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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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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존 쉐이드, <창백한 불꽃> - 그림자 해석하기


이번에 읽은 존 쉐이드라는 이름의 다소 생소한 시인의 마지막 유작이라는 <창백한 불꽃>은 문학동네에서 번역되었고, 그 제목과 두께 때문에 먼저 손이 간 기이한 책이었다. 별도의 정보 없이 무턱대고 책을 펼쳤는데, <창백한 불꽃>은 그의 미완의 원고를 정리한 ‘서사시’와 그의 친구이자 편집자로서 이 원고를 정리한 찰스 킨보트의 주석들로 구성되어있고 이는 당시 미국에서 출판된 형식 그대로라고 한다. 

기이하게도 시 자체는 999행의 미완의 시였지만, 그 주석의 분량 때문에 시집치곤 무척이나 두꺼웠다.


5-60년대 미국에서 활동했다는 이 시인은 당대의 대가였던 로버트 프로스트류의 시인이라는데, 그런 배경을 알고 나서 읽은 탓인지 시인의 자연물을 이용한 다채로운 비유들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물론 존 쉐이드의 이 기묘한 장시는 얼핏 보기엔 전통적이고 때론 단조로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면서도 T.S. 엘리엇의 시들을 패러디하고 교묘하게 조롱하는 면 등은 현대적이게 보이게도 한다. 


<태양은 도둑이야, 그의 거대한 장관으로

광대한 바다를 강탈하지. 달도 순전히 도둑에 불과해,

그녀의 창백한 불꽃은 태양으로부터 낚아챘지.>

- 윌리엄 셰익스피어, <아테네의 티몬(타이먼)>


존 쉐이드가 아마도 제목으로서 인용한 인간혐오자 티몬의 대사는 말 그대로 이 시의 성격을 나타내는 듯싶다. <창백한 불꽃>은 결국 삶의 그림자를 탐구하며 자신에게 있지 않은 것을 교묘하게 훔치려는 한 삶의 회고록이다.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였다.

창유리에 비친 거짓 창공에 속은

나는 잿빛 솜털의 얼룩이었다 – 그럼에도 나는

계속 살아서 날아다녔다, 창유리에 비친 하늘에서.

집안에서도 마찬가지, 나는 둘로 만들곤 했다

나 자신을, 나의 램프를, 접시에 놓인 사과를.

-p.39, 창백한 불꽃>


존 쉐이드는 시의 시작을 다채롭고 교묘한 비유들로 독자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화려한 비유로 우리는 쉐이드가 말 그대로 '그림자', 그것도 죽은 이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모든 것을 '만들어야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신은 요절했다. 신을 숭배하는 것은

굴욕이며, 숭배의 전제도 부적절하다고 여겼다.

자유로운 인간은 신이 필요 없다. 하지만 나는 자유로웠던가?

-p.44, 창백한 불꽃>


형식을 제외한 주제나 그 표현만으로도 사실 <창백한 불꽃>은 괜찮은 시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시의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는 결국 살아가는 그림자의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다. 물론 여기엔 전적으로 쉐이드의 가정사가 깊게 관여되며 자연스럽게 죽은 황여새의 그림자는 자신의 삶을 토로하는 고백록을 작성한다.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였다

창유리에 비친 허위의 먼 풍경에 속은

나는 두뇌도, 오감(그중 하나는 남다른)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그저 굼뜬 괴짜였다.

-p. 45-46, 창백한 불꽃>



<삼단논법: 다른 사람들은 죽는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다.

공간은 눈 속에서 벌레처럼 들끓고, 시간은

귓속에서 노래를 부른다. 이 북새통에 내가

갇혀 있다.

-p.50, 창백한 불꽃>


그러나 창백한 불꽃을 써내려가는 존 쉐이드는 아직은 죽음과 마주하지 않았기에 결국엔 내내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묘한 사실은 그가 시의 마지막 부분에 와선 시를 쓰고 있는 자신과 마주하고, '999행'을 써내려갔을 때 실제로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작품 외적으로 더욱 아이러니하게 만든다.

