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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지키는 여자
샐리 페이지 지음, 노진선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3월
평점 :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는 한 해 동안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국민 소설'이다. 2022년 전자책으로 출간된 다음 해, 영국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를 14주 이상을 지켰다. 영국에서만 50만 부 판매. 2023년 닐슨 북데이터 베스트셀러상 금상 수상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25만 부로 은상)
혜성처럼 눈부시게 등장한 소설이 2025년 우리나라에도 찾아왔다.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는 샐리 페이지의 데뷔작이다.
광고업계에서 일하다 꽃집을 운영하고, 만년필 애호가에서 시작해 만년필 브랜드 플룸스를 설립해 펜을 직접 만들었던 이력들이 흥미롭다. 1년 동안 일상에서 수집한 실화를 바탕으로 3개월만에 초고를 완성했다는 뒷이야기도 재미있다.
케임브리지에서 소문난 청소 도우미 재니스가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다. 이야기를 지킨다? 그녀는 이야기 수집가다. 수많은 집을 청소하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머릿속 도서관에 모아두고 간직한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웃들의 삶 속에는 놀라운 기쁨과 슬픔, 사랑과 후회가 숨겨져 있다. 재니스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훌륭한 재능과 선함, 용기가 숨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소심한 자신에게도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남편이 이야기가 아닌 잔소리를 퍼부어 댈 때면 재니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생각하며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차례로 음미한다."
-11면
바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재니스는 절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전직 스파이였던 까다롭고 영리한 92세 B 부인의 집을 청소하게 된다. 그녀는 재니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재니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하지만 재니스에게는 꺼낼 수 없는 깊은 상처가 있다. 어린 시절, 엄마와 엄마의 남자친구였던 레이와 얽힌 기억들로 끊임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는 없어요, B 부인"
"하지만 이건 자네 이야기야, 재니스.
자네는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해."
"그런가요? 말하면 뭐가 달라질까요?
제가 결말을 바꿀 수도 없는데."
"바로 그 대목에서 자네가 틀렸다는 거야.
키케로의 명언 중에 이런 말이 있어.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때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약간의 희망뿐이야."
- 348면
결국 재니스는 사랑하는 책들이 꽂힌 서가를 둘러보면서 희망을 찾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야기 수집가이자 이야기꾼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이야기도 할 수 있지 않을까?'
- 349면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의 이야기처럼 B 부인에게 털어놓는다. 이야기 속의 재니스를, 이야기 너머 재니스의 마음에 주목하는 B 부인의 태도에 뭉클했다. 재니스의 편이 되어 대변하고 항변하며 그녀의 아픔을 함께하는 어른의 존재는 감동이었다.
"B 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도 변화가 일어났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또한 모든 것이 변했다. 좋은 쪽으로."
-371면
재니스처럼 나도 나의 이야기를 잘 꺼내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들려줄 만한 의미가 없는 것 같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그런 시간이 쌓이다보니 기억으로 남은 이야기가 점점 사라져버린 것이 두 번째 이유다. B 부인을 만나며 세 번째 이유를 알았다. 이렇게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 사람을 만난 경험이 적다는 것, 그런 사람이 다가와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애초부터 거리를 둔 것. 서로의 이야기가 진심을 통해 오가며 소통한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은 살면서 좋았던 일을 공유할 뿐 아니라 화자의 나쁜 기억을 내보내는 기능, 바람에 먼지가 흩날리듯 나쁜 기억을 흩어지게 하는 기능도 있는 걸까?"
-391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을 때 삶이 정리되고 온전한 나로 살아갈 수 있었다. 억눌린 감정을 표현함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해소되어 자유로워진다. 표현된 이야기를 통해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더 깊은 자기이해를 이룬다.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타인과의 공감대를 형성해 지지를 얻고 좁은 세계가 확장한다.
결국 삶은 이야기와 이야기들이 연결되고 얽혀 더 큰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하는 과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뇌의 신경망처럼 관계와 경험의 발화가 새로운 뉴런을 만들고 수없이 연결되어 뇌가 끊임없이 변화하듯, 이야기는 반복되는 매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생명의 에너지로 작용해온 게 아닐까.
인생을 움직이는 동력의 하나가 이야기이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이 인생이라는 순환의 화살표가 그려졌다. 화살표의 방향을 파악하고 주체적으로 설정하는 과정이 성장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
이야기를 매개로 삶을 향한 존중과 사랑을 주고받던 재니스와 사람들의 따뜻함 덕분에 힘이 난다. 공감과 경청을 통로로 진심이 오가던 장면들의 감동과 이야기의 가치를 강조하는 메시지까지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가 높은 인기를 얻은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누구나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차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귀하다 말해주는 소설의 목소리가 고마웠다.
정보는 생선 같아서 그대로 두면 썩지만, 이야기는 씨앗이라 그리스 신화처럼 몇 천 년이 지나도 살아있다는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정보는 사라지지만 이야기는 살아간다. 매일의 삶이 이야기로 살아나는 당신의 오늘이 되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할 건가요?"
제니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요. 멈추고 싶지도 않고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 425면
"그리고 자넨 절대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되고.
왜냐하면 '희망'은 모든 걸 바꾸니까."
-4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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