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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보이네 - 김창완 첫 산문집 30주년 개정증보판
김창완 지음 / 다산북스 / 2025년 3월
평점 :
가수, 배우, 라디오 DJ, 소설가, 동시 시인, 화가...
대한민국의 멀티 엔터테이너 김창완.
1995년 김창완의 첫 산문집 <집에 가는 길>이 2005년 <이제야 보이네>로 개정해 선보인 후, 30년 만인 2025년 《이제야 보이네》 가 개정증보판으로 새 글 8편과 작품 20점을 더해 찾아왔다.
기타에 매달리듯 안겨 눈을 꼭 감고 있는 표지에 눈길이 머문다.
"삶은 여전히 이제야 보이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눈을 뜨고도 못 봤을 수 있고,
눈을 감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삶이 들려주는 대답은 그 의미가
단 한 번으로 완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때로 지금까지 해온 일들에 사로잡히기보다
흘려보낼 때, 그때 인생이 알려주는 것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개정판 프롤로그
《이제야 보이네》는 김창완이 놓쳐버린 물고기에 관한 이야기이며 삶의 흔적에서 흘러나온 긴긴 노래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들, 비로소 의미를 드러내는 순간들, 이제야 보이는 삶의 의미를 활자로 돌아왔다. 삶은 답을 구하는 기회가 아니라 질문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며, 먼 미래에도 모를 것만 같은 수많은 질문이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이제야 보이네》를 다시 세상에 내보이셨다고 한다. 흘려보냈다가 다시 돌아온 인생이 그에게 무엇을 들려주었을까.
《이제야 보이네》를 읽는 동안 시원하고 편히 숨을 쉬는 것 같다. 살다 보면 불현듯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지금 놓쳐버리면 영영 끝일 것 같다. 갖지 못한 것들이 아쉽고, 실패한 것들이 후회스럽다. 또, 또 그럴까 봐 부지런히 달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들볶았다. 하지만 김창완은 말한다.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흘려보낼 때, 비로소 배우는 것들이 있으니 놓아주어도 괜찮다고. 잃어버리고 나서야 보이는 소중함이 있고,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고.
"하루만큼 가면 하루만큼 멀어집니다.
이제는 그 시간의 흐름을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삶도 음악도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고요.
무대 위에서 저는 항상 이런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려고 합니다.
옛날에 유명했던 곡을 부르는 게 아니라고요.
지금 이 모습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다고요."
-117면
《이제야 보이네》 책이 내 손에 쥐어진 지금은 나와 함께 있지만, 이 글 또한 흘려보내야 할 것을 이제는 안다. 가수의 글은 노래를 불러오나 보다. 곧장 답가가 멜로디로 흐른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인생은 모순과 아이러니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남풍만 불 수는 없다. 북풍, 서풍, 동풍 모두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상실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었다. 고통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었다.
"한쪽 방향만 가리키는 풍향계는 고장 난 녹슨 풍향계다.
나는 오늘 어디서 바람이 불어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오늘도 어디를 바라다볼지 나는 모른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흘러온 내 인생길. 후회가 낳은 기쁨도 있고, 절망이 낳은 보람도 있으며, 환희의 자식으로 고통이 태어나기도 했다."
- 13면
"억지로 지우려 드는 대신 통증을 껴안을 수 있는 내성을 기르는 것도 방법이에요. 마음이란 게 쉽게 부서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몇 번 부서져서 붙이고 꿰맨 가슴은 점점 더 안 깨져요. 지금 산산이 부서졌다고 해도 서서히 붙더군요. 그것도 아주 말끔하게요."
-24면
이 책을 읽으며 자주 멈췄다. 프롤로그를 넘어가는 데 하루가 걸렸다. 문장마다 질문이 걸려있었다. 쉬운 문제가 아니어서 허공을 헤맸다. 행간마다 내 속의 다른 내가 말을 걸었고, 그 말에 귀 기울이고 싶었다. 폭신한 산책길이라기보다 자갈 섞인 흙길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걷는 기분이었다. 느릿느릿 걸을 수밖에 없었다. 길에 들어서자마자 비가 조금 내렸다. 하늘이 맑았는데 어떻게 비가 떨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또 질문해야 했다. '나 왜 우는 거야?'
서문만 읽어도 어떤 마음으로 쓴 책인지 알 것 같을 때가 있다. 담담하고 잔잔하게 흐르지만 까마득하게 수심이 깊다. 가끔 김창완 아저씨의 인터뷰 영상을 우연히 본다. 그때마다 울컥한다. 웃고 있어도 뒤돌아서서 울 것만 같은 표정이다. 긴 울음을 지나야 지을 수 있는 말간 웃음이었다. 얼마나 아팠기에 저런 얼굴을 할 수 있을까, 알면 다칠 것도 같지만 무심한 듯 꺼내놓은 이야기들이 따뜻하고 아름다워 더 가까이 다가가 듣고만 싶다.
데뷔 48년 차 일흔 살의 다재다능한 예술가, 닮고 싶은 어른으로 꼽히는 김창완이 "꾸밈없이 툭," 건네는 진솔한 성찰과 위로가 《이제야 보이네》 안에 가득하다. 일상 속 사소한 것에서 삶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시선과 잃어버리고 잊은 줄 알았던 의미를 건지는 삶을 향한 간절함이 빛난다. 자신의 결점이나 모순을 폐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손에 쥔 것만 인생이 아니라는 말씀이 뿌리내렸으면 좋겠다.
항상 어제보다 나은 나를 원했다. 늦더라도 이제야 볼 수 있는 멋진 변화를 원했다. 예전보다 더 나약하고 비겁해졌지만 그게 더 편하고 좋다는 아저씨의 말씀에 따라웃으며 생각했다. 이전보다 더 나은 내가 아니라도 언제나 지금의 내가 편하고 좋았으면 좋겠다고, 찌그러져도 예뻐할 수 있는 동그라미면 좋겠다고.
《이제야 보이네》를 좋아한 가장 큰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 살고 싶은 인생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아저씨의 말씀을 들으니 더 오래, 더 잘 살고 싶어졌다. 어떤 하루를 보냈든 오늘의 나와 사람들에게, 세상에 감사하며 잘 살았다 어깨를 툭 쳐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chill한 마음이 커졌다.
물과 바람을 닮은 글. 흘려보내도 괜찮다지만 투명한 유리병에 모아두고 싶은 글. 계속 읽으며 나를 씻기고 말간 얼굴로 빛나고 싶게 만드는 글. 이제야 보이는 것들로 가득한 세상이기에 오늘 더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게 하는 글. 같은 메시지라도 다른 온도와 무게로 삶을 전하는 글. 연약한 듯 오롯이 자신만의 색깔과 소리를 드리운 글. 가수가 쓴 글이 아니라 작가 김창완이 쓴 글.
《이제야 보이네》를 통해 삶의 모퉁이마다 반짝 빛나던 당신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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