이 책의 주석을 단 쉐이드 연구가 킨보트에 의하면, <창백한 불꽃>은 1000행으로 구성될 예정이었고, 그 마지막 행은 이 시의 첫 행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쯤에 와선 과연 쉐이드가 그 마지막 행을 불행한 사고가 없었어도 붙였을지 의문이 든다.

애당초 죽음이 오기 전의 삶에 관한 시라면, 그의 의도에 따라 미완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더 많은 부분도 고려의 대상이지만) <창백한 불꽃>은 한국 독자들에게 다소 생소한 50년대 미국 시인의 최후의 불꽃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즐길만한 멋진 장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본문인 <창백한 불꽃>만의 감상은 여기까지고, 난 책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두꺼운 분량의 주석을 차지하는 만큼, 난 이 시가 무척이나 난해하거나 레퍼런스적으로 흥미로운 면이 가득한 줄 알고 킨보트 박사가 붙인 주석을 하나하나 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읽을수록 이 책의 자칭 연구가는 시와는 관련 없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굳이 이런 부분까지 국내 번역판에 소개를 했어야했는지 의문이다. 

주석이란 무엇인가? 결국은 작품에 관한 해설이자 설명이고, 작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다. 

물론 킨보트 박사가 말 그대로 지껄이는 기이한 말들은 간혹 흥미롭기도 하였지만, 시와는 전혀 무관하였다. 차라리 자신만의 작품을 따로 쓰지, 괜히 남의 작품의 그림자에 숨는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는 나쁘지 않았지만, 나머지 부분에선 책과 상관없었으므로 너무나도 별로였다. 이쯤되면 킨보트 박사가 과연 저명한 존 쉐이드 연구자인지도 의심이 될 정도로.

아무튼 존 쉐이드의 다른 시집들도 소개된다면 읽어볼 의향은 있다. 물론 킨보트의 주석이 없는 녀석으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 진짜가 되려는 그림자의 날개


물론 이 책이 ‘시집’이고, 이 책의 저자가 정말로 존 쉐이드였다면 위와 같은 감상은 타당했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창백한 불꽃>은 킨보트의 서문, 쉐이드의 시, 킨보트의 주석과 미주로 구성된 나보코프의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처음 읽은 이후론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가장 사랑스러운 나보코프의 최고 걸작으로 남아있었는데, 드디어 문학동네에서 한국어역본으로도 다시 한 번 읽어볼 기회가 생겨서 무척이나 기뻤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독자인 내가 아는 나보코프라면, 과연 이 감상을 쓰는 것이 옳은지, 조금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내가 아는 나보코프라면, 고고하게 홀로 진짜 예술가로서 밑을 내려다보고, 독자들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며 특히나 킨보트 같은 독자들을 비웃을 테니까.

하지만 나 또한 수많은 킨보트들 중 한 명으로서 그라두스를 기다려야하지 않겠는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자연스럽게 나보코프의 또 다른 걸작이자 악명 높은 <롤리타>와 겹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정교하게 가짜 예술가였던 험버트 험버트와 퀼티를 처형시키는 나보코프의 그림자 아래에서 <창백한 불꽃> 또한 가짜를 처단하는 진짜 작가 나보코프의 놀이로 해석했다.

물론 지금도 이 해석 자체는 어느 정도 진짜 불꽃에 가깝지 않을지, 그렇게 킨보트로서 생각해본다. 나보코프의 세상 속에서 오로지 진실 된 진짜 천재, 참된 재능을 가진 예술가는 오직 나보코프 자신뿐이며 그의 수많은 놀이들은 자신이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수많은 가짜들을 처단하는 놀이와도 같다.

