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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 출간 20주년 기념 개정판 ㅣ 반올림 1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24년 10월
평점 :
"그럴 수가 있는 걸까,
그럴 수가 있는 걸까,
재준이같이 착한 애가,
겨우 열여섯 살인 남자애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죽어서 사라질 수 있는 걸까, 이렇게 피가 돌고 맥이 뛰던 몸이 어느 순간 그렇게 갑자기 절구 속에서 빻아지는 뼛가루로만 남을 수도 있는 걸까.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라왔다. 그것은 슬픔보다는 분노를 닮은 불길이었다."
- 68면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순박하고 착한 평범한 아이, 황재준. 재준이가 떠나고 우연히 발견된 파란 표지의 일기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재준이의 어머니는 자살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 문장을 읽고 차마 더는 일기를 읽을 수 없었다. 대신 재준이의 절친 유미에게 읽어봐달라고 부탁한다.
유미는 중학교 2학년 2학기에 전학을 왔다. 귀도 뚫고 선생님에게 대들 줄도 알아 날라리로 오해받기 쉬운 솔직한 아이다. 얄미운 담임에게 한 방 먹이는 모습을 멋있게 본 재준이가 유미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다.
"넌 할 말을 다 하더라. 넌 참 용감해. 저기..... 너랑 친구 하면 안 될까? 그냥 친구 말야. 남자 친구 말고."
"웃고 있는 그 애의 눈은 어찌나 맑고 착해 보이는지 그만 나는 단번에 무장해제되는 느낌이었다. ......
얼마나 행복하게 살면 저런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 속으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42면
그렇게 둘은 남사친, 여사친으로 서로의 짝사랑까지 응원해주는 찐우정을 나눈다. 유미도 재준이의 일기를 읽는 일은 괴로웠지만 누구도 먼저 손대게 하기 싫어 용기를 낸다.
다행히 자신이 죽었다는 그 말은 자살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시체놀이를 하다가 진짜 자신이 죽은 시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겁을 집어 먹은 경험에서 재준이는 한 가지를 깨닫는다.
"물론 아주 잠시 든 생각이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 감은 눈 위로 쏟아지는 햇살도, 두 귀로 들려 오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갑자기 전혀 다르게 들려왔다. ........
나는 마치 죽었다 살아 온 기분이었다. 그러자 문득 시체놀이를 하는 기분으로 이 세상을 살아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달라 보일까?"
- 92면
어쩜 이리 기특한 생각을 해냈니, 재준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의식적으로 관점을 바꾸는 연습을 하며 재준이는 삶의 기쁨을 맛보며 재미를 느낀다.
"아침에 자리에서 깼을 때, 나는 이미 죽었어, 하고 생각했더니 눈앞에 펼쳐진 하루가 한없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그렇게 가기 싫던 학교도 당장 달려가 보고 싶었고, 아침부터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퍼붓는 아빠도 재미있게 여겨졌고, 새로 산 나이키 운동화를 몰래 신고 나가 진흙을 묻혀 온 인준이도 용서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죽었는데, 죽은 사람에게 나이키 운동화쯤이야 하찮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 95, 96면
찰리 채플린을 좋아해 희극 배우가 되겠다는 꿈도, 짝사랑하던 소희도, 삶에 열정을 갖고 기록으로 남긴 일기도... 모두 그대로 두고 "아직 떠날 수 없는 나이에 꽃잎이 흩날리듯 사라져 간" 재준이의 이야기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유미의 관점으로 서술된 이야기는 꼭 학창 시절 내 친구의 목소리처럼 생생했다. 20년 전 2004년에 출간된 책이라 복장 제한, 가방 검사를 하는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그 시절로 돌려놓았다. 현실은 유미와 재준이 또래의 자녀를 키우고 있는 엄마지만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덕분에 어른들에게 반항하고, 학업에 힘들어하며, 짝사랑에 애달파하는 아이가 될 수 있어 신이 났던 것 같다.
예민하고 까칠한 사춘기 아이의 정서에 공감하며 아이의 눈으로 나를 돌아보는 뜻밖의 부모 교육 수업이기도 했다. 아이의 성장통에 공감하고, 미처 헤아리지 못한 아이의 감정과 욕구를 이해하며, 서로의 힘이 되어주는 진정한 가족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유미와 재준이의 목소리로 엄마인 내가 아이의 감옥은 아닌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아이의 성숙한 사랑을 몰라보는 건 아닌지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죽음을 매만지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꽃다운 나이에 삶을 마무리한 재준이의 속마음을 일기로 들여다보며 무한한 가능성을 닫고 사그라든 청춘이 아득히 아팠다. 죽을 것을 예감한 듯 "죽은 영혼의 놀이"로 삶을 돌아보며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며 재준이가 집어 올려준 생의 반짝임들은 참으로 눈부셨다.
"어이없지, 재준아? 나 역시 오늘 살아 있다고 해서 내일도 살아 있을 거라고 말할 수 있니? 죽음과는 한 끝도 닿지 않을 것 같았던 네가 그렇게 어이없이 저세상으로 가다니..... 너는 정말 소년답게, 열여섯 소년답게 그렇게 살다 갔구나. 사랑도 품었고, 고민도 하고, 방황도 하고, 열등감에도 시달리고, 그러면서도 꿈을 품고, 그리고 우정도 쌓았고."
-177면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는 이경혜 작가님이 처음으로 쓴 청소년소설이다. ‘청소년소설’이라는 분류명도 생소했던 때라 ‘중학생 소설’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청소년소설이 어엿한 문학의 장르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한 대표적인 작품이라니, 출간 20주년을 맞아 개정판으로 다시 찾아온 작품이라 <작가의 말>도 3개나 실렸다. 그 중 북콘서트에서 만난 학생이 편지를 주고 간 적이 있었단다.
"집에 와 그 편지를 읽다 나는 오래 울었다. 이 책을 읽어서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편지였다. 그 편지가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를 하늘만이 아실 것이다."
20년을 살아남아 꾸준히 읽히는 동안 아이였던 독자가 어른이 되어 함께 늙어간 책이구나 알았다. 독자와 작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이제는 읽는 이 모두의 한 시절로 녹아드는 이야기의 존재에 괜히 먹먹해졌다.
당당하고 단단한 아이들의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는 이야기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를 통해 청소년이든 부모든 독자 자신과 가족을 비춰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바람과 아이들의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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