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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촌여전 - 열다섯 겹의 여성 로컬 라이프
상주함께걷는여성들 기획 / 지식의편집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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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천여전>에 밑줄 긋기- 김효근


전미희 선생님(호미 끝 세상)

“부드러운 흙을 호미로 살살 파내 골을 내고 당근 씨 솔솔 뿌리다 절로 꿀리는 무릎, 호미 농사라고 비웃어도 호미만큼 가장 낮은 자세로 자연을 접하는 기구가 또 어디 있으랴? 오늘도 모든 씨앗을 품은 엄마 같은 흙을 만지며 그동안 잊었던 감사기도를 드린다.”


노니 선생님(보통 날의 서점)

“나도 취향이 담긴 공간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분 좋은 인사였다. ”심미적 자극을 받을 만한 공간이 없다고 하시지만, 여긴 원형 그대로의 자연이 있잖아요.“ 진심이지만 뻔한 대답에 손님이 조금 감탄한 듯 대답했다. ”와! 상주가 누군가에겐 뭔가 ‘있는 곳’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해요. 저에겐 아무것도 ‘없는 곳’이거든요.“


곽경미 선생님(작아야 보이는 것도 있다)

”일찍 오신 선생님들과 함께 아이들을 맞으러 나간다. 학교 밖 버스 승강장에서 아이들을 기다린다. 승강장 옆은 논이다. 그루터기만 있는 논에 어느새 물이 들어오고, 벼가 자라 푸르르다 누렇게 익은 가을이 오고, 눈으로 하얗게 덮이는 걸 보면서 아이들을 기다린다. 버스가 도착하고 아이들이 내린다. “안녕?”, “안녕하세요!”, “오늘 못 보던 파란 운동화 신었네. 멋지다!”, “네! 어제 누나가 사 왔어요.”, “서울서 직장 다니는 누나가 어제 왔구나. 좋았겠다.” A는 누나가 와서 저녁에 외식한 것부터 오만가지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재잘거리는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학교로 들어오는 이 시간은 일과 중 가장 소중하고 기분 좋은 시간이다. ‘B가 오늘 기분이 안 좋네. 집에 무슨 일 있나?’, ‘어제 수학시험 때문에 속상해하던 C가 기운을 차렸네’ 아이읃ㄹ의 표정을 마음에 메모한다.“


황진영 선생님(논 피자 고양이)

”삽으로 땅을 파 그 작은 몸을 누이고 천천히 흙으로 덮으며 너무 짧은 생이 안타까워 눈물이 났다. 애써 참지 않고 소리내 울어도 되는 것. 이곳에서의 삶이 허락한 시간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상주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때문에 순간순간 나는 더 큰 행복과 더 깊은 슬픔을 느낀다. 이것도 축복이다.“


김주애 선생님(지역이란 오래된 이야기)

어느 날 도시의 삶을 포기하고 지역에 사는 이를 만난 적이 있다.

”여기는 없는 것이 많아서 참 좋아요.“

무슨 말인가 싶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없다는 건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거잖아요.“

그 말이 심장을 쿵 울렸다.

사실 지역은 없는 것이 많고 도시보다 불편해서 견디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말은 내 생각이 틀렸음을 지적했다.

‘아 그렇구나! 없다는 건 실패와는 다른 거구나!’”


파도 선생님(작은 실험의 기록)

“가장 자주 하던 고민은 이런 것이었다. ‘조금 다른’이라는 수식이 붙는 나의 삶. 그런 특별한 수식어가 방해될 때가 있었다. 따로 튀지 않고 다른 이들과 비슷하게 고만고만한 고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 하지만 동시에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따라왔다. 내 삶의 방식에 ‘조금 다른’이라는 수식이 붙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때도 분명 있었다.

또 내 삶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남의 삶을 부정하던 시절도 분명히 있었다. 내가 무언가 잘못 선택한 것 같고 후회가 될 때 나를 다시 세우기 위해 비교라는 잘못된 도구를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놓친 어린 생각이었다. 누군가 나와 내 길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때가 가장 싫으면서 결국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나의 다양한 우울을 잠재우는 방법은 쓰는 것이었다. 마구 쓰다 보면 비로소 가벼워진 내 모습이 보였고 가벼워진 나는 스스로에게 거리를 두고 조금 떨어져서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우울과 고민은 그제야 작아지고 덜 아팠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나를 위해서 썼다.”


