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비빌 언덕이 필요해 - 서로를 돌보며 존엄한 삶을 가꾸다
최정은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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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장마다 감탄하며, 밑줄 그으며,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가끔씩 내가 읽는 책이 무슨 책이지? 다시 반문하게 되었어요.

윙이라는 사회복지원의 ‘시혜’의 역사를 보게 될 줄 알았는데,

탐구와 성찰, 실천의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복지를 시혜로 여기지 않고 ‘한 존재의 삶의 존엄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물어온 윙의 대표 최정은과 

그의 동료들이 함께 이루어온 특별한 성취를 보았습니다. 

최정은은 사회복지사업가가 아니라 탐구자이자 구도자, 수행자였습니다.


‘배우고 변해야 하는 사람이 오직 친구들(윙에 입소한 피해자 여성들)뿐인가라는 큰 질문’(78면)은 많은 것을 새롭게 바꾸었군요! 친구들의 ‘무기력하고’ ‘무거운 몸’을 바꾸기 위해 대표와 활동가, 친구들이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앉아서 공부하고, 십년 간 매 주 한 번씩 산행을 함께 하고, 같이 밥을 하고, 함께 창업을 하고, 셰어하우스를 꾸리는 그 모든 과정이 ‘함께’였습니다.


대단하다, 대단하다....계속 감탄하며 도대체 최정은의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묻게 되었어요. 계속 실험하고, 깨닫고, 공부하고, 탐색하고 반성하고, 다시 길을 가는 그 도전의 힘, 그 지속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책을 다 읽고 나서 그 힘은 ‘일상의 힘’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수도 없이 밥상을 차린 힘으로 누군가의 밥상을 차려주는’(113면) 힘, ‘자활은 자격증이나 취업여부로 증명되는 게 아니라 일상을 얼마나 잘 꾸릴 수 있는가가 자활의 기준’(120면)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하루하루 싸워온’(120면) 그 힘, ‘일상의 위대한 혁명’(120면)에서 온 게 아닐까? 그러기에 그는 피해자 여성이 아닌, 한 인간을 만날 수 있었고, 자신과 그들의 삶을 평등한 여성의 삶으로 여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 일상의 힘을 알려준 것이 인문학 공부였다는 사실도 눈에 크게 띄었습니다. 인문학 공부가 왜 ‘아래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하는지를 시사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일상을 하찮게 여기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온 이래 그 역사를 반성하게 되는 힘은 역설적으로 다시 인문학에서 나오는 거라고요.


밥을 ‘가족 로망스 안에 가두지 않고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에게 필요한 자주적 행위로 인정해야겠다.’(110면)며 친구들과 함께 밥을 해서 먹는 윙의 성취는 드문 성취고 소중한 성취입니다. 밥을 가족으로부터 개인으로, 그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윙의 성취를 사회의 다양한 단체나 시설들에서 함께 이루어가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까 생각했습니다.


최정은은 ‘비덕’이라고, 스스로를 비빌 언덕으로 비유했지만 책을 읽고 나니 큰 산을 본 느낌입니다. 그저 바라보는 장대한 산이 아니라 숱한 나무와 풀과 꽃, 시냇물과 동물들을 품고 있는 다정한 산, 그 품에 누구든 안길 수 있는, 제가 좋아하는 지리산을 본 느낌이었어요.


책 자체도 아름답습니다. 표지는 다정하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신화적인 느낌도 들고요. 구성도 참 좋아요. 여성과 집, 여성과 공부, 여성과 일, 여성과 우정. 각 장마다 빛나는 경험들이 차곡하게 쌓여있습니다. 글 솜씨도 돋보입니다. 얼마나 많은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있을까? 그것을 수없이 가지치기하고 간결하고 힘 있게 썼습니다.


최정은과 그의 동료들, 친구들이 이루어낸 이 따뜻하고도 대단한 성취를 우리 모두 나누어 가지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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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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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는다. 심각한 병의 ‘끝까지 가라앉은 다음 다른 편에 있는 삶을 발견한’ 자가 보고 느낀 것을 말하는 걸 듣는다. 극도의 고통을 지나온 몸의 과정, 냉정하도록 예민한 관찰을 듣는 건 힘들다.

그가 말하는 영역을 굳이 나누자면 네 영역이다. 1. 아픔을 통해 다다른 어떤 깨달음, 영적인 측면, 2. 돌보는 자와의 관계, 돌보는 이의 삶, 3. 아픈 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4. 의료진들- 의사와 간호사, 의료체계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질병과 고통이 깊었던 것만큼이나 그의 깨달음 또한 깊다. (그것이 관념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겪은 삶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그가 깨달은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살면서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별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것, 이를테면 삶의 취약성이나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의 온전함 등등이다.

