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는 도끼다 -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는 지성의 문장들
김지수 지음 / 다산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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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는 도끼다》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필사책이라고만 소개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필사할 문장들이 인터뷰이기 때문이다.

2015년부터 진행한 인터뷰 시리즈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는 국내외 석학들의 지혜가 모인 인문학 플랫폼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인생이라는 광대한 시간 속에서 살아온 어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옳고 그름의 선명함보다 틈새의 아름다움과 존재 안의 광야를 들여다보고자 안간힘을 쓰는' 김지수 기자의 예리한 통찰력과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빛났다. 경청과 공감으로 다져진 따뜻한 품성과 다방면의 지식을 바탕으로 질문하는 프로의 전문성도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버릴 단어 하나 없이 적확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된 문장에 정말 감탄했다. 세계의 수많은 지성을 직접 만난 경험 위에 '더 나은 언어로 세상을 잇는 마인즈 커넥터'라는 목표가 더해져 탁월한 문장가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필사는 도끼다》는 100명의 지성과 인터뷰한 기사 중에서 135개의 문장을 주제별(어른의 말, 지성의 말, 각성의 말, 안식의 말, 행복의 말)로 선별했으니, 10년의 에센스라 자부할 만하다.


"어른들, 인문학자들, 장인들에게서 울림이 컸던 130여 개의 특정 발화 지점을 포착한 것입니다. 다른 층위의 경험, 고민 끝에 도달한 현자들의 말이기에, 내 인생 어느 순간에 적용해도 어긋나지 않을 거라 자부합니다."
- 9면


《필사는 도끼다》를 읽으며 알았다. 내가 왜 인터뷰 기사를 좋아하는지 말이다. "도끼"가 힌트였다.

"필사란 무엇일까요? 도끼질입니다. 장작을 쪼개듯 암벽을 찍어 오르듯, 오늘 내가 여기 살아 있음을 새기는 존재의 도끼질이지요. 흘러가는 언어를 붙잡아 내 인생의 적재적소에 꽂아 넣는 구체적 행위, 그게 바로 필사입니다."
- 6면


한 사람이라는 존재를 도끼질하듯 훔쳐보며 나의 살아 있음을 새기는 기쁨이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로 갈무리된 인생의 정수를 글을 통해 마시며, 그 인생을 훔치는 기분이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각자의 세상에서, 다른 태도와 생각으로, 전혀 다른 우주의 삶들을 경험하는 게 좋았다. 비문학처럼 명확하게 질문하고 답하는 흐름이 편하면서도, 활자로 표현된 인생이 문학처럼 아름다워서 좋았다.


QR코드로 해당 인터뷰를 손쉽게 읽을 수 있으니 한 권의 어엿한 인터뷰집이며, 100권의 사람책이다. 한 사람의 시간을 대표할 수 있는 골수를 골라 손글씨로 음미할 수 있다. 게다가 《필사는 도끼다》는 챕터마다 김지수 작가님의 에세이로 시작해 주제를 관통하는 질문으로 마무리한 가이드 형식이다. 필사로 피어난 생각들이 질문을 기점으로 더 깊은 사유로 확장되는 흐름도 강점이다. 필사를 좋아하고, 올해의 키워드 중 하나를 '질문'으로 삼은 내게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필사는 도끼다》의 모든 페이지가 정말이지 놓칠 수 없는 메시지들이라 가슴이 벅찰 정도였다. 100명의 현인들이 김지수라는 훌륭한 필터를 통해 여기 이 책에 모였다. 이 시대의 어른들을 만나며 많은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그 인생들이 비추는 나의 인생은 어떤 모양과 빛깔인지 궁금해서, 눈과 손과 마음이 다 같이 즐겁게 헤매던 독서이자 필사였다.


두 손에 흰 면장갑을 껴야만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고급스러운 물성을 자랑하는 책이다. 나뭇결과 도끼 자국으로 책의 메시지를 양장 표지에 그대로 표현한 센스가 감각적이다. 도끼 틈새로 비치는 문자에 지성인들의 높은 사유가 새어 나오는 듯하다. 사철 제본으로 온전히 펼쳐져 편하게 필사할 수 있게 한 만듦새와 잉크가 비치지 않는 도톰한 종이까지 필사책으로도 더없이 훌륭했다.


인상 깊은 인터뷰들이 많아 고르기 어려웠지만 지금 내게 다가온 몇 구절들을 꼽아봤다.

<성실은 내 인생에 대한 예의, 밀라논나>
"일단 눈뜨면 저를 토닥거려요.
"잘 잤니? 명숙아, 넌 잘 하고 있어. 여지껏 잘 해왔잖아."
기도하고 산책하면서 루틴을 다져요.
루틴은 나를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거예요.
루틴이 튼튼하면 일상이 무너지지 않아요."


<순간의 영원, 진은숙 (음악계 노벨상 지멘스상 수상자>
지금은 알아요. 그냥 그날그날 사는 거구나,
물 흐르듯이 흘러가면서 어떤 구조를 갖춰가는 거구나.
젊을 때는 그런 인생이 한없이 갈 것 같은데,
나이 드니까 또 알겠어요.
지금 좋은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걸.
그래서 최선을 다해 살아요.


<후회해도 괜찮아, 다니엘 핑크>
이미 한 행동에 대한 후회는 선택지가 있어요.
하지만 무행동에 대한 후회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요.
나이 들수록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걱정하고 웃고 걱정하고 웃고, 요시타케 신스케>
저는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심심한 나를 웃겼더니,
우연히 독자가 생기고 작가가 되었어요.
확실히 운이죠.
그런데 운은 우리가 어쩔 도리가 없어요.
그러니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게 다죠.


<최선의 고통, 폴 블룸>
당신이 어떤 일을 하든
충분한 고난이 당신과 사랑하는 이를 덮칠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더 많은 고난을 찾아 나설 이유는 없어요.
안타깝지만 인간은 행복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팩트는 ... 고통을 통해 더 개선되게 하는 것이
진화의 본질이라는 거죠.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가장 신선했던 인생은 백현진 님이었다. 음악, 미술, 연기를 넘나드는 예술인. 영화에서 보고 낯이 익은 이 배우가 천재였다니.

<완성은 없다, 손을 뗄 뿐>
저는 완성도를 믿지 않아요.
수정과 개선과 발전을 믿지 않습니다.
제가 보는 인류 문명도 발전이 아니라 변화와 변경 정도예요.
작업할 때도 마감이나 목표가 없어요.
즐겁고 정실하게 자기 일을 보다가
정해진 시간에 손 떼면 끝이 나는 거죠.
즐겁게 변경시켜 나가면, 몸과 마음에 무리가 덜해요.
그런 상태가 반복되면 무리가 점점 덜해지겠죠.
전 그런 상태를 희망해요.


특히 와닿은 문장들을 살펴보니 지금의 내가 여유와 재미를 중심에 두고 고통의 가치를 되새기는 데 치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삶의 단계마다 달라질 가치 기준이 그때의 나와 어떻게 얽혀 영향을 주고받을지 《필사는 도끼다》를 늘 곁에 두면 알아차리고 싶다. 현명한 어른들을 도끼질하며 그 자국을 들여다보며 나 자신을 다시 도끼질하는 필사와 돌아봄의 시간. 《필사는 도끼다》로 오래오래 누리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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