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
김형민 지음 / 믹스커피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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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에 취약하다. 세계사는 더더욱 그렇다. 너무나 부족하지만 역사에 손끝이라도 닿아 보려는 시도를 조금씩 하고 있다. 내가 누리는 이 놀라운 현재에 이르기까지 숱한 희생과 헌신을 쏟은 지나간 생명의 존재들을 알기 때문이다.


그 존재들 중 특히 마음을 주고 싶은 사람들이 여기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에 있었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일 뿐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이 승자이기 때문에 승자독식의 기록으로 남은 역사이지만 그 틈바구니에서도 살아남은 작고 소중한 이야기들이 여기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바위를 더럽히기라도 하겠다는 듯 스스로를 내던진 사람들도 있었다. 살아남고자 바짝 엎드리는 한편, 머리를 짜내고 발버둥 쳐서 살길을 마련하고 끝내 역전의 발판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도 뒤를 잇는 이들의 등불로 남아 거대한 잉걸불의 단초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 5면


"균열을 내려는 시도가
끊인 적은 없다"
패배는 처절했지만 짓눌린 사람들의 도전은 끊인 적이 없었다. 그 기억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고 마음속에 새겨져 역사의 수레바퀴는 계속 굴러갔다.


교과서에 실려 죽은 지식으로 문자에 묻힌 거창한 사건들보다, 기억의 비좁은 틈새를 누비고 삶으로 살아낸 작은 자들의 이야기가 진짜 역사가 아닐까.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이 역사의 본모습이 아닐까.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을 읽는 내내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함께 다녔다.


"이길 만한 사람들만 이기고 힘센 쪽은 결코 지지 않는 역사였다면 역사란 얼마나 재미없고 따분한 이야기의 반복으로만 채워질 것인가. '다윗'의 돌팔매 없이 '골리앗'의 승전보로만 점철된 역사는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 16면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의 저자 김형민은 "다윗과 골리앗"의 비유로 책을 꿰었다. 여린 소년 다윗처럼 승리할 가능성이 적은 약자 언더독들의 전략, 용기, 결의, 지혜, 신념 5가지 실로 역사를 재미있게 만든 사람들을 작품으로 완성했다.


저마다의 방식과 수단으로 드라마틱한 역전극을 만들고, 영웅적 비극을 써내며, 패배로써 역사를 다채롭게 한 역사의 찐 주인공들. 심심한 역사의 균열을 끌어낸 사연을 하나로 모았다.


30가지의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평소 표정 변화가 적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을 읽을 때는 절로 눈이 치켜올라가 이마 주름살이 자주 나타나고, 쯧쯧거리며 고개를 젓고, 안타까움에 얼굴이 일그러지기도 했다. 약자들의 희생과 시련이 마음 아팠지만 그래도 희망을 말하고 있는 저자의 속마음이 들렸다. "함께 뭐든 해보자고."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은 고구려부터 조선의 이순신을 거쳐 1970년대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 1980년대 프락치였다가 민간인 사찰을 폭로해 국군보안사령부를 무너뜨린 윤석양 이병, 지역주의에 맞선 노무현과 허대만까지 우리의 역사의 구석구석을 비춘다.


(윤석양)
"양심의 소리는 아주 작고 고요하지만 때로는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듣기조차 거부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라는 토로에서 윤석양의 고뇌가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윤석양이 보안사를 탈출하던 그날은 .....
인간의 영혼을 도구로 삼는 어둠의 세력에게 끝내 왜 너희들이 어둠인가를 가르쳐 준 날이며, 한때 거인에게 꿇어 엎드렸던 다윗이 기어코 돌팔매를 던져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시킨 '디데이'였다는 뜻이다.
-332면

누가 출세를 하고 누가 행복하게 살았든 개인의 사정일 뿐이고 누구도 정답을 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역사의 돌팔매를 부여잡고 거악과 맞섰는지, 그래서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을 변화시켰는지를 묻는다면 당연히 윤석양을 호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335면


사악하고 거대한 지옥 아우슈비츠에 자발적으로 들어간 비톨트 필레츠키의 이야기도 놀라웠다.
나치의 만행을 폭로하고자 혈혈단신 나선 기적 같은 용기를 낸 사람들이 있었지만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겠는가?' 믿을 수 없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고 한다.


