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같은 언어 - 같은 밤을 보낸 사람들에게
고은지 지음, 정혜윤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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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저마다 너무도 독특한 의미 덩어리라서 절대 서로 이해할 리 만무하다지만, 우리는 마법처럼 서로에게 말하고 가닿는다."
-243면


소설인 줄 알았다.
사전 정보 없이, 무작정 펼쳐든 문장들은 영락없는 소설 재질이었다.


한국에 살며 한글을 쓰는 작가님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마법 같은 언어》 표지에 역자가 있다.
게다가 이 책이 미국의 문학상을 휩쓸었단다.
그렇다. 저자 고은지는 한국계 미국인 2세였다.


시인이자 소설가, 번역가인 고은지 작가는 수상경력이 화려하다.
시집 <시시한 사랑>으로 플레이아데스 프레스 편집자상 시 부문 수상.
《마법 같은 언어》로 워싱턴주 도서상, 퍼시픽 노스웨스트 도서상, AAAS 도서상 수상. 펜 오픈 도서상 최종후보.
이원 시인의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를 영어로 번역해 한국문학번역원 번역대상 수상.
첫 소설 <해방자들> 뉴욕 공공 도서관 젊은사자상 소설 부문 수상.


《마법 같은 언어》는 에세이다.
저자 고은지는 이민 2세로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이 된 해에 오빠와 저자만 남겨두고 부모님은 한국으로 떠난다. 아버지가 좋은 조건으로 3년 계약의 일자리를 제안받았기 때문이다.


"만약 두 분이 서울로 간다면 그들은 현명한 부모가 될 뿐 아니라 돈도 잘 벌고 누구보다 위풍당당한 삶을 누리게 될 터였다. 아빠는 대기업 임원이 될 것이며 엄마는 17년 전에 떠나온 형제자매와 재회할 것이다. 고급 차 두 대, 고층 아파트, 넉넉히 지급되는 회사 소유 백화점 상품권, 자신들과 비슷한 위치의 새 친구도 얻게 될 것이다. 아이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겠지만 그 기간은 딱 3년에 불과하다. 아이들에겐 곁에 있어주는 것보다 든든한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게 더 나을 것이다."
- 22면


부모님은 함께 떠나기를 원했지만 남기로 한 건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부모님이 떠난 다음 날 아침, 엄마를 찾아 방방을 돌아다니며 엄마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꼭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새 학교에는 이따금씩 오빠 모르게 결석을 했다. 아마 일주일 넘게 빠졌을 것이다. 근처 공원으로 걸어가 벤치에서 텅 빈 정자만 여섯 시간씩 바라보다가 학교 앞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날 데리러 온 오빠 차를 타고 말없이 귀가했다. 집에선 열두 시간이 넘도록 잠만 내리 잤고, 아침이면 해가 물 속에서 깨진 달걀의 노른자처럼 무기력하게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27면


아빠의 계약기간이 계속 연장되면서 부모님과 9년 동안 떨어져 사는 동안, 저자는 음식을 억지로 토하고 굶는 섭식 장애와 자살 충동을 겪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가 보낸 편지로 위안을 얻지만 한글을 몰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내가 알기로 나는 먹은 음식을 토하는 세상 유일한 사람이었다. 신발 속 발가락에서 뼈가 느껴지고, 끝이 갈라져 나풀대는 손톱을 보고, 변기 옆에 주저앉아 목구멍에서 떨어져 나온 살점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오직 나뿐이었다. 엄마랑 있는 동안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 57면


성인이 되어 번역학과 영문학을 공부한다. 우연한 기회에 엄마의 편지를 번역하며 저자는 깊은 밤을 보냈던 어린 시절을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
"문이 닫히면 어린 시절에도 경험한 적 없을 만치 많은 야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아무 이유 없이, 그리고 오래전의 수많은 밤들을 생각하며 밤새도록 마음껏 울었다."
-234면


번역한 엄마의 편지를 들은 노인이 묻는다.
"왜 당신을 데리고 가지 않았나요?"
"제가 여기 남겠다고 해서....."
"그 나이엔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어요." 노인이 말했다.
.......
"그분들은 당신을 버렸어요."
노인은 들고 있던 캔을 뒤로 기울였다.
자기라면 그런 선택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으리란 뜻이었다.
- 236면


《마법 같은 언어》를 읽는 내내 나도 의아했다. 어떻게 태평양 너머에 15살 딸을 두고 떠나올 수 있는지 말이다. 그 시간들이 저자를 키웠고 결국은 훌륭한 시인이자 작가로 성장했지만, 청소년기의 상실과 부모의 부재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다.


시와 소설 사이에 놓인 글 같았다.
시를 읽듯 에세이를 읽었다. 저자의 아픔과 감정이 희뿌연 안개처럼 떠다녀 선명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하거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은유와 상징으로 은은하게 표현한다. 가려진 이야기들도 많다. 하나로 연결되지 않고 편린처럼 흩어져 있다. 끊어진 필름 영화처럼 각각의 장면이 함축적으로 드러나면 그 속에서 전후의 맥락을 추론해야 했다. 이야기 사이에 텅 빈 시간들을 상상해야 했다.


소설처럼 가족들의 캐릭터가 분명하고, 오가는 말들은 대사처럼 특별했다. 미시적인 시선이 포착한 대목들은 소설의 문장처럼 아름다웠다.

"너는 탐색자가 될 거야. 어디든 가는 곳마다 두리번거릴 테지. 네 허기가 네가 잃어버린 것이 뭔지를 가르쳐줄 거야." (123면)
"학생은 즐거울 순 없어도 분별력을 가질 순 있어요." (175면)
"맞아요. 도량이 넓어야 해요. 도량만 넓으면 어떤 이야기든 다 해도 돼요. 우리는 시인이잖아요." "용서엔 분별력이 필요하지 않아요. 용서는 논리를 따르지 않으니, 분별력이 있어야 한단 생각에서 우릴 해방해 주죠."(196면)
"네가 내 딸이라는 이유로 날 용서할 필요는 없어. 너는 날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 알았지? 어차피 나는 널 위해 뭐든지 다 하려고 태어난 사람이니까." (260면)


엄마가 보낸 편지가 그대로 실려 있어 편지와 에세이가 교차하는 독특함 덕분에 엄마와 딸이 함께 쓴 회고록처럼 보였다. 머나먼 거리와 시간의 간극을 두고 닿을 듯 말 듯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전체적으로 건조하고 차분한 색감이다. 그래서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전시하지 않고 숨기고 절제한 듯한 기억과 감정의 틈에서 울림과 여운이 올라왔다.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그림자가 오랫동안 검은 베일처럼 드리워져 있었지만, 언어의 세계를 통해 남은 원망과 갈등을 마저 놓아버린 듯한 후반부가 특히 좋았다. 마법 같은 언어가 읽을 줄 모르던 엄마의 편지와 읽기 어려운 시의 글자 위에서 마음과 관계를 끊임없이 연결하던 끈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본디 빛나고 있던 저자의 삶이 베일을 거두고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언어의 의미와 문화적 정체성, 기억과 회상을 주제로 아름다운 문장과 인정받은 작품성으로 완성된 특별한 에세이, 《마법 같은 언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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