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날들
조 앤 비어드 지음, 장현희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축제의 날들》은 2024년 영국 왕립문학학회의 국제 작가로 선정된 미국의 시인, 소설가, 에세이스트인 조 앤 비어드의 "에세이 + 소설"이다. 한 권에 소설과 에세이를 동시에 실어 새로운 읽기 경험을 선사한다.


총 9개의 작품 중 소설로 발표한 건 두 작품이지만 무엇이 소설이고 에세이인지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에서 사실의 진정성과 허구의 몰입감을 아름답게 조율한 글은...... 그렇다. 분명 자기답고 아름답게 실재하고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소설적인 흐름과 긴장감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인지 구분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뭣이 중헌디. 이야기 안에 담긴 감정은 모두 진짜였으니, 독자는 그 속에 풍덩 빠져들기만 하면 된다.


"넋이 나간 듯, 그녀는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의 젊은 얼굴을 올려다보며 보낸다.
셰리?
여전히 어머니를 바라보며, 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는다.
주삿바늘은 차갑고, 순식간에 그녀는 감각을 잃는다.
두꺼운 얼음층이 그녀와 남자들을 분리한다.
셰리는 비좁은 공기주머니 속에서 천천히 호흡하고,
머리 위로 화려한 스케이트를 신은 아이들이 모여든다.
그녀는 얼음 밑에 볼을 댄 채 잠시 거기 머문다.
그러다 곧 누군가의 손이 내려와 그녀를 아래로 밀어 넣는다."
- 116면


암으로 고통스러웠던 생을 마감하기 위해 안락사를 택한 셰리의 마지막 장면이다. 실제 지인의 죽음을 다룬 이 장면에서 장르를 융합하는 실험의 정점을 본 것 같았다. 얼음 아래 잠긴 이미지로 죽음을 은유한 문장을 읽으며 인물과 함께 그 순간을 체험한 듯했다. 나는 감히 누군가의 죽음을 상상해 글로 옮기는 일을 시도하지 못할 것 같다. 뛰어난 작가의 용기와 감각 덕분에 두 세계가 접히는 경계를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



"이 정도로 구체적인 문장을 쓰면서
버릴 문장이 없을 수 있다니"
김겨울 작가의 이 한 마디가 정말로 이해되는 글이었다.


국어시간에 배웠다. 중심문장과 뒷받침 문장을.
하지만 《축제의 날들》은 문장 하나하나가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모두가 주인공처럼 빛난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줌으로써 느끼게 한다. 감정을 묘사하지 않고 암시한다. 그 여백이 특유의 문체를 만들고 독자의 내면을 강하게 건드린다.


자신이 보고 느낀 세상을 고해상도 렌즈로 걸러낸 후 예술로 창조하고, 감정선까지 정밀하게 설계한 것 같았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내가 작가의 눈이 되고 귀가 된다.




"몹쓸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죽어가는 동물처럼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이 마치 축사와도 같다. 더러움, 냄새, 그리고 소의 몸 안에 갇혀 침대에서 화장실까지 비틀거리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느낌까지. 몸이 특히 더 나쁜 오후, 셰리는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자기 목소리를 듣는다. 겁에 질린 소 울음소리 같은 것이 깊고 길게 울린다."
- 67면



아이비리그 중 한 곳인 세라 로런스 칼리지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해서 저자의 글에 대한 사유도 인상 깊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 작품의 표면 아래 숨어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이다.
.......

좋은 에세이는, 좋은 단편, 좋은 회고록,
좋은 소설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이디어에 달려 있다. 그래서 좋은 작품은
명목상 주제를 넘어
보편적인 무언가를 조명하면서
스스로 고양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은 교훈을 준다.
작가는 독자보다 더 현명하고
더 많은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논픽션 워크숍에서 내 노력의 절반은
아이디어와 문제를 끌어내는 데 쓰인다."
- 182면


글을 쓰는 이유는 제각각이겠지만, 독자가 누군가의 글을 읽는 이유는 무언가를 얻기 위함이다. 내면을 성장케하는 글의 실용성을 지향하는 나 역시 "무언가를 조명하면서 스스로 고양한다"라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이디어와 문제를 끌어내는 데 노력의 절반을 들인다는 저자의 태도가 스승께 전해 받은 가르침처럼 내 안에 오래 남았다.



"사랑하는 반려견의 죽음,
불타는 건물 안에 갇힌 남자,
암 투병 끝에 안락사를 선택하는 여자,
죽어가는 친구와 배신한 남편을 떠올리는 이야기까지."



고통과 죽음의 언저리를 기록한 이 책의 제목은 왜 "축제의 날들"일까? 축제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고 놀랐다. "축하와 제사를 통틀어 이르는 말"

탄생과 죽음, 희극과 비극, 양극단의 감정이 한 단어에 고여 있었다. 삶에서 지워지지 않는 밀도 높은 날들을 축제로 정의한 적확함에 감탄했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일상을 흩트린 의도치 않은 기념일은 삶의 클라이맥스이자 의미 있는 축제일 수 있다. 그런 날들을 축제로 재해석한 저자 덕분에 나는 오늘 조금 더 커진 것 같다.


축제란 누군가에게는 떠들썩한 환희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조용한 작별일지도 모른다. 삶은 이것과 저것의 사이, 웃음과 울음의 경계에서 오히려 더 뚜렷해지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의 축제는 어떤 얼굴이었을까. 《축제의 날들》은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게 한다. 나도 언젠가 내 인생이 지나왔을 축제의 날을 기록할 수 있기를.


#도서지원 #축제의날들 #조앤비어드 #클레이하우스 #김겨울추천 #에세이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