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들의 행진 - 유교인의 건국운동과 민주화운동
이황직 지음 / 아카넷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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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연구에서, 유림은 소외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소위 "근대화" 물결에 반대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 한 수구세력이자 "봉건"(조선왕조가 봉건제를 시행하지 않았음에도!) 세력으로 낙인찍혔고, 위정척사만 내세워 비좁은 세계관에 갇혀 개혁세력에 반대하려 한 집단으로 기술되었습니다.


유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그들이 주도한 1910년대 의병항쟁에 대한 인식도 훼손했습니다. 평민 의병장인 신돌석을 양반 의병장들이 소외시켰다는 소설 속 이야기가 기정사실로 둔갑했고, 13도 창의군의 수장 이인영이 부친상 때문에 한성 진공을 포기했다는 표면적 사실이 무슨 유림의 한계인 것처럼 비춰졌습니다. 13도 창의군의 한성 진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진공을 멈추어야 했던 상황에서 부친상을 명분으로 삼았던 것은 고려되지 않고 말입니다. 유림의 의병항쟁은 그것을 삐딱하게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구체제 기득권 세력의 저항 정도로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영훈과 박노자가 의병항쟁을 보는 시선이 공통분모를 이루는 시선이 위와 같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유림의 활동 또한 그런 식으로 비춰졌습니다. 간재 전우가 승려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로 3.1운동에 참여를 거부했다는 일화는 무슨 유림 전체가 다 산 속에 파묻혀 현실도피나 했다는 식으로 비화되었습니다. 식민지 지배세력이 구체제 기득권 세력을 포섭하고 이용해 식민지의 근대화를 방해한다는 레닌주의의 이론에 따라 유림 개개인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고려되지 않은 채 그들을 지배체제에 순응한 '친일지주'로 낙인찍는 경향도 생겼습니다.


또한 유학의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적 특성이 독재체재를 옹호한다는 공격과, 실제 일제의 이른바 '황도유교' 및 박정희 정부가 유학의 몇몇 개념들을 독재체제 국민만들기에 적용하면서 유학은 민주주의 사회와 공존할 수 없는 존재로 매도되었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잡서인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가 그 대표일 것입니다.


이러한 서사는 근대중심주의의 산물입니다. 서구적 근대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들을 없어져야 할 것들로 규정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역사의 중심서술에서 제외하는 근대중심주의는 역사서술에서 많은 자들을 소외시켰습니다.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개화파와 계몽운동가들의 시선과 당시대 비판이 주로 소개되었고, 이들에 대한 유림의 반박은 제대로 된 고찰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유림은 피상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인 존재로만 기억 속에 남았고 그들이 과연 그때 무엇을 하였는가는 망각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래의 『아리랑』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 서사에서 유림은 계몽주의적이고 진취적인 주인공이 일제와 더불어 맞서야 할 대상으로 기술되었습니다. 각종 삼류 대체역사물에서 유림은 소위 "근대화" 방해물이란 이유로 학살 수준으로 쓸려나가고, 저급하고 자극적인 것만 찾는 한심한 독자들은 이걸 '사이다'라고 추잡스런 욕망을 충족시킨다며 좋아합니다. 무지함과 지적 태만이 자아낸 참으로 끔찍스러운 단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림이 5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나라를 이끌어 왔으며, 그들의 사고와 행동이 당대 평범한 백성들에게 강고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이들에 대한 소외와 무시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심지어 해방 이후까지의 역사를 제대로 재현할 수 없게 만듭니다.


조선의 유학사를 보면, 소위 "유교 탈레반"이라는 끔찍하고 천박하며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비하성 발언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당대의 지배적 학문인 성리학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시대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변용되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중화론의 대두는 공자, 맹자, 주자의 가르침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변용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렇게 하였던 퇴계, 율곡에 대한 탐구로 독자성을 띄게 되었으며, 하층계급의 성장으로 인한 신분질서의 해체는 중화와 오랑캐 사이에 명확한 선을 것지 않고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낙론 성리학으로 변용되었습니다.