변영진 선생님(소도시의 온도)

“대대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곳인 만큼 상주에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길러내는 땅의 느낌이 있다. 관광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그곳에 깃들여 사는 사람과 생활 속 자연이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어딜 가나 밭이고 계절마다 변화하는 모습들이 있다. 봄이 되어 갈라놓은 땅의 부드러움, 여름의 뜨거움 속에 익어가는 곡식들, 가을이면 펼쳐지는 황금빛 들판과 푸근한 감의 빛깔들, 쉼과 기다림을 알려주는 겨울 풍경들. 같은 자연이라도 지역마다 다양한데, 상주의 자연은 무심하면서도 성실하게 생명을 만들어온 아주 오래된 흐름을 느끼게 한다. 상주의 자연이 주는 큰 선물의 하나는 음식이다. 시골은 바로 지역에서 길러내는 것들을 먹을 수 있어서 과일도 나무도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그냥 신선하고 맛이 좋다, 그런 차원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늘 함께하는 산과 들의 음식들을 받아먹고 사는 느낌이랄까? 마트나 식당에서 다양하게 잘 차려지 음식을 사 먹는 것과는 다른 만족감이다.”


박현정 선생님(더도 덜도 말고 오늘처럼)

“우리 부부는 늘 ‘아이들이 우리의 스승이다’라는 말을 했다.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아이들을 통해서 보았고, 엄마도 아빠도 처음인 우리가 이렇게 예쁘고 건강하게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던 건 우리의 힘이 아닌 아이들의 힘이라는 생각도 했다. 나의 기준과 시선으로 아이들을 묶지 않고 온전한 한 생명체로 인정하며 존중하는 것! 우리 스승들이 알려준 가르침이었다. 우리는 이미 두 명의 스승을 모시고 있으나 스승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이제 한 명의 스승을 더 모시게 되었으니 더 많은 걸 배우겠지. 그런 기대와 함께 우리는 5인 가족이 되었다.”


정숙정 선생님(음식 할매 연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되뇌었다. 밥 짓느라 손이 마르지 않는 엄마, 그러면서도 아무에게나 밥 퍼주는 엄마, 그렇게 베풀어도 인사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엄마 모습을 닮기 싫었다. 우리 집 밥상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숟가락만 들면 모두가 식구였다. 한번은 허름한 행색의 어른 한 분이 안방에 쑥 들어와 앉았다. 엄마는 김이 나는 쌀밥 한 대접과 고갱이만 뚝 자른 김치 한 포기를 바가지에 담아 방에 넣어주었다. 낯선 어른이 커다란 밥숟가락에 벌건 양념이 떨어지는 김치를 척 걸쳐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 대접을 먹어치웠다. 그분은 아무 연고도 없는 그저 매우 허기진 사람이었다.”


김혜련 선생님(함꼐하는 공부는 힘이 세다)

“공부에서 글쓰기와 듣기는 필수 요소다. 공부가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언어가 생겨야 한다. 모든 공부의 종착점이 글쓰기라고 하는 이유다. 씀으로써 생각이 정리되고, 새롭게 탐구되고, 확장된다. 글쓰기를 하려면 텍스트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내 경험으로는 책 한 권을 세 번은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건성으로 한 번 읽고 다 안다고 생각하면, 공부를 통해 삶의 변화를 얻기 어렵다. 대충 아는 것으로는 자기 변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깊은 경청! 깊은 경청은 현대인인 우리에게 몹시 부족한 자질이기도 하다. 듣고 싶은 것만 듣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골몰하면서 제대로 듣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 이야기를 진실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구성원의 이야기를 ‘깊이’ 경청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래야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보거나 느끼게 되고, 타인을 통해 배우게 된다. 자칫하면 공부가 내가 아는 것만을 계속 확인하면서 나의 세계관에 갇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남수영 선생님(기억이라는 이름의 축제)

“백원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생업이 따로 있고, 가능한 만큼 자신의 시간과 수고를 내놓는 사람들이다. 문화기획 전문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축제를 기획하는 전문가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유명한 가수를 초청하는 지역축제들에 비하면 어설프기 짝이 없고 부족한 것도 많다. 의견을 모아서 실행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 점에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백원장의 특성이고, 우리가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말을의 축제를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지역의 화려한 플리마켓이나 행사들을 보면 부러울 때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이 너무 힘들지 않게, 즐겁고 길게 지속하는 것을 더 큰 가치로 삼고 우리의 속도와 우리의 방식으로 함께하기를 바란다.”


