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승자의 저주 - 인간의 비합리성을 밝혀낸 행동경제학, 그 시작과 완성
리처드 탈러.알렉스 이마스 지음, 임경은 옮김, 최정규 감수 / 리더스북 / 2026년 3월
평점 :
리처드 탈러 알렉스 이마스 《승자의 저주》
늦은 밤, 거실에 있던 남편이 말없이 집을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양손엔 빵빵한 편의점 봉투가 들려 있었다. 오늘까지 쓸 수 있는 5,000원 할인 쿠폰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다녀왔다는 것이다. 남편은 그 쿠폰을 쓰기 위해 굳이 사지 않아도 될 간식을 16,000원어치나 사 왔다. 5,000원을 아끼려다 생돈 16,000원을 더 쓴 셈이다.
웃음이 터지는 이 상황은 이 책이 말하는 행동경제학의 실사판이었다. 남편은 5,000원을 '절약'했다며 뿌듯했을지 모르지만, 이 책을 읽고 있던 내 입장에서는 명백하게 '승자의 저주'에 빠진 상황으로 보였다.
우리는 돈을 계산할 때 숫자만 보지 않는다.
손실회피 경향은 쿠폰을 버리는 것을 손해로 느끼게 해 충동구매를 일으킨다. 매몰비용 효과는 이미 받은 쿠폰을 활용해야 한다는 불필요한 욕구를 자극한다. 여기에 할인이라는 별도의 지갑을 머릿속에 만들어 계산하는 '심리적 회계'까지 더해지면, 돈을 더 쓰고도 합리적으로 절약했다고 믿는 역설이 완성된다.
리처드 탈러와 알렉스 이마스의 《승자의 저주》는 이런 순간들을 행동경제학의 관점으로 풀어낸다. 전통 경제학이 인간을 언제나 합리적인 존재로 가정했다면, 행동경제학은 그 합리성이 얼마나 자주 감정과 착각에 의해 흔들리는지 증명한다.
이 책은 <넛지>의 저자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탈러가 연재했던 논문 「이상 현상(anomalies)」을 바탕으로 한 개정판이다. 33년 만에 돌아온 만큼 70%를 새로 쓰며 방대한 최신 연구를 더했다.
'이상 현상'은 기존 경제학이 전제로 삼는 합리적 인간 모델과 맞지 않는 실제 인간의 돌발 행동을 의미한다. 편향된 인간이 만든 시장은 주식 거품이나 과도한 경매 가격, 과소비 같은 비합리적 선택을 반복된다. 돈 문제는 합리적인 계산보다 “심리” 문제이기에, 사람은 돈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다양한 인지 오류의 함정에 빠진다.
똑똑한 사람이라도 별 수 없다. 인지 편향은 지능과 별개이기에 경제학자나 노련한 투자자조차도 동일한 오류를 반복한다.
이겼는데 왜 눈물이 날까: 승자의 저주
책의 제목이기도 한 ‘승자의 저주’가 흥미로웠다. 경매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써내 물건을 차지했지만, 막상 낙찰을 받고 나면 “너무 비싸게 샀나?” 하고 후회하는 현상이다. 기업 인수합병이나 부동산 경매처럼 가치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상황일수록 이 저주는 강력해진다.
경쟁자들보다 높은 가격을 써냈다는 건, 남보다 똑똑하다는 증거라기보다 경매 대상의 가치를 남보다 더 크게 착각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신호일 수 있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경제적으로는 가장 큰 손해를 입는 역설은 과신과 경쟁심이 결합할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스스로를 속이는지 날카롭게 보여준다.
나라는 존재가 투영된 물건의 무게
재미있는 실험이 하나 있다. 5,000원 주고 산 컵을 팔 때는 10,000원을 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이를 보유 효과라고 한다. 물건이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 나의 소유라는 딱지가 붙으며 심리적 가치가 뻥튀기되는 것이다.
여기에 얻는 기쁨보다 잃는 고통을 훨씬 크게 느끼는 ‘손실 회피’ 심리까지 더해지면 판단은 더욱 꼬인다. 떨어지는 주식을 팔지 못하고 붙들고 있거나, 입지 않는 옷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것도 사실은 내 일부가 된 무엇을 놓지 못하는 감정 때문이다.
스토아주의와 행동경제학이 만나는 지점
비합리적인 행태들을 읽으며 고대 스토아 철학이 떠올랐다. 인간의 고통이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왜곡된 해석과 판단에서 비롯된다고 본 스토아적 통찰은 현대
행동경제학의 인지 편향 이론과 궤를 같이한다. 문제는 현실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구조에 있다.
고대의 지혜와 현대의 이론은 우리에게 같은 결론을 남긴다.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존재이기에 자신의 판단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늘 깨어 경계해야 한다 판단을 고치기 어렵다면 환경을 설계하고, 그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그것이 승자의 저주가 가득한 세상에서 평온을 지키며 합리적으로 승리하는 길이다.
시장은 차가운 숫자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숫자를 만드는 것은 욕망과 불안에 흔들리는 뜨거운 마음들이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존재의 인지 구조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도서지원 #승자의저주 #리처드탈러 #행동경제학 #인지편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