또한 19세기 초 세도정치기에 유림은 민란의 주체이기도 하였습니다. 임술농민봉기의 주역인 류계춘을 비롯한 자들은 농민들을 지도하고 무장시킬 재력과 명망을 가진 양반 지주들이었고, 이들은 정조 시대 수령권력 강화와 세도정치가 결합된 관의 수탈에 맞서 무장봉기를 주도하였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졌을 때, 전라도의 유림들은 봉기가 일어날 만 했다며 봉기를 옹호하는 상소를 조정에 올렸습니다. 이들은 결코 민중과 유리된 존재가 아니었고, 오히려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자들이었습니다. 동학의 교리와 논리 또한 유학의 구호와 표현들을 담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전개를 볼 때, 당대 유림이 일제강점기의 폭압 앞에 어떻게 저항했으며, 그러한 저항이 1960년 4.19 혁명까지 연결되는 연속성을 탐구한 저서가 바로 『군자들의 행진』입니다.


제목 "군자들의 행진"은 4.19 혁명의 상징적 장면 중 하나인 교수단 데모를 말합니다. 경찰의 학생시위 유혈진압에 교수들이 4월 25일에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플랜카드를 내걸고 가두행진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저자 이황직 교수는 이러한 행진이 일제강점기 유림의 저항과 연속성을 가지는 것임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유학이 현대 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있느냐의 여러 논쟁들을 보고, 이 논쟁들이 유학의 이론에 대한 분석에 집중되었으며 실제 유림이 서구적 민주주의의 등장에 어떻게 반응하고 변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연구서를 집필했습니다. 이 저서는 심산 김창숙을 비롯한 유림 독립운동가들이 일제강점기, 해방전후, 그리고 이승만 독재시기에 어떻게 저항하고 정치적 활동을 하였고, 그들의 논리는 무엇이었으며, 변화하는 시대상에 따라 유학의 논리를 어떻게 변용하였는지 고찰하고 있습니다.


저자 이황직 교수는 유학의 근본 사상인 민본주의가, 당대 유림에게 민주주의로 변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들은 의병항쟁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으로 일시적으로 잠잠해졌으나, 3.1운동 이후 진행된 파리 장서 사건으로 결합하여 강고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였습니다. 이 학맥의 네트워크에 속한 여러 유교인들은 신간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 참여하거나 위당 정인보를 중심으로 조선학연구를 주도하며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을 하며 일제에 유무형적 저항을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부분이 어땠는지는 저도 책을 본지 시간이 흐른 관계로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들의 행동이 어느 종교 못지 않게 치열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해방전후 김창숙의 유도회총본부로 집결한 유림 인사들은 임정봉대운동을 비롯하여 민족주의 진영의 한 축으로 자리잡으며 일제가 사라진 상황에서 유교적 이상국가를 건설하자는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유교인들와 아나키즘 운동가들의 결합이었습니다. 국가주의, 권위주의적이라는 유교와 권위를 파괴하고 저항하려 하는 아나키즘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냐고 놀랄 사람들이 많겠지만, 본디 공자와 주자가 국가권력이 개인의 생활에 깊숙히 개입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해 왔음을 생각하면 놀랄 일이 아니겠습니다.


이러한 유림의 강한 정치의식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승만의 강력한 반대자 중 하나였던 김창숙이 적극적으로 독재에 저항한 것은 유명합니다. 그리고 4월 25일 교수단 데모에 나선 교수들은, 조선유도회의 네트워크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대 유림의 학맥적 후예들로 여전히 존재하는 네트워크를 통해 시위 일선에 나서며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 내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로서 미국적이고 기독교적이고 "근대인" 독재자인 이승만은, 한국적이고 유교적이고 "전근대인"들이 참여한 민주화운동에 끌려 내려와 하와이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근대/전근대의 공고한 도식이 허물어지는 광경인 셈입니다.


이황직 박사의 이 책은 최근의 역사에서 소외된 유림을 편견과 천박한 비난에서 벗어나 다시 제 자리로 돌리는 훌륭한 저작입니다. 이 책이 널리 읽혔으면 하는 바람에 이렇게 소개하니 다들 일독을 권합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아무래도 시간적 배경이 4.19까지라 그 이후에 유림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서술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후 유학 운동의 쇠퇴와 비정치화가 원인이라긴 하지만, 언젠가는 이 부분도 탐구한 연구가 나온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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