그가 통증의 극단에서 아내의 잠을 자기 삶의 질서로 느끼고, 자유롭게 달리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축하하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얼얼해진다. 대부분의 고통은 안으로 움츠려들게 한다. 그런데 그는 고통을 통해 타 존재와 세상을 향해 열린다. 그의 언어는 수동적인 듯, 정적인 듯 고요하다. 분노를 말할 때조차도. 인간의 비극성을 깊이 체험한 자가 인간 세상에 갖는 자慈와 비悲를 느끼게 한다. 불교적 언어 같기도 하다. 불교의 모든 언어는 고통과 자비의 언어라 할만기에.....

이런 자기 확장은 평소의 그의 삶의 태도를 짐작케 한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생각하게 하는 한 대목이기도 하다.

그가 목격한 사람들, 아픈 자를 대하는 자들-의사, 간호사, 돌보는 이들, 친구, 지인,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주변에서 보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 일반적 모습이 몹시도 잔인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효율성과 바쁜 업무 때문에, 느려지면 뒤처지기 때문에, 삶을 직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환상 때문에, 무지 때문에, 무관심 해서......잔인해지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인간이 무엇인지, 어떻게 인간이 되는지에 대해 아픈 자의 경험에 귀기울이고 들어야 한다. 들어야할 자들, 들어야할 세상, 사회 속에 내가 있다. 나와 다른 자, 특히 약한 자, 고통 속에 있는 자들에 대해 얼마나 쉽게 단정하고 매도하고 잊어버리고 사는지, 산다는 게 이리 잔인한 일인지, 그 인식에 도달하면 난감하다.

어쩌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 이기적이고 잔인한 모습 속에 나 또한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몇 줄 쓰면서 희석시키고 말 것이기에 부끄럽다. 그러나 또한 말함으로써 자신이 변해가는 훈련을 하고자 하는 나를 격려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가 먼지 같은 삶을 이야기할 때, 먼지이기에 더욱 세상이 소중하다는 그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그의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어서 확장된 의식을 보면서 어떤 환희심을 느끼게 되듯, 나 또한 깨어서 넓어지는 나를 살아가고 싶다. 삶이 취약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할 때 그렇게 되지 않을까?

  

‘야망이나 계획을 좇느라 이 세계의 연약한 아름다움이 오로지 삶의 배경이 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랐다. 나는 늘 강가를 걸을 것이다. 언제나 하는 짧은 기도를 하고 나무와 물이 품고 있는 지혜가 나를 만지게 할 것이다. 그 세계의 일부인 나 자신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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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를 읽으며 떠오른  풍경

 

하루 종일 가을비가 내렸다. 소리도 없이 줄기차게 내리는 비.

비오는 풍경 속에는 많은 것들이 녹아 있다.

기와지붕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지는 빗소리,

마당에서 올라오는 흙냄새,

축축하게 젖어드는 돌담,

창호지에 비치는 반투명의 어둑한 빛,

비를 피해 달아나는 작고 어린 생명들...

이런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새 비는 내 안에서 내려

가슴은 축축이 젖어 둥글어지고 무너져 열린다.


이 글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글이 내 안에 와서 가만히 나를 적시고

나를 조용히 무너져 열리게 했다.


2


이것은 거의 직관적으로 온 느낌이다.

그 느낌의 정체를 설명하자면 그의 글이 지닌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우선 그의 글에는 놀랍게도(!) 자의식이 없다.

대부분의 저널리스들의 글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자의식,

‘나의 글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자의식, 일종의 권력욕이 그의 글에는 없다.

그 어떤 글보다 자의식이 넘쳐날 수 밖에 없어 보이는 사안들을 다루는 그의 글에 자의식이 없다! 그의 글은 자의식을 넘어가 있다. 그래서 비처럼 스며든다.

자의식 없는 글은 오랜 숙련 끝에 다다르는 대가들의 글에서 만나게 되는 귀한 성취다. 삼십대의 그가 자의식을 넘어선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일종의 경이다! 쉽지 않은 자기단련과 성찰의 경지다.


무엇보다 그의 글에는 객관성을 가장한 객관이 아닌, ‘진정한 객관성의 힘’이 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가능한 한 존재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마치 그 존재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낯설고 특수하고 불편한 어떤 것들에 대해 대부분의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 자기 방어를 한다. ‘무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다. 내 일이 아니라 특수한 존재들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우리를 설득해 내는 것은 강한 자기 주장이 아니라 바로 ‘진정한 객관성의 힘’인 것이다. 이 힘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깊이 있게 구체적으로 오래 공부한 자가 얻는 힘이고,

자의식을 넘어서 대상과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간 자의 힘이고,

자신의 한계를 명료히 알면서 깊은 통찰에 이른, 잘 벼린 지성의 힘이다.