"누구나 그 소문의 진상을 궁금해했지만 수용소 안을 들여다 보기 전에는 아무도 내막을 알 수 없었다. 필레츠키는 그 공포를 이겨낸다. 일부러 통행 금지를 어겨 독일군에게 체포된 뒤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수용소 잠입 목적은 수용소 안의 폴란드인을 규합해 저항군을 결정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다."
- 83면


지하조직을 결성하고 조악한 재료로 무전기까지 만들어 외부와 교신했지만 바깥 사람들은 그 간절함을 외면했다. "아무리 독일놈들이라도 설마 그럴 리가. 가스실에서 무슨 인체 실험을, 이 사람 뻥이 심하군." 하면서 말이다. "폭격이라도 해달라. 제발! 가스실만이라도!" 절규했지만 폭격기는 오지 않았고 나치의 감시망은 비밀조직을 조여왔다. 결국 그는 민간인 복장을 구한 뒤 감시대원들을 제압하고 탈출에 성공한다. 참으로 용감한 분!!!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도 참여해 그 지옥에서도 살아나온다. 그러나 폴란드 망명 정부에 충성해온 그를 눈엣가시로 여긴 폴란드 공산 정부에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는다. "폴란드 만세." 그는 평생을 두고 충성하고 사랑한 나라를 입에 올리며 사형대에 선다.


"용감한 사람들, 정면으로 악에 저항하고 그것으로 생존의 의미를 삼은 사람들, 온갖 난관을 떨치고 깊숙이 숨겨진 진실의 옷자락을 잡아채 광장으로 끌어낸 이들 또한 항상 나타난다.
감당하기 어려운 막강한 적과 그들이 내뿜은 공포 앞에서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았던 다윗들의 가장 큰 무기는 용기와 신념이었다. 필레츠키라는 인물 역시 그를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최후진술을 들어보자.
"죽음을 앞둔 순간에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을 느끼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
- 88면


역사라는 틀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빠져 읽었다. 울컥하게 만드는 글솜씨로 골수 팬들을 거느린 글쟁이라는 저자의 소개글이 뒤늦게 떠올랐다. 과연 그랬다. 이해하기 쉽게 복잡한 역사를 간추려 설명하지만 에세이스러운 서술로 역사 속 인물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하고, 인문학적인 질문을 결론에서 던지며 쓰고 달고 깊은 다채로운 글맛을 보게 했다.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은 소수자, 여성, 노예 등 역사에서 배제된 주변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끌어와 다층적이고 복잡한 역사의 구조를 보여준다. 언더독에 가까울 대부분의 독자들이 공감대를 자극해 우리 역시 역사의 일부라는 사실을, 역사는 권력의 승리가 아니라 권력과 저항의 상호작용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실패 역시도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동력이 된다는 희망을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었다.


요즘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처럼 역사를 다채롭고 새롭게 해석한 관점을 담은 책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하나의 같은 산도 어디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듯, 역사 또한 다각도에서 낮고 높은 여러 시선으로 통합적으로 살펴볼 때 진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것 같다.


책이 들려주는 지나온 과거의 흔적 안에서 잠시 살며 같은 고민과 감정을 경험하고 나온 뒤, 우리는 한층 더 큰 다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이 전하는 기억할 만한 존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새로운 변화는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 자들의 희망과 용기로 끊이지 않을 것이다. 생생히 살아내며 계속 싸우고 있는 역사의 과거와 현재를 기억하고 알려준 책, 그래서 미래를 여전히 꿈꾸게 한 책,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 감사합니다.


"독립이 되는 건 아니지만,
알려줘야지.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고."
- 170면

"결국 기억이 세상을 움직인다.
아울러 오늘날 우리 곁에서 골리앗과 대항해 싸우는 사람들은 없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자. 그들 역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쓰러진다 해도, 우리를 기억해주시오."

- 166면




***출판사 믹스커피의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세계사에균열을낸결정적사건들 #김형민 #언더독 #믹스커피 #작은힘으로세상을뒤집은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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