정경해 선생님(공감이라는 치유)

“아픔이 없는 삶이 있을까. 수강생들은 각자 자시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회한에 젖었다. 일상에서 살짝 비껴있는 것 같지만 불쑥불쑥 나타나 정신을 헤집는 상처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어린 시절, 또는 젊은 시절부터 쌓인 아픔은 환갑이 넘어도 잊히지 않았다. 수강생들은 하루아침에 해소될 문자가 아니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럴 때도 뜰하는 잠시 눈빛이 흔들렸을 뿐 별말이 없었다. 끝내 마음을 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급해하지 않았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10강에 이르렀다.”


우경화 선생님(지금 우리가 걷는 한 걸음)

“나는 요즘 앎을 가져다준 암을 마주하며 내 안의 의사 선생님을 제대로 만나는 중이다. 당뇨 합병증을 팔 년을 고생하시다 환갑도 되기도 전에 가버린 아빠는 건강하게 제대로 잘 사는 것을 고민하게 해주셨고, 간암 발병으로 함께하게 된 엄마와의 시간들은 제대로 잘 죽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방법들을 알려줘도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인연대로, 생긴 모양대로 살다 간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사고로 일찍 떠난 형부와 십오 년 복막투석을 하다 얼마 전 훌쩍 가버린 언니, 그리고 앞으로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다 갈 남은 가족과 지인들. 세상 모두가 그렇게 우연같은 필연인 자신의 길을 살아내고 때가 되면 길을 떠난다. 나의 시간도 누가 뭐라 한들 내 생긴 대로, 인연대로 구르다 멈출 테니 다를 것도 없다. 내가 어떤 것을 깨우친들 내 생각만이 정답이 아님을 늘 기억하고, 지그 이 순간의 나를 놓치지 말아야겠다.”


박환순 선생님(귀농의 시간)

“하기 싫은 일도 꾸준히 하다 보면 싫은 마음 너머 여러 마음을 경험하게 된다. 아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많은 마음을 만나게 되면서, 행복이라는 것은 좋고 싫고의 마음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좋고 싫다는 마음의 고개를 몇 번씩이나 넘다 보면, 순간의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을 경험하게 된다. 나이를 먹고 수많은 시간의 고개를 넘어서, 좋고 싫고와 상관없이 그냥 하는 마음이 되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먼 시간을 지나다 보면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도 자연스레 배우게 된다. 머리로 지식으로 살기 보다는 삶의 기 시간이 주는 지혜를 배우고 익히게 된다. 그래서 엄마처럼 그냥 하는 일이 많아진다. 더워도, 힘들어도, 하기 싫어도, 그런 마음에 출렁이지 않고 그냥 하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내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것인가 보다.”


김정열 선생님(봉강의 사계)

“봄은 나물로 온다. 찬 겨울바람이 채 가시기 전이지만 정월 대보름만 지나면 괜히 마음이 들떠 호미 들고 텅 빈 들판이라도 한 바퀴 돌고 싶어진다. 땅속의 작은 틈에서 조금씩 조금씩 올라오는 바람, 봄바람 때문이다. 아직 녹지 않은 땅이지만 고개를 숙이고 자세히 살피면 자줏빛 냉이가 더러더러 보인다. “앗싸, 봄이다!”

