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게
정영욱 지음 / 부크럼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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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욱의 《구원에게》는 에세이지만 읽다 보면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몰래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사건을 나열하기보다 대화체 구성을 채택해 감정을 요약하지도, 해설하지도 않고, 거의 그대로 펼쳐 놓는다.


""오빠는 언제 가장 행복했어?"
안락한 카페 소파에서 마치 고문당하는 죄수처럼
목을 획 젖히며 수가 물었다.
"음... 세상의 언어로 행복이라 하면 벅참에 가까운 거니까,
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뭐가 그렇게 복잡해. 그냥 행복할 때가 언제였냐고."
.... (중략)
"감정이 뭔지 배우는 인공 지능 같아. 귀여워."
"그게 너의 언어로는 사랑한다는 말이지?"
- 78, 79면


1인칭 시점의 고백과 관계 속 상처, 성찰이 이어진다. 짧고 직관적인 문장은 감정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고 장면으로 보여주어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가 있었다. 스타일리시한 정영욱의 문체는 스테디셀러 에세이스트답게 유려하고 감각적이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언제라도
나는 발가벗은 채 누워 있는 완전한 타인의 옆에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를 사랑하진 않아.
단지 헤어질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숨을 나누는 거야."
- 174면


이 책은 저자의 감정을 공유하는 일에 집중한다. 독자를 안전한 거리의 관찰자로 두지 않고 바로 옆자리에 앉힌다. 감정을 예쁘게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펼쳐 보이기 때문에 목격자가 된 기분이었다.


특히 눈에 띄었던 책의 특징이 또 있다. 변화의 도전이었다.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다>, <잔잔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참 애썼다 그것으로 되었다> 등의 전작에서 보인 글과 이번 글은 사뭇 달랐다.


위로와 힐링을 키워드로 대중적인 감성을 선사해온 작가가 이 책으로 더 내밀하고 깊은 사적 세계를 과감하게 공개했다. 팔릴 글을 쓰는 단계에서 호불호를 감수하며 쓰고 싶은 글을 쓰는 단계로 방향 전환을 한 시도가 새롭고 흥미로웠다. 이미 팬을 확보한 작가만이 낼 수 있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부족한 삶 속에서, 어느샌가
책을 팔아 성공해야 한다는 집착이 생겼다.
그래서 작가와 출판업을 겸하며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기 좋은 위로의 글을 썼다.
......
그러나 그것이 긍정적인 영향만을 남기진 않았다.
그렇게 나에게 글쓰기는 조리나 숙성의 과정 없이
곧장 뜯어 시장에 내다 팔며 연명하는 일로
전락해 버렸다."
- 120면


《구원에게》는 사랑의 기록인 동시에 한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더 치밀하게 파고든 결과물 같았다. 우리는 왜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를 읽는가. 공감이나 호기심 때문일 수도, 혹은 잊고 있던 자신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질문을 던지지는 않지만 읽는 동안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랑 이야기에 예전처럼 설렐 나이는 지났어도, 복잡다단한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집요한 문장은 사랑하며 좌충우돌하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게 했다.


"나는 나를 보기 위해 타인 앞에 선다.
나 아닌 이를 마주하는 일은 언젠가의 나를
다시 발견하는 행위이자, 나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의 언행과 눈빛은 언젠가의 나였고,
또 언젠가의 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 140면


누군가에게는 낯선 고백일 수 있지만, 사랑의 민낯을 마주해본 이들에게는 이보다 선명한 위로가 없을 것이다. 저자의 변화가 반가운 만큼, 정영욱이라는 작가의 다음 행보가 더욱 궁금해진다.


#도서지원 #정영욱 #구원에게 #망한사랑 #이별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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