분명 찰스 킨보트는 그러한 수많은 가짜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미 <창백한 불꽃>이라는 제목, 희미한 불꽃에서부터 나보코프의 웃음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앞서 시에 대한 감상에서도 언급했듯 ‘Pale Fire’는 인간혐오자 타이먼의 대사에서 따왔고, 원본의 대사에서부터 태양의 불꽃을 훔쳐야 빛날 수 있는 달과 같은 킨보트를 조롱하는 듯하다.

킨보트는 서문에서부터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예술성을 보이고자 한다. 그는 존 쉐이드를 조종하여 자신에 관한 시를 쓰게 만든다고 믿으며 그의 참된 이해자라고 믿는다. 따라서 킨보트의 주석은 킨보트의 관점에서는 <창백한 불꽃>을 진정으로 완성시키는 길이 되며, 그 자체로서도 빛나는 예술작품과도 같다.

하지만 그의 주석을 읽는 우리 독자들은 결국 본질적인 문제에 계속 긴가민가할 수밖에 없다. 과연 주석은 그 자체로서 있을 수 있는가? 과연 그림자는 원본이 되는 물체 없이 있을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킨보트의 우스꽝스런 자만과 망상은 마치 존 쉐이드의 시처럼, 유리창에 비친 가짜에게 홀려서 죽어버린 여새의 비극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소설로서 <창백한 불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이미 험버트의 추악한 고백록에 익숙한 나보코프 독자들이라면 알겠지만, 결국 우리의 킨보트 박사의 장대한 고백 또한 우리 독자들은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나보코프의 놀이 속에서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킨보트는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그의 거짓말인가? 애당초 존 쉐이드는 정말로 있는 것일까? 그의 이야기들은 진실인가, 아니면 정말로 망상에 불과한가? 그가 ‘킨보트’는 맞는 걸까?

한때는 수수께끼 같은 장시 <창백한 불꽃>의 저자가 킨보트 혼자가 아닐지,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이번에 읽으면서 그 생각은 바뀌었다. 다시 읽어본다면 또 다시 바뀔지도 모르고, 그것이 나보코프의 놀이 과정이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렇다.

결국 이 책은 킨보트를 향한 희비극인데, 킨보트의 본질은 진짜가 되고 싶은 그림자이며 따라서 <창백한 불꽃>의 주석을 쓰면서 자신이 진짜 <창백한 불꽃>의 저자가 되려는 웃-픈 노력이 곧 킨보트 그 자체니까. 그가 시의 저자라면, 애당초 이런 노력은 무의미할 것이다. (물론 그런 무의미함을 조롱하려는 것이 나보코프의 의도라면, 나 또한 킨보트처럼 조롱당하고 있겠지만)


걸작이 그러하듯 사실 이 책도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읽고, 즐길 수 있다. 대표적으론 역시 나보코프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노력하는 것일 거다. 과연 이 책 속 진실은 무엇이며, 킨보트의 주석 속의 진짜 이야기는 무엇인지, 때론 나보코프가 주석 읽는 방식이나 색인의 숫자들을 따라가며 말 그대로 퍼즐을 맞추듯 새롭게 읽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수수께끼들만 있다면 이 책의 매력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이 책이 내게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애처롭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나 이 책이 이 책을 읽는 우리들과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일 거다.


킨보트가 자신이 쉐이드의 진실 된 이해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그의 작품들의 온전한 권리가 있다고 망상에 빠지며 자신이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쓰이고 있다는 망상은 분명 나보코프의 시선엔 비웃음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 이러한 ‘과장’은 으레 우리 독자들이 좋아하는 작가에게 하는 방식과 흡사하지 않은가? 

또한 이 책, 시와 주석, 그리고 모든 것을 읽어 내려가는 과정 속에서 독자가 각자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흡사 킨보트가 자신만의 주석을 써내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일 거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 자신도 이런 글을 쓰고 싶고, 이런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독자가 있을까? 누구나 킨보트처럼, 자신이 더는 그림자가 아닌 불꽃이 되고 싶은 마음은 한구석에 있을 거다.