봄이 되면 어깨에 농사일만 주렁주렁 달리지만 그래도 봄이 좋다. 봄이 되면 농민이 살아난다. 농민은 땅이 춤출 때 살아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맛있는 나의 봄은 1991년 시작되었다. 처음 상주에 내려온 그해 4월, 내 손으로 처음 쑥을 뜯었다. 쑥이 어떻게 생긴지도 잘 몰랐던 터라 얹혀살던 농민회장 사모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봄을 배웠다. 쑥은 양지쪽부터 올라오는데 마을 누구네 논둑에 가면 제일 빨리 올라온다, 쑥을 캐면 바로 다듬어 바구니에 넣어야 뒷일거리가 적다, 쑥국을 끓일 때는 마지막에 밀가루를 개어 넣어야 빡빡하니 맛있다 등 쑥에 대한 모든 것을 그분에게 배웠다. 삼십 년도 더 지난 지금, 내가 그분 나이가 되었고 그분은 팔십 넘은 할머니가 되셨지만 지금도 여진히 나의 봄 선생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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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촌여전 독자 소감 전문 - 김효근

안녕하세요?

낙서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김효근 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귀한 자리에 저 같은 사람을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분이신 김혜련 선생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주셔서 이 자리를 제안해 주셨습니다. 마침 그때 제 손에 이 책이 들려있었고, 또 책을 감동하며 읽었던 터라 얼떨결에 그 제안을 수락해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많이 후회했습니다. 제가 이런 자리에서 말할 성격이 못되기도 하고, 또 자격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제안하신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아마도 상주에서 살아온 남자 사람이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나눠달라는 뜻이신 것으로 저는 받아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냥 제가 어떻게 읽었는지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의미 있는 나눔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저는 이 책을 쓰신 분 중 몇몇과 같이 공부 모임을 하고 있는데, 공부 모임은 항상 '시'를 읽으며 시작합니다. 오늘도 시 한 편을 읽고 시작하고 싶습니다.

떨었는거

김순옥

잘 때 추워서

떨어서

거지 생각 하였다.

(1962. 11. 23.)

이 책에 실려있는 시입니다. 이오덕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상주 청리초등학교 아이들이 쓴 시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상주로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선물하곤 하는 책입니다. 유시민 작가님께서는 '글쓰기 특강'이라는 책에서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글 바로 쓰기>를 꼭 읽어볼 것을 권하시면서, 그 책이 못난 문장에 물들지 않도록 하는 '백신'이라고까지 표현하셨습니다. 교육자이자, 우리말 연구가이셨던 이오덕 선생님께서 내가 사는 상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셨다는 사실이 뿌듯해서 지인들에게 자랑하듯 선물하는 책입니다. 이 외에도 권정생 선생님께서 상주를 생각하시며 쓰신 '복사꽃 외딴집'이나, 상주 도서관에서 심심치 않게 뵐 수 있는 김수박 작가님께서 쓰신 '문밖의 사람들' 같은 책들도 자랑스럽게 선물하곤 합니다.

그리고 이제 선물할 책이 한 권 늘었습니다. 사실 벌써 한 권 선물했습니다.

.......

저는 상주 토박이입니다. 상주에서 어린이집,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지역아동센터를 다녔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지역아동센터 센터장님께서 저에게 해 주셨던 말씀은 지금도 시인의 경구처럼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말씀들입니다. '이 지역아동센터를 거쳐 간 아이들이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 편히 찾아올 수 있도록 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싶다.' 제가 다닌 센터는 2005년에 지역아동센터 시설 신고를 했으니, 올해로 20주년이 됩니다. 흰머리가 늘어가시는 센터장님을 보면 마음이 아릴 때가 있습니다.

센터장님의 말씀을 다르게 변주해보자면 '모항이 있는 배가 멀리 간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의 교육학자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께서 쓰신 '완벽하지 않을 용기'라는 책에서 읽은 문구입니다. 어머니 '모'자를 쓰는 모항은 어떤 배의 근거지가 되는 항구를 말합니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은 이렇게 쓰셨습니다. "모험 여행을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는 것은 돌아올 장소를 갖고 있어서다. 여행과 모험으로 성숙을 이룬 사람들이 자신의 성숙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모항을 통해서이다. 자신이 그동안 무엇을 해왔는지, 자신이 어떤 인간으로 거듭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모항에 돌아갈 필요가 있다."

