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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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는다. 심각한 병의 ‘끝까지 가라앉은 다음 다른 편에 있는 삶을 발견한’ 자가 보고 느낀 것을 말하는 걸 듣는다. 극도의 고통을 지나온 몸의 과정, 냉정하도록 예민한 관찰을 듣는 건 힘들다.

그가 말하는 영역을 굳이 나누자면 네 영역이다. 1. 아픔을 통해 다다른 어떤 깨달음, 영적인 측면, 2. 돌보는 자와의 관계, 돌보는 이의 삶, 3. 아픈 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4. 의료진들- 의사와 간호사, 의료체계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질병과 고통이 깊었던 것만큼이나 그의 깨달음 또한 깊다. (그것이 관념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겪은 삶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그가 깨달은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살면서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별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것, 이를테면 삶의 취약성이나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의 온전함 등등이다.

그가 통증의 극단에서 아내의 잠을 자기 삶의 질서로 느끼고, 자유롭게 달리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축하하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얼얼해진다. 대부분의 고통은 안으로 움츠려들게 한다. 그런데 그는 고통을 통해 타 존재와 세상을 향해 열린다. 그의 언어는 수동적인 듯, 정적인 듯 고요하다. 분노를 말할 때조차도. 인간의 비극성을 깊이 체험한 자가 인간 세상에 갖는 자慈와 비悲를 느끼게 한다. 불교적 언어 같기도 하다. 불교의 모든 언어는 고통과 자비의 언어라 할만기에.....

이런 자기 확장은 평소의 그의 삶의 태도를 짐작케 한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생각하게 하는 한 대목이기도 하다.

그가 목격한 사람들, 아픈 자를 대하는 자들-의사, 간호사, 돌보는 이들, 친구, 지인,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주변에서 보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 일반적 모습이 몹시도 잔인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효율성과 바쁜 업무 때문에, 느려지면 뒤처지기 때문에, 삶을 직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환상 때문에, 무지 때문에, 무관심 해서......잔인해지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인간이 무엇인지, 어떻게 인간이 되는지에 대해 아픈 자의 경험에 귀기울이고 들어야 한다. 들어야할 자들, 들어야할 세상, 사회 속에 내가 있다. 나와 다른 자, 특히 약한 자, 고통 속에 있는 자들에 대해 얼마나 쉽게 단정하고 매도하고 잊어버리고 사는지, 산다는 게 이리 잔인한 일인지, 그 인식에 도달하면 난감하다.

어쩌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 이기적이고 잔인한 모습 속에 나 또한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몇 줄 쓰면서 희석시키고 말 것이기에 부끄럽다. 그러나 또한 말함으로써 자신이 변해가는 훈련을 하고자 하는 나를 격려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가 먼지 같은 삶을 이야기할 때, 먼지이기에 더욱 세상이 소중하다는 그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그의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어서 확장된 의식을 보면서 어떤 환희심을 느끼게 되듯, 나 또한 깨어서 넓어지는 나를 살아가고 싶다. 삶이 취약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할 때 그렇게 되지 않을까?

  

‘야망이나 계획을 좇느라 이 세계의 연약한 아름다움이 오로지 삶의 배경이 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랐다. 나는 늘 강가를 걸을 것이다. 언제나 하는 짧은 기도를 하고 나무와 물이 품고 있는 지혜가 나를 만지게 할 것이다. 그 세계의 일부인 나 자신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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