물론 이러한 방식에서 여러 의문점들은 그대로다. 킨보트가 우리 자신들이라면, 쉐이드나 그라두스는 어떠한가? 쉐이드의 경우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라고 해보자. 물론 그마저도 만족스럽진 않지만, 아무튼 그보단 그라두스를 생각해보자.

지금 이 순간마저도 그라두스는 의문투성이다. 그의 이야기나 그라는 인물의 매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대체 무엇일까?

한 편으론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라두스조차 킨보트의 망상세계, 혹은 그림자 세계에서 변형된 가짜라도, 결국 킨보트의 주석의 끝은 그의 등장으로 끝나버리게 된다.

그라두스와 쉐이드, 킨보트의 만남으로 킨보트는 여전히 자신이 불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잠시 동안 약간의 진실을 보여주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그라두스를 기다리며, 그 기다림이 끝날 때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것은 끝날 것을 예고한다.

이런 점에선 그라두스는 말 그대로 끝이 아닐까? 어떤 매력적인 이야기라도, 설령 그것이 미완이라도 우리는 마지막 페이지와 마주해야한다. 그 이후에 우리가 여전히 그림자든, 아니든, 다른 이야기를 찾든, 현실로 돌아가든, 끝을 마주해야한다. 마치 존 쉐이드가 자신의 시를 통하여 죽음과 마주하듯.

사실 킨보트로서 이 책의 마지막, 색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젬블라 – 머나먼 북쪽의 나라’는 흡사 러시아 혁명으로 망명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나보코프 개인의 향수처럼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드문드문 이 책은 나보코프 개인의 삶에 관한 어떤 주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또한 킨보트이며 그러한 존 쉐이드-나보코프가 원하는 방식대로 주석을 달진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오만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는 나보코프의 시선엔 이러한 감상 자체는 쓸데없는 그림자의 날개짓이며 진짜가 되고 싶은 킨보트들의 그림자는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그러면서도 우리 킨보트들은 계속 그라두스를 기다릴 것이다. 창유리의 비친 하늘 속이라도 계속 날아다니고 싶기에, 그림자라도 진짜 불꽃이 되고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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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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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갑자기 조용해지는가, 이 혼란은 무엇인가? 

(사람들의 얼굴이 얼마나 어두워졌는지 보라) 

어째서 도로와 광장이 갑자기 텅 비고 

모두 사색이 된 채 집으로 가고 있는가? 


왜냐하면 밤이 되었어도 야만인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경에서 온 자들이 말하기를 

이제 그곳에 야만인이 없다고 한다. 


이제 야만인이 없는 우리에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 사람들은 분명 한 해결책이었다.

-콘스탄틴 P. 카바피, <야만인을 기다리며> 中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하여 비난을 받았었고,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항하였으며 그 후유증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이러한 환경적 특성상 오늘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남아공 출신 작가들은 나딘 고디머나 아돌 후가드와 같이 이러한 아파르트헤이트를 비판하며 대항한 이들이 그 주가 되었고, 그러한 목록엔 역시 J.M. 쿳시가 있다.

대개 이러한 류의 작가는 흔히 참여문학처럼, 보다 직접적인 고발과 비판을 하는 이들이 많지만, 쿳시는 역시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였고, 같은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나딘 고디머와는 조금 방향성을 달리한다. 그는 보다 직접적인 고발 대신 우회적인 상징과 우화를 주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방식엔 자연스레 각자의 장단점이 있는 법이다.

물론 이는 사실 작가라는 개인에겐 조금은 위험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대개 이러한 방식은 반대든, 찬성이든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회색분자로 남을 수 있으니까. 허나 쿳시는 자신의 글로 성공했고,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는 작가 중 하나로 남았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그의 작가로서의 뛰어난 실력 때문일 거다.

