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방·해변의 길손 - 1988년 제1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한승원 외 지음 / 문학사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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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학교 선생인 임기섭은 평상과 다름없이 한심스러운 푸념을 늘어놓고 출근한다. 버스를 놓치면 지각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으로 가던 길에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남자들에게 납치되듯 어딘가로 옮겨져 13시간 구류된다. 자술서 한 장을 작성한 후 끌려간 붉은 방, 그곳에서 만나게 된 고문 기술자 최달식. 사상범을 일주일 간 집에 재워줬다는 이유로 자백을 강요당하며 최달식에게 고문을 당한다. 선연한 핏빛의 그 방에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각자의 생각을 이어간다.

최달식은 한국전쟁 이후 빨갱이가 최고의 적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유진영이 수복한 고향에 돌아와 빨갱이 둘을 처형하던 아버지의 모습, 그럼에도 온 집안의 철천지 원수는 빨갱이라고 천명한 아버지. 그의 아버지는 결국 철로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그 누추한 마지막 모습에서 최달식도 빨갱이를 인생 최대의 적으로 받아들인다.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자신은 대학에도 가고 원하던 은행장이 되었을 텐데.

임기섭은 군대에서 발목을 다쳤던 자신을 살뜰하게 챙겨줬던 지인의 부탁으로 수배범을 며칠 집에 재워준 것이 전부인데, 다만 월북한 큰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질까 두려웠을 뿐이다. 고문당하는 숨 막히는 순간 그는 생각한다. 자신이 외면했던 사람들은 지하의 어느 곳에서 이렇게 고문당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무도 자신의 실종을 기억하지도 관심하지도 않을 것이며 오로지 가족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최달식이 원하는 대로 자술서를 작성했을 덕분이겠지만 끌려올 때와 마찬가지로 영문도 모른 채 풀려난 그의 가슴에는 깊은 분노감이 남는다.

최달식은 끔찍한 고문을 자행하는 순간에도 노망든 그의 모친을 수용소 같은 기도원에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과 가족을 염려하고, 심방 온 목사의 인도로 기도에 들며 안식을 찾기를 기대한다. 임기섭을 풀어주고 그는 깊은 허탈감에 빠지는데, 붉은 방 안에서 신을 향해 기도하며 따뜻한 위안을 받는다.

  영화 <박하사탕>처럼 고문기술자의 입장을 보여준 것이 인상적이다. 선연한 핏빛의 그 방에 마주한 둘. 아무도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이념 갈등이 아니라, 누군가를 짓밟고 망가뜨리고 싶은 욕망과 이유도 없이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힌 평범한 사람의 자각이 있다. 연대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않으면 관심 갖지 않으면 개인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각인을 준다. 붉은 방에서 풀려난 임기섭은 아파트 9층 집을 바라보지만,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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