이런 힘은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을 때 단련될 수 있는, 자기 수련에서 나올 것이다.

이 ‘객관성의 힘’은 ‘성적 소수자’나 ‘집 나온 십대 소녀’가 내 앞에 와서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공감을 불러낸다. 겉으로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것 같아도 다 읽고 나면 그 안에 따뜻함과 희망이 있다. 잔잔하면서도 큰 힘이다. 격렬한 고요함, 불의 얼음 ‘잉걸’이다.


객관의 미덕은 이상적 저널리스트의 미덕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이것에 익숙지 않다. 많은 글에는 은연중에 ‘좋고’ ‘싫음’이 드러난다. 많은 저널리스트의 글은 마치 자기 회사나 집안에서 일어난 일인 것처럼 ‘편 가르기’를 한다. 자기 시선을 일방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니 사태의 진상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객관성을 가장한 자기 이념의 설파인 글들  많다. 우리 사회의 많은 지식인은 마치 자신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절대적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듯, 자신이 세상을 떠난 신의 위치에 있는 듯한 자세로 글을 쓴다. 그런 글은 객관성의 가면을 쓴 자기 주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지식인의 글은 정교하고 잘 다듬어진 문체로 유명하고, 그의 글이 갖는 흡인력은 대단하지만 다 읽고 나면 칙칙하고 허무적이다. 객관적인 것 같지만 대상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자신의 허무주의를 설파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뿐. 그의 객관적 태도 속에는 대상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나 애정을 보기 어렵다.

자신의 가치 판단을 명확히 하면서 대상을 다각적으로 깊이 바라보는 ‘진정한 객관성의 힘’은 웬만해서는 갖추기 힘든, 특히 복잡한 사회문제를 다룰 때는 더더욱 어려운, 뛰어난 미덕이다.  


그의 글이 갖는 또 다른 시대적 의미가 있다. 사회적으로 보면 우리의 70, 80년대는 누구나 어느 편에 들어가서 싸워야 하는 시대, 격렬하게 치고받아야만 하는 시대였다. 그의 글은 그런 시대의 한계에서 벗어난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글이다. ‘냉철한 내면적 자기성찰’의 글이다. 대부분의 조직이나 지식인이 아직도 치고받고 싸우거나 그 시절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냉철한 성찰적 글들이 힘을 갖지 못한다. 이게 계속되면 그 사회는 망한다.


그의 글은 글에 대한 신뢰를 자꾸 잃어가는, 글이 뭘까 자꾸 회의하게 되는 내게 여전히 글이 주는 힘을 보여준다. ‘쓴다’는 행위가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그것도 깊이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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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 - 세상과 사람과 미디어에 관한 조이여울의 기록
조이여울 지음 / 미디어일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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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를 읽으며 떠오른 두 풍경


<풍경 하나)


하루 종일 가을비가 내렸다.

소리도 없이 줄기차게 내리는 비.

비오는 풍경 속에는 많은 것들이 녹아 있다.

기와지붕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지는 빗소리,

마당에서 올라오는 흙냄새,

축축하게 젖어드는 돌담,

창호지에 비치는 반투명의 어둑한 빛,

비를 피해 달아나는 작고 어린 생명들...

이런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새 비는 내 안에서 내려

가슴은 축축이 젖어 둥글어지고 무너져 열린다.


이 글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글이 내 안에 와서 가만히 나를 적시고

나를 조용히 무너져 열리게 했다.


<풍경 둘>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져 아궁이에 불을 넣는다.

불을 때면 불이 어떻게 붙고, 타오르고, 사그라지는지 보게 된다.

잘 마른 나무와 젖은 나무,

낙엽송과 참나무,

자잘한 나무와 굵은 나무가 타는 모습은 제각각 다르다.

그런데, 어떤 나무든 가장 격렬하게 타오를 때는 불꽃이 없다.

불이 완전히 익으면 불은 마치 정지된 것 같다.

아주 격렬한데 고요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에 나오는 숲의 분노를 보는 것 같다.

숲의 분노는 거대한 포효로 나타나지 않는다.

분노는 깊은 고요함으로 나타난다.

진정한 분노가 무언지 보는 순간이다.


이 글이 그랬다.

그가 다루는 사건이나 상황은 뜨겁고 격렬하고 아픈데,

그것을 내놓는 언어는 이상한 평온한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 평정이 가장 격렬할 때 고요한,

가장 타오를 때 멈춘 것 같은

불꽃 얼음 ‘잉걸’처럼 느껴졌다


2


이것은 거의 직관적으로 온 느낌들이다.

그 느낌의 정체를 설명하자면 그의 글이 지닌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우선 그의 글에는 놀랍게도(!) 자의식이 없다.