 

J.M.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그러한 맥락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사실 이 소설의 제목 자체는 위에서 인용한 그리스 시인 카바피의 동명의 시에서 따온 것이며 그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이미 카바피의 시에서도 전부 나타난다. 물론 시와 소설의 차이가 있든 각각 카바피와 쿳시는 다른 형식을 사용하여 같은 것에 대해 말하므로 한쪽을 안다고 하여 다른 쪽을 안다고 할 순 없다.

허나 '야만인들이 분명 해결책 중 하나'란 것은 이 소설에서도 필연적인 기반 중 하나다.


이 소설은 하나의 거대한 우화다. 이곳에 나오는 모든 것은 애매하고 직접적이지 않다. 배경이 되는 익명의 제국은 야만인들과 맞서고 있고, 거의 격리에 가깝지만, 이를 직접적인 현실의 남아공으로 볼 순 없다. 현실과 동떨어진 듯 보이면서도, 결국 현실 어느 곳에서나 일어났을 그런 배경이 곧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세상이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국경에서 이러한 야만인과 맞서는 군대와 마을을 관리하는 이들 중 하나이며 지식인이고, 자연스레 이러한 환경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자다. 그는 우연히 잡혀온 침묵하는 야만인 여자를 고향으로 데려다줄 만큼 행동적인 면도 있으나 그는 개인에 불과하고, 곧 제국의 탄압을 받으며 몰락한다. 


쿳시의 핵심적인 내용 중 하나는 결국 이러한 제국/야만인을 가르는 이분법 자체가 결국 제국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위선을 통한 탐욕을 폭로하는 것이 그 주다. 카바피의 시에서처럼, 분명 야만인을 만드는 것은 제국을 위한 어떤 해결책 중 하나에 불과하며, 그들은 실체 없는 무언가와 싸우며 이익을 취한다. 야만인을 몰아내고 탄압하면서도, 정작 그 야만인들이 정말로 사라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이는 야만인을 뜻하는 원제의 ‘Barbarian’이 희랍어 '바르바로이'의 유래를 생각하면 간단할 거다. 옛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관점으론 똑같이 '문명인'일 페르시아인조차 바-바- 거리며 자신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한단 이유로 바르바로이라 칭한다. 자신들과 남들을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야만인’을 이용한 것이다.

옛 중국의 국가들이 자신을 제외한 바깥의 존재들을 전부 오랑캐로 분류하고, 그리스인들이 자신들과 다른 말을 쓰는 이들을 바르바로이로 분류하듯,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제국 또한 ‘야만인’이라는 해결책으로 제국의 원동력을 만든다.


사실 이 소설 자체는 조금 심심한 면이 없잖아있다. 어찌되었든 이 소설은 하나의 거대한 우화고, 우화 자체는 단조로운 구석이 없잖아 있으므로 이는 배경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단순히 한 주제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상징적인 우화란 점에선 더욱 그러하다. 다만 쿳시는 야만인/제국의 이분법을 거부하듯, 이러한 인물들의 단조로운 선/악의 이분법을 탈피함으로서 조금은 이 단조로울 소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대표적으론 역시나 주인공 그 자체일 거다. 결국 그가 지식인이고 선인일 수도 있으나 그 역시도 제국의 관리로서 이러한 과정에 동참한 이이자 결국 제국의 폭력에 몰락하는 한 나약한 개인이기도 하다. 선함을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간 중간 ‘야만인 여자’와 그의 관계를 보면, 어쩌면 개인적인 탐욕으로 움직이는 음습한 이가 아닐까, 그렇게도 의심되기도 한다. 

하지만 단조로운 알레고리로 변할지도 모를 이 소설은 그러한 두리뭉실한 주인공의 존재로 다층적인 소설로 변한다. 이는 어떤 점에선 쿳시 개인의 고뇌의 투영일지도 모른다. 백인이 만든 아파르트헤이트를 비판하는 백인이라는 정체성은 분명 그 당사자에겐 여러모로 오묘한 기분일 테니까.

