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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ㅣ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평점 :
: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의 글은 감상 한 편에 마음을 사로잡혀 읽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필력에 감탄하고 사유의 결에 반한 티가 역력한 감상이었지요. 오늘 소개할 책은 지난 1월 말 출간된 비비언 고닉의 신간 <짝 없는 여자와 도시>입니다.
❛도시의 군중에 관해 쓴 19세기 가장 위대한 작가 둘은 찰스 디킨스와 빅토르 위고였다. 두 사람은 급속히 발달되어가던 대도시 런던과 파리에서 군중의 의미를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일찍이 파악한 작가들이었다. (…) 나는 군중의 영속성을 떠올린다. 뉴욕은 나의 도시인 만큼이나 그들의 도시이지만 어느 누구도 이 도시를 더 가지진 못한다.❜ 108p
국내 번역서로는 세 번째, 비비언 고닉 선집으로는 두 번째인 이 작품은 2015년 발표된 에세이집입니다. 전작 <사나운 애착(1987)> 이후 무려 30여 년의 시간을 달려 독자에게 닿은 글인데요. 도시를 기점으로 교차하는 만남과 단상이 시공간의 성격을 변모시키는 방식이 놀랍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의 숲에서 시적인 언어로 사색했다면, 비비언 고닉은 뉴욕의 도시 한복판에서 산문적인 언어로 사색했다고나 할까요?
저자 비비언 고닉은 1970년대 여성운동을 취재하며 《빌리지보이스》의 전설적 기자로 이름을 알린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입니다. ‘작가들의 작가’로 불린다는 그의 이력은 더 읊지 않아도 이후 인용할 문장에서 충분히 설명될 것입니다.
잘 쓴 에세이의 매력은 글쓴이의 사색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흡수할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이를 남용하면 어설프게 훈수 두기 바쁜 자기개발서에 그치겠지만, 탁월한 에세이스트라면 그렇지 않겠지요. 비비언 고닉의 글은 완급 조절에 있어 독자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삶을 느끼는 방식은 결국 삶을 살아낸 방식일 수밖에 없다. / 뉴욕의 우정은 울적한 이들에게 마음을 내주었다가 자기표현이 풍부한 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는 분투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는 누군가의 징역에서 벗어나 또 다른 누군가의 약속으로 탈주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44p
브롱크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 글을 쓸 때도 뉴욕에 살고 있는 저자의 눈에 비친 도시는 천태만상의 풍경으로 이야깃 거리를 제공합니다. 첫사랑의 알싸한 기억을 담은 애러비(저자에게는 맨해튼)가 되었다가, 상실의 아픔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음을 널어 놓는 공간이었다가, 작은 호의에 덤덤한 감사로 흡족하기도 하고, ‘정다운 무관심’에 오히려 위로받기도 하는……. 그런 곳이죠.
도시가 사색의 공간이 된다는 건 멋진 일입니다. 무표정한 사람들이 떠내려가는 무채색의 공간이, 저자의 표현 하나하나에 색채를 부여받아 표정을 얻고 생명력을 뿜어내며 말을 걸어옵니다. 반드시 ‘도시’가 아니라더라도, 그곳이 ‘뉴욕’이 아니더라도, 오늘 처음 본 것처럼 낯설고 새롭게 보면서 사색의 숨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있다면 어디든 고닉의 뉴욕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상화된 타자로 인해 외롭지만, 쓸모 있는 고독 속에 스스로를 상상의 동반자 삼아 침묵에 생명을 불어넣고 지각 있는 존재라는 증거를 방 안 가득 채워 넣는 ‘내’가 있다. 이런 통찰의 기틀을 마련하는 법은 에드먼드 고스로부터 배웠다.❜ 184p
독서를 즐겁게 하는 두 번째 요소는 다양한 문학적 비유가 등장하는 부분입니다. 제목부터 그러한데요, 이 책의 원제 <The Odd Woman and the City>는 조지 기싱의 소설 <짝 없는 여자들(The Odd Woman)>에서 차용한 표현입니다. 책의 후반부에 저자가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한 글이 있습니다만, 이 제목의 의미를 다양하게 조명해 보는 것도 독자의 즐거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저자가 담아낸 뉴욕의 표정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Woman’이 ‘Human’의 함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조지 기싱의 소설은 또 어떤 의미를 감추고 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 될 거예요. 원작을 읽고 견주어 보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더없이 유익한 만남이 되겠지요.
❛앨리스는 여든다섯을 훌쩍 넘긴 나이로 진통제에 의존해 지내는 상태이긴 했지만, 그 진 빠진 모습은 대체로 육체보다는 정신에 기인한 것이었다. (…) 고도의 지성이 작동하자, 반송장 같던 사람이 생생한 활기를 되찾는 모습을 본다는 건 그야말로 마법이나 다름없는 변신을 목격하는 기분이 드는 일이었다.❜ 115p
독자를 붙드는 세 번째 요소는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에 대한 사색입니다. 저자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레너드’와 ‘어머니’ 외에도, 다양한 뉴욕의 친구들이 소개되는데요. 인상적인 만남을 갈피하는 것도 독서의 묘미입니다. 특히, 눈물이 찔끔 날 뻔할 때쯤 툭! 잘라버리는 저자 특유의 덤덤한 문체도 자꾸 보면 감동이고 매력이에요.
그중 필자의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만남이 바로 ‘앨리스’입니다. 노인 요양 시설에 들어간 이후, 지적인 대화의 부재로 사유의 수혈이 끊긴 채 시들어 있는 그를 보며 느꼈던 저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전해져와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의 소중함을 새삼 실감하는 장면이었어요.
❛우리는 계속 함께 걷는다. 나란히, 묵묵히, 끊임없이 형성 중인 서로의 경험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목격자로서. 대화는 언제까지고 깊어져만 갈 것이다. 설령 우정은 그렇지 않더라도.❜ 216p
독자에게는 비비언 고닉의 글이 고도의 지성을 작동시킬 대화 상대가 되어줍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소음보다 소통이 필요한 ‘짝 없는 사람들(The Odd Humans)’일지 모르니까요. 독자의 사색에 숨을 불어넣는 책, <짝 없는 여자와 도시>였습니다.
#도서제공 #문학동네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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