저에게 상주는 모항입니다. 저는 힘들고 어려울 때 상주에 있는 가정, 학교, 지역아동센터를 찾아가 도움을 구했습니다. 제가 지금 어느 정도까지 와있는지,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상주에 계시는 이분들 덕분에 이 정도나마 스스로 설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도 저의 모항이 몇 분 계십니다.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나눌만한 음식이 생기면 저에게 전화를 걸어 잠깐 집 앞으로 잠깐 나오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저 역시 그 모항에서 새로 출발하려는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집 앞으로 잠깐 나오라고 하곤 합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제가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내 모항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고향의 목소리에, 모항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라는 말처럼 중심지가 아니면 뒤처진다는 생각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주에서도, 상주도 나름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역사학자 함석헌 선생님께서는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책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살려 주시기 때문이다. 살려 주시는 것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증거다.' 함석헌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하시며, 그 고난 속에서 한국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상주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런 모양으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주가 서울과 같지 않은 이유는, 상주 나름으로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도시가 서울과 같다면 우리나라는 숨 쉴 틈이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어쩌면 상주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서관에는 사람이 많아야 좋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은 '도서관에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는 짧은 강연을 하셨습니다. 도서관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은 도서관은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가르쳐 주는 장소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도서관이란 들어서면 경건한 마음이 드는 장소입니다. 세계는 미지로 가득한 곳이라는 사실에 압도당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그 점에서 기독교의 예배당과 이슬람의 모스크, 불교의 사원 혹은 신사와 아주 비슷합니다. (...) 만약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교회 예배당을 '노래 교실'이라든지 '자산 운용 설명회'라든지 '재고 상품 세일 장터'로 빌려주면 어떻게 될까요? 이용자들이 떠나고 난 뒤 기도를 하러 예배당에 온 사람들은 "이게 뭐지? 뭔가 공기가 흐트러져 있어."하고 느낄 것입니다.’

상주가 해야 할 일이 꼭 지방소멸 도시를 극복하고 대도시로 거듭나는 것이어야만 할까요? 어쩌면 상주는 소멸할 수도 있다고, 그것이 상주가 할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어떻게 소멸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도서관 복도에 있는 '상상 라운지'라는 공간을 좋아합니다. '상상 라운지'. 멋진 미래를 상상하는 일, 그런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앉아야 할 것 같은 그 공간에, 할머님들이 종종 앉아 계십니다. 할머님들께서 도란도란 도란 이야기 나누십니다. 농사일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하시다는 이야기, 똑같은 일 했는데 남자들보다 임금을 못 받으신 이야기. 도서관 문 닫는 시간에 맞춰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여 있으니 참 좋다. 맨날 노인정에 있거나 집에 있거나 할 텐데….” 상주의 미래를 상상할 때는 할머님, 할아버님들을 빼놓고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상주 밖의 소리보다 그분들의 소리에 집중해보면 어떨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

이제 두서없는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어제 한 천문학자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천문학은 정말 문학 같습니다. 듣다 보면 빨려 들어갑니다. 빛이 지구에서는 1초에 지구 둘레 일곱 바퀴 반을 도는, 매우 빠른 편에 속하지만, 우주는 너무 거대하다 보니 빛이 느리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안드로메다 은하에서 출발한 빛이 우리 은하 안에 있는 지구까지 오려면 250만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250만 년 전 안드로메다 은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커다란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는데 대부분 텅 빈 공간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텅 비어있냐면, 한 은하 안에는 별이 수 천억 개가 있는데, 그런 은하와 은하가 서로 만나면 충돌 없이 그냥 지나가거나, 서로 충돌하더라도 서로의 중력 궤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텅 빈 우주 공간이 아깝다고 별들을 꽉꽉 채워놓으면 아마 별들은 서로의 중력 때문에 서로 부딪히고 파괴되기를 반복할 것입니다.

