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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평점 :
요나스 요나손은 자신의 삶을 투영시킨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2009)으로 문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이다. CEO로서의 자리에서 물러나 작가로 데뷔한 그는 독특한 스토리뿐만 아니라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의 소설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데뷔작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으로 전세계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요나스 요나손의 3번째 신작인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은 출간되자마자 유럽의 베스트 셀러가 되며 또다시 일명 ‘요나스 열풍’을 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도 또한, 출간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런 책을 서평 이벤트를 통해 일반 독자들보다 더 빨리 접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페르 페르손의 할아버지는 말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지만 이내 기계화로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여 아들과 손자 페르손을 알거지로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한 가난 속에서 페르손은 싸구려 호텔의 카운터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가고 있었다. 요한나 셸란데르는 대대로 남자가 목사의 가업을 이어가는 집안에 태어난 딸로 아버지의 강요로 인해 목사의 길을 걸었으나,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정신적인 학대를 받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마자 교회를 박차고 걸어 나와 노숙자 아닌 노숙자 생활을 하게 되었다. ‘킬러 안데르스’라는 별명이 더 유명한 요한 안데르손은 형량을 모두 채운 후 감옥에서 나와 페르손이 일하고 있는 싸구려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셋은 작은 우연으로 인해 서로 만나게 되고, 함께 사업을 벌이게 된다. 처음 그들은 고객이 돈을 지불하면 고객이 원하는 사람을 킬러 안데르스가 손 봐주는 첫 번째 비즈니스 전략을 세운다. 잡지사를 통한 홍보로 사업은 번창하지만, 한창 사업이 잘 되고 있을 때 안데르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더 이상 사람을 건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첫 번째 사업은 끝이 난다. 그런 안데르스를 버리기로 계획했던 두 사람은 곧 안데르스가 유명인이 되자 안데르스를 설교사로 내세운 교회를 세워 헌금을 받으며 돈을 버는 두 번째 비지니스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도 얼마 가지 못하고, 끝이 난다. 그 후, 안데르스는 페르손과 셸란데르가 몰래 먹인 약으로 인해 범죄를 저질러 다시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두 사람은 챙겨놨던 돈과 함께 떠나게 된다. 사업을 하면서 가까워졌던 두 사람은 간단한 결혼식을 올린 후 오두막 한 채를 구해 그곳에서 살게 된다. 아이까지 가지고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던 중 문득 페르손은 자신이 정말 행복한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고, 셸란데르는 킬러 안데르스와 함께 기부했던 일들을 왠지 모르게 자꾸 떠올리게 된다. 두 사람은 결국 출소하게 된 안데르스와 함께 사람들의 기부금들을 어려운 사람에게 산타 복장을 한 안데르스가 직접 나눠주는 세 번째 비즈니스 전략을 세우게 되고, 셋은 그것에 만족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킬러 안데르스와 친구 둘』의 주인공들은 본심은 선할지 몰라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대부분 악인적인 모습들을 보인다. 킬러 안데르스보다 오히려 페르손과 셸란데르의 그런 점이 더 부각되는데, 두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이 피해 보는 것을 신경 쓰지 않으며, 이야기 속의 원래 악당보다 더 영악하게 사기를 저지르며 엄청난 돈을 벌어댄다.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들은 어느 정도의 ‘피카레스크 소설’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는데 (*피카레스크 소설; 일반 소설과는 달리 악인이나 가난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현대 사회를 풍자하는 소설, 대부분 주인공은 마지막에 잘못을 뉘우침.) 이는 소설의 재미를 더해 줄 뿐만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왜 그들은 그러한 사업을 벌였을까? ‘가난’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면서도 한편으로는 2% 부족한 대답이다. 페르손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고, 사회에서 뒤쳐지게 되었다. 그들은 사회 변화에 적응을 한 사람들과 비교되어 패배자의 상징이 되었고, 낙오자가 되었다. 능력이 없는 ‘옛날 사람’이 되어 버린 그들에 세상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아무런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큰 성공의 그림자에 숨겨진 소수 따위는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세상에서 페르손 또한 패배자의 상징인 가난을 타고 났고, 그런 페르손이 할 수 있었던 일이란 그들을 원망하는 일뿐이었다. 페르손을 외면한 세상에게 그는 세상을 위한 도덕적 규율을 지킬 필요가 없었다. 페르손은 가난에 대한 복수를 세상으로 돌린 것이다.
셸란데르는 남성우월주의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이다. 아버지의 강요로 어렸을 때부터 목사의 길을 걸었다. 자신의 의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자라 왔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정식적인 학대를 받아도 아버지에게 큰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괴로웠지만 집을 떠나기에 셸란데르는 세상을 혼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셸란데르가 자신의 의지로 선택을 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셸란데르의 가장 큰 두려움이자 장애물이었던 아버지라는 존재가 사라지자 마자 셸란데르는 그동안의 억압의 영향인지 폭발하듯 자신을 터뜨렸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셸란데르에게 사업은 힘들었던 과거에 대한 자신에게 주는 보답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던 그들이 회심하게 된 계기는 유별나지 않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안데르스는 그냥 문득 성경이 읽고 싶어지게 되고 그 안에서 답을 얻으며 회심의 길을 걷게 된다. 누가 건넨 것도 아니라 그냥 문득 하고 싶어져서, 그러고 싶어져서, 그랬던 것이다. 페르손과 셸란데르 역시 그냥 어느 날 문득, 질문들을 떠올렸다. 자신들은 지금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언제 가장 행복했었지? 그 답을 찾으려 과거를 회상했을 때 그들이 행복했다고 생각 했었던 것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뺏거나 얻는 것이 아닌 주었을 때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되돌아보며 바른 길로 돌아가는 세 사람을 보며 언젠가 배웠던 맹자의 성선설이 생각났다. (*성선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맹자의 학설)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마음이 변하게 되고, 상황이 변하게 된다.
분명 우리는 범죄가 악한 것이라는 것도 알고, 그들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 중에는 올바른 길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 사람을 마냥 미워할 수 만은 없는 것은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느꼈어야 했던 아픈 감정들에 우리가 공감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외면 받아 외롭고 힘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곧 누군가의 작은 말 한마디, 때로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로 인해 그런 생각은 저만치 멀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세상이 악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악한 일을 저지르는 세 사람을 보면서도 언젠간 달라질 모습을 기대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들이 변해가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은 가볍게 읽어도 재미있고, 무겁게 읽어도 재미있다. 가벼운 독서로부터 오는 나름의 즐거움과 깨달음이 있고, 무거운 독서로부터 오는 나름의 즐거움과 깨달음이 있다. 하지만 독서의 끝은 이상하리만큼 편안함과 충만감으로 맺어지는데 주인공들이 악에서 선으로 가는 과정이 단순해 보여도 그 과정들을 함께 해 나가면서 왠지 모르게 나 또한 위로 받는 느낌이 든다. 미워할 수 없는 악당들에게서 세상의 이면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들이 보여주는 선한 모습에 감동까지 받게 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생각한다. “아, 오늘도 세상은 살 만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