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의 빛 - 시인이 말하는 호퍼
마크 스트랜드 지음, 박상미 옮김 / 한길아트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공간과 인물이 낯익다(고 생각한다). 한데 인물에게서 생동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한 자세 그대로, 멈춘 시간을 홀로 견디고 있는 사람 같다. 마네킹처럼 보일 때조차 있다. 게다가 (낮이건 밤이건) 새벽빛이 감도는 듯 창백하다고 할 이 묘한 분위기는 대체 뭐란 말인가. 다시 낯설다.

호퍼의 그림을 볼 때마다 그렇게 느꼈다. 비로소 마크 스트랜드의 글에서 그 의문을 해소시킬 실마리를 찾았다.

호퍼의 그림은 짧고 고립된 순간의 표현이다. 이 순간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위기를 전달하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암시한다. 내용보다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증거보다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호퍼의 그림은 암시로 가득 차 있다. 그림이 연극적일수록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지고, 그림이 현실에 가까울수록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여행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림은 우리를 더욱 끌어들인다.

‘고립된 순간’, 말하자면 시간의 한 켜만 보여준다는 것인데,

호퍼의 그림에는 기다림이 많다. 호퍼의 그림 속 사람들은 아무 할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배역配役으로부터 버림받은 등장인물처럼, 이제 기다림의 공간 속에 홀로 갇힌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특별히 가야 할 곳도, 미래도 없다.

그렇다면 그림 속 인물들은 ‘홀로 갇힌 존재들’일수밖에 없겠다.

호퍼의 그림에서 빛은 형태에 드리워지지 않는다. 그보다 그의 그림은 형태로 가장한 빛에 의해 구성된다. 그의 빛, 특히 실내의 빛은 그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신빙성이 있다. 모네의 빛과는 정반대이다. 모네의 빛은 사방으로 맹렬하게 퍼짐으로써 모든 것을 비물질적으로 만든다. (…)
호퍼의 빛이 물체에 달라붙어 있는 것같이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인정하듯이 그의 그림들이 기록과 기억에 의해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과 사물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는가에 대한 기억은 공기나 빛에 대한 기억보다 강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대개 실외보다는 실내를 더 잘 기억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빛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밖에 나가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호퍼는 밖에서 유화작업을 하지 않았다. 호퍼처럼 천천히 작업하는 화가에게 빛은 너무 빨리 바뀌었던 것이다. 자세한 묘사가 사라지고 있는 그의 세계와 어울리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는 상상력이 필요했고, 이러한 작업에는 작업실이 최적이었다. 그의 그림은 즉흥적이기보다는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계획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빛은 축하의 빛이라기보다는 기념의 빛이다. 호퍼의 빛이 기하학적인 견고성을 갖추게 된 것은 그가 빛이 흩어지지 않도록 빛에 어떤 생명을 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빛은 오히려 빛이 저항하고 있는 대상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그에게 빛은 결국 어둠이라는 더욱 강한 세력의 휴지休止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어둠이라는 더욱 강한 세력의 휴지休止 상태에 지나지 않는’, ‘형태로 가장한 빛에 의해 구성’되며 ‘기록과 기억에 의해 그려진’ ‘상상력’의 그림이라! 그래서 창백하게 느껴졌구나. 

여러 의문이 줄줄이 풀리니 왠지 후련하다. (호퍼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미국의 계관시인이기도 한 마크 스트랜드의 탁월한 안목에 경의를 표한다. 한두 번 감탄한 게 아니었고, <빈방의 빛>에 대한 해석에는 찌릿할 정도였으니. 


1963년에 그려진 호퍼의 마지막 걸작인 이 그림은 우리가 없는 세상의 모습이다. 단순히 우리를 제외한 공간이 아닌, 우리를 비워낸 공간인 것이다. 세피아색 벽에 떨어진 노란색의 바랜 빛은 그 순간성의 마지막 장면場面을 상연하는 듯하니, 그만의 완벽한 서사도 이제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호퍼의 그림에 대한 ‘스트랜드라는 시인의 특별한 시각을 담은 책’이라고 한 <옮긴이의 글>까지 마저 읽고, 책머리부터 다시 후루룩 그림들을 훑어본다. 여러 날 여러 번 보았는데도 역시 “호퍼의 그림은 무척 낯익은 장면들이지만, 볼수록 낯설고 심지어는 완전히 생소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오래 들여다보는 그림이 있다. 


<바다 옆의 방>(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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