대부분의 저널리스들의 글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자의식,

‘나의 글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자의식, 일종의 권력욕이 그의 글에는 없다.

그 어떤 글보다 자의식이 넘쳐날 수 밖에 없어 보이는 사안들을 다루는 그의 글에 자의식이 없다! 그의 글은 자의식을 넘어가 있다. 그래서 비처럼 스며든다.

자의식 없는 글은 오랜 숙련 끝에 다다르는 대가들의 글에서 만나게 되는 귀한 성취다. 삼십대의 그가 자의식을 넘어선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일종의 경이다! 쉽지 않은 자기단련과 성찰의 경지다.


무엇보다 그의 글에는 객관성을 가장한 객관이 아닌, ‘진정한 객관성의 힘’이 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가능한 한 존재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마치 그 존재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낯설고 특수하고 불편한 어떤 것들에 대해 대부분의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 자기 방어를 한다. ‘무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다. 내 일이 아니라 특수한 존재들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우리를 설득해 내는 것은 강한 자기 주장이 아니라 바로 ‘진정한 객관성의 힘’인 것이다. 이 힘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깊이 있게 구체적으로 오래 공부한 자가 얻는 힘이고,

자의식을 넘어서 대상과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간 자의 힘이고,

자신의 한계를 명료히 알면서 깊은 통찰에 이른, 잘 벼린 지성의 힘이다.


이런 힘은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을 때 단련될 수 있는, 자기 수련에서 나올 것이다.

이 ‘객관성의 힘’은 ‘성적 소수자’나 ‘집 나온 십대 소녀’가 내 앞에 와서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공감을 불러낸다. 겉으로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것 같아도 다 읽고 나면 그 안에 따뜻함과 희망이 있다. 잔잔하면서도 큰 힘이다. 격렬한 고요함, 불의 얼음 ‘잉걸’이다.


객관의 미덕은 이상적 저널리스트의 미덕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이것에 익숙지 않다. 많은 글에는 은연중에 ‘좋고’ ‘싫음’이 드러난다. 많은 저널리스트의 글은 마치 자기 회사나 집안에서 일어난 일인 것처럼 ‘편 가르기’를 한다. 자기 시선을 일방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니 사태의 진상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객관성을 가장한 자기 이념의 설파인 글들  많다. 우리 사회의 많은 지식인은 마치 자신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절대적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듯, 자신이 세상을 떠난 신의 위치에 있는 듯한 자세로 글을 쓴다. 그런 글은 객관성의 가면을 쓴 자기 주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지식인의 글은 정교하고 잘 다듬어진 문체로 유명하고, 그의 글이 갖는 흡인력은 대단하지만 다 읽고 나면 칙칙하고 허무적이다. 객관적인 것 같지만 대상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자신의 허무주의를 설파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뿐. 그의 객관적 태도 속에는 대상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나 애정을 보기 어렵다.

자신의 가치 판단을 명확히 하면서 대상을 다각적으로 깊이 바라보는 ‘진정한 객관성의 힘’은 웬만해서는 갖추기 힘든, 특히 복잡한 사회문제를 다룰 때는 더더욱 어려운, 뛰어난 미덕이다.  


그의 글이 갖는 또 다른 시대적 의미가 있다. 사회적으로 보면 우리의 70, 80년대는 누구나 어느 편에 들어가서 싸워야 하는 시대, 격렬하게 치고받아야만 하는 시대였다. 그의 글은 그런 시대의 한계에서 벗어난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글이다. ‘냉철한 내면적 자기성찰’의 글이다. 대부분의 조직이나 지식인이 아직도 치고받고 싸우거나 그 시절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냉철한 성찰적 글들이 힘을 갖지 못한다. 이게 계속되면 그 사회는 망한다.


그의 글은 글에 대한 신뢰를 자꾸 잃어가는, 글이 뭘까 자꾸 회의하게 되는 내게 여전히 글이 주는 힘을 보여준다. ‘쓴다’는 행위가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그것도 깊이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3


마지막으로 그의 글에 꽂아주는

공상 소설 같은 상상 하나!


‘십대들이 주도한 3.1운동’과

‘제주 해녀공동체의 역사와 삶’에 대한 발굴은

신선하고 힘이 있었다.

그 글들은 이상한 설렘과 상상력 같은 것으로 온다.


십대들과 그 십대를 닮은 할머니들이 신나게 벌이는 연대.

세상을 많이 겪어서,

정직하게 절망해서 그 절망을 넘어 선,

삶이 비극이라는 것을 이미 깊이 알아서 내적 평화에 도달한,

분노든 뭐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다시 십대처럼 철없는 싱싱한 할머니들과 

삶 자체로 천둥벌거숭이 십대들이 같이 뭔가를 하고, 놀 수 있는!


그런 근거도 없는

철없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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