무엇보다도 이러한 종류의 지식인은 쿳시의 다른 소설에서도 흔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사실 쿳시의 작품세계에 입문하기 좋은 작품일 거다. 무엇보다도 이 제국에 대한 우화는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도 있는 그런 음습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분명 오늘날 어디인가에서도 ‘야만인’은 분명 해결책으로 작용하는 곳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야만인을 기다려야하는가? 더 이상 그들이 없는 때를 맞이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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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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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과 단편집은 모두 제각기 읽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분량이라도, 장편의 경우 한 이야기를 읽는 반면, 단편집은 여러 이야기의 집합이기에 자연스레 그 독법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작가의 의사와 관계없는 모음집이나 단편전집과 달리, 작가의 의사가 개입되었을 단편집을 읽을 때는 분명 우리는 생각해봐야한다. 이 한 권의 이야기들을 제각기 다른 이야기들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로 볼 것인가?

 

배수아 작가의 단편집 <뱀과 물>은 한 무대를 구성하는 7편의 요소들로 봐야할 것이다. 마치 같은 주제 아래 변주처럼, 7편의 단편들은 제각기 다른 색을 띄면서도 공통되어 보이는 요소들을 공유한다.

 

처음 본 세상은 연극 무대와 같았다 - <도둑자매>, p. 149

 

한 무대 위에서 이 일곱 개의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모습을 뽐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배수아 작가는 국내 작가 중에서 난해(?)하기로도 유명한 작가라 그녀를 읽는 것은 조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건 조금 더 음미하며 읽는 즐거움이란 말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라면, 조금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들이 어떤 이야기들인지, 그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배수아의 세계는 이야기의 전개를 보기보단 장면들로부터 인상을 받는 것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뱀과 물>의 세계는 몽환적이고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무의미한 요약을 간략하게 우선 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이야기인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는 유원지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려 스카타이 무덤으로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소녀의 여정에 관한 단편이다.

<얼이에 대해서> 또한 어린 시절 얼이에 관한 한 소녀의 회상이며 <1979>1979년 한 교사와 리유진이라는 소녀의 이야기, <노인 율라에서><눈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찾아 흉노의 땅으로 온 소녀의 이야기이며 <도둑 자매>는 자매의 이야기, <뱀과 물>은 과거의 사라진 기억과 마주하는 연극에 관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는 여성의 날, 할머니의 추억과 마주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직접 그 장면들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무의미한 요약들이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직관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이 이야기들은 그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무엇에 관한 이야기들인가?

 

무엇보다 주목하고 싶은 점은, 각각의 이야기들 모두 주인공이자 그에 준하는 이들이 끝없이 말을 하고,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늘 이야기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면 네 어머니는 어디에 있는 거지?" -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p. 25

얼이에 대해 말해봐” - <얼이에 대하여>, p. 37

"그런데 …… 리우진이 누구지?" - <1979>, p. 97

"네 아버지가 누군데?" - <노인 율라에서>, p. 129

 

아버지를 잃어버린 소녀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머니는 어디 계신지 질문 받는다. 얼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라고 요구받거나, 리우진이 누구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명히 하기 위하여 또 다시 질문 받는다.

 

이러한 질문과 그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선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에 가깝다. ‘의 뿌리가 무엇인지, 적어도 사회적인 관점에선 가장 확실할 그런 질문들. 그러나 <뱀과 물> 속 세상의 소녀들은 대체적으로 그러한 뿌리가 없거나 무의미한 자들이다. 그녀들의 아버지는 사라지고 어머니란 존재 자체는 없거나, 모르거나, 혹은 아예 기피 받는 그런 존재들이다. 때때로 그러한 소녀들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곳에 남는 것은 그런 사라진 자들을 생각하고, 대신 이야기하는 존재들이다.

 

무엇보다도 주목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변주처