비어있는 공간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공간이 뭘 자꾸 채우려는 것보다, 이미 있는 것에 집중한다면…. 청리초등학교 어린이가 쓴 시에 나오는 것처럼, 추운 날 거지를 걱정할 수 있다면…. 주위 도움이 필요한 지역아동센터, 노인정 어르신들, 그런 사람들에게 눈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러면 상주가 더 상주다워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더 가난하지만,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동화 같은 상상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 덧붙여 두 가지 방법을 고민하다가 첫 번째 방법으로 발표했는데...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책에서 제가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을 줄줄 읽는 방법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독자 소감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올려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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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비빌 언덕이 필요해 - 서로를 돌보며 존엄한 삶을 가꾸다
최정은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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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장마다 감탄하며, 밑줄 그으며,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가끔씩 내가 읽는 책이 무슨 책이지? 다시 반문하게 되었어요.

윙이라는 사회복지원의 ‘시혜’의 역사를 보게 될 줄 알았는데,

탐구와 성찰, 실천의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복지를 시혜로 여기지 않고 ‘한 존재의 삶의 존엄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물어온 윙의 대표 최정은과 

그의 동료들이 함께 이루어온 특별한 성취를 보았습니다. 

최정은은 사회복지사업가가 아니라 탐구자이자 구도자, 수행자였습니다.


‘배우고 변해야 하는 사람이 오직 친구들(윙에 입소한 피해자 여성들)뿐인가라는 큰 질문’(78면)은 많은 것을 새롭게 바꾸었군요! 친구들의 ‘무기력하고’ ‘무거운 몸’을 바꾸기 위해 대표와 활동가, 친구들이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앉아서 공부하고, 십년 간 매 주 한 번씩 산행을 함께 하고, 같이 밥을 하고, 함께 창업을 하고, 셰어하우스를 꾸리는 그 모든 과정이 ‘함께’였습니다.


대단하다, 대단하다....계속 감탄하며 도대체 최정은의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묻게 되었어요. 계속 실험하고, 깨닫고, 공부하고, 탐색하고 반성하고, 다시 길을 가는 그 도전의 힘, 그 지속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책을 다 읽고 나서 그 힘은 ‘일상의 힘’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수도 없이 밥상을 차린 힘으로 누군가의 밥상을 차려주는’(113면) 힘, ‘자활은 자격증이나 취업여부로 증명되는 게 아니라 일상을 얼마나 잘 꾸릴 수 있는가가 자활의 기준’(120면)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하루하루 싸워온’(120면) 그 힘, ‘일상의 위대한 혁명’(120면)에서 온 게 아닐까? 그러기에 그는 피해자 여성이 아닌, 한 인간을 만날 수 있었고, 자신과 그들의 삶을 평등한 여성의 삶으로 여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 일상의 힘을 알려준 것이 인문학 공부였다는 사실도 눈에 크게 띄었습니다. 인문학 공부가 왜 ‘아래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하는지를 시사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일상을 하찮게 여기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온 이래 그 역사를 반성하게 되는 힘은 역설적으로 다시 인문학에서 나오는 거라고요.


밥을 ‘가족 로망스 안에 가두지 않고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에게 필요한 자주적 행위로 인정해야겠다.’(110면)며 친구들과 함께 밥을 해서 먹는 윙의 성취는 드문 성취고 소중한 성취입니다. 밥을 가족으로부터 개인으로, 그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윙의 성취를 사회의 다양한 단체나 시설들에서 함께 이루어가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까 생각했습니다.


최정은은 ‘비덕’이라고, 스스로를 비빌 언덕으로 비유했지만 책을 읽고 나니 큰 산을 본 느낌입니다. 그저 바라보는 장대한 산이 아니라 숱한 나무와 풀과 꽃, 시냇물과 동물들을 품고 있는 다정한 산, 그 품에 누구든 안길 수 있는, 제가 좋아하는 지리산을 본 느낌이었어요.


책 자체도 아름답습니다. 표지는 다정하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신화적인 느낌도 들고요. 구성도 참 좋아요. 여성과 집, 여성과 공부, 여성과 일, 여성과 우정. 각 장마다 빛나는 경험들이 차곡하게 쌓여있습니다. 글 솜씨도 돋보입니다. 얼마나 많은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있을까? 그것을 수없이 가지치기하고 간결하고 힘 있게 썼습니다.


