발적, 목적의식적 수단들이 진보정치 내부에서 더욱 일관되게 모색될 필요가 있다. 이런 차원에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사회관계들 그 자체이며 고립된 하나의 제도, 하나의 모델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현 시기에 실천적 수준에서 국가와 민주주의를 고민할 때, 민주노동당 안에서 제기되고 있는 ‘민주적 사회주의’ 이행전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현실적 이유는 제도 밖의 운동정치와 민주노동당 내부에 사민주의노선과 민족해방계열 노선이 주요한 행위주체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국적 틀에 갇힌 완고한 국가주의자들이라는 현재적 공통성을 가지고 있으며 기존의 자본주의체제를 넘어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래의 보수주의자들’이기도 하다. 이들과 어떻게 이론적, 실천적으로 대결할 것인가. 좌파진보정치세력들이 현 시기에 고민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다. 물론 이들과의 대결은 신자유주의가 좌파진보정치운동에 강제하는 지구적 수준의 조건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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