최정은과 그의 동료들, 친구들이 이루어낸 이 따뜻하고도 대단한 성취를 우리 모두 나누어 가지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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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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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는다. 심각한 병의 ‘끝까지 가라앉은 다음 다른 편에 있는 삶을 발견한’ 자가 보고 느낀 것을 말하는 걸 듣는다. 극도의 고통을 지나온 몸의 과정, 냉정하도록 예민한 관찰을 듣는 건 힘들다.

그가 말하는 영역을 굳이 나누자면 네 영역이다. 1. 아픔을 통해 다다른 어떤 깨달음, 영적인 측면, 2. 돌보는 자와의 관계, 돌보는 이의 삶, 3. 아픈 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4. 의료진들- 의사와 간호사, 의료체계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질병과 고통이 깊었던 것만큼이나 그의 깨달음 또한 깊다. (그것이 관념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겪은 삶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그가 깨달은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살면서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별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것, 이를테면 삶의 취약성이나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의 온전함 등등이다.

그가 통증의 극단에서 아내의 잠을 자기 삶의 질서로 느끼고, 자유롭게 달리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축하하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얼얼해진다. 대부분의 고통은 안으로 움츠려들게 한다. 그런데 그는 고통을 통해 타 존재와 세상을 향해 열린다. 그의 언어는 수동적인 듯, 정적인 듯 고요하다. 분노를 말할 때조차도. 인간의 비극성을 깊이 체험한 자가 인간 세상에 갖는 자慈와 비悲를 느끼게 한다. 불교적 언어 같기도 하다. 불교의 모든 언어는 고통과 자비의 언어라 할만기에.....

이런 자기 확장은 평소의 그의 삶의 태도를 짐작케 한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생각하게 하는 한 대목이기도 하다.

그가 목격한 사람들, 아픈 자를 대하는 자들-의사, 간호사, 돌보는 이들, 친구, 지인,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주변에서 보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 일반적 모습이 몹시도 잔인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효율성과 바쁜 업무 때문에, 느려지면 뒤처지기 때문에, 삶을 직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환상 때문에, 무지 때문에, 무관심 해서......잔인해지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인간이 무엇인지, 어떻게 인간이 되는지에 대해 아픈 자의 경험에 귀기울이고 들어야 한다. 들어야할 자들, 들어야할 세상, 사회 속에 내가 있다. 나와 다른 자, 특히 약한 자, 고통 속에 있는 자들에 대해 얼마나 쉽게 단정하고 매도하고 잊어버리고 사는지, 산다는 게 이리 잔인한 일인지, 그 인식에 도달하면 난감하다.

어쩌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 이기적이고 잔인한 모습 속에 나 또한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몇 줄 쓰면서 희석시키고 말 것이기에 부끄럽다. 그러나 또한 말함으로써 자신이 변해가는 훈련을 하고자 하는 나를 격려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가 먼지 같은 삶을 이야기할 때, 먼지이기에 더욱 세상이 소중하다는 그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그의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어서 확장된 의식을 보면서 어떤 환희심을 느끼게 되듯, 나 또한 깨어서 넓어지는 나를 살아가고 싶다. 삶이 취약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할 때 그렇게 되지 않을까?

  

‘야망이나 계획을 좇느라 이 세계의 연약한 아름다움이 오로지 삶의 배경이 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랐다. 나는 늘 강가를 걸을 것이다. 언제나 하는 짧은 기도를 하고 나무와 물이 품고 있는 지혜가 나를 만지게 할 것이다. 그 세계의 일부인 나 자신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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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를 읽으며 떠오른  풍경

 

하루 종일 가을비가 내렸다. 소리도 없이 줄기차게 내리는 비.

비오는 풍경 속에는 많은 것들이 녹아 있다.

기와지붕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지는 빗소리,

마당에서 올라오는 흙냄새,

축축하게 젖어드는 돌담,

창호지에 비치는 반투명의 어둑한 빛,

비를 피해 달아나는 작고 어린 생명들...

이런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새 비는 내 안에서 내려

가슴은 축축이 젖어 둥글어지고 무너져 열린다.


이 글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글이 내 안에 와서 가만히 나를 적시고

나를 조용히 무너져 열리게 했다.


2


이것은 거의 직관적으로 온 느낌이다.

그 느낌의 정체를 설명하자면 그의 글이 지닌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우선 그의 글에는 놀랍게도(!) 자의식이 없다.

대부분의 저널리스들의 글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자의식,

‘나의 글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자의식, 일종의 권력욕이 그의 글에는 없다.

그 어떤 글보다 자의식이 넘쳐날 수 밖에 없어 보이는 사안들을 다루는 그의 글에 자의식이 없다! 그의 글은 자의식을 넘어가 있다. 그래서 비처럼 스며든다.

자의식 없는 글은 오랜 숙련 끝에 다다르는 대가들의 글에서 만나게 되는 귀한 성취다. 삼십대의 그가 자의식을 넘어선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일종의 경이다! 쉽지 않은 자기단련과 성찰의 경지다.


무엇보다 그의 글에는 객관성을 가장한 객관이 아닌, ‘진정한 객관성의 힘’이 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가능한 한 존재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마치 그 존재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낯설고 특수하고 불편한 어떤 것들에 대해 대부분의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 자기 방어를 한다. ‘무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다. 내 일이 아니라 특수한 존재들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우리를 설득해 내는 것은 강한 자기 주장이 아니라 바로 ‘진정한 객관성의 힘’인 것이다. 이 힘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깊이 있게 구체적으로 오래 공부한 자가 얻는 힘이고,

자의식을 넘어서 대상과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간 자의 힘이고,

자신의 한계를 명료히 알면서 깊은 통찰에 이른, 잘 벼린 지성의 힘이다.


이런 힘은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을 때 단련될 수 있는, 자기 수련에서 나올 것이다.

이 ‘객관성의 힘’은 ‘성적 소수자’나 ‘집 나온 십대 소녀’가 내 앞에 와서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공감을 불러낸다. 겉으로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것 같아도 다 읽고 나면 그 안에 따뜻함과 희망이 있다. 잔잔하면서도 큰 힘이다. 격렬한 고요함, 불의 얼음 ‘잉걸’이다.


객관의 미덕은 이상적 저널리스트의 미덕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이것에 익숙지 않다. 많은 글에는 은연중에 ‘좋고’ ‘싫음’이 드러난다. 많은 저널리스트의 글은 마치 자기 회사나 집안에서 일어난 일인 것처럼 ‘편 가르기’를 한다. 자기 시선을 일방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니 사태의 진상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객관성을 가장한 자기 이념의 설파인 글들  많다. 우리 사회의 많은 지식인은 마치 자신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절대적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듯, 자신이 세상을 떠난 신의 위치에 있는 듯한 자세로 글을 쓴다. 그런 글은 객관성의 가면을 쓴 자기 주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지식인의 글은 정교하고 잘 다듬어진 문체로 유명하고, 그의 글이 갖는 흡인력은 대단하지만 다 읽고 나면 칙칙하고 허무적이다. 객관적인 것 같지만 대상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자신의 허무주의를 설파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뿐. 그의 객관적 태도 속에는 대상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나 애정을 보기 어렵다.

자신의 가치 판단을 명확히 하면서 대상을 다각적으로 깊이 바라보는 ‘진정한 객관성의 힘’은 웬만해서는 갖추기 힘든, 특히 복잡한 사회문제를 다룰 때는 더더욱 어려운, 뛰어난 미덕이다.  


그의 글이 갖는 또 다른 시대적 의미가 있다. 사회적으로 보면 우리의 70, 80년대는 누구나 어느 편에 들어가서 싸워야 하는 시대, 격렬하게 치고받아야만 하는 시대였다. 그의 글은 그런 시대의 한계에서 벗어난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글이다. ‘냉철한 내면적 자기성찰’의 글이다. 대부분의 조직이나 지식인이 아직도 치고받고 싸우거나 그 시절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냉철한 성찰적 글들이 힘을 갖지 못한다. 이게 계속되면 그 사회는 망한다.


그의 글은 글에 대한 신뢰를 자꾸 잃어가는, 글이 뭘까 자꾸 회의하게 되는 내게 여전히 글이 주는 힘을 보여준다. ‘쓴다’는 행위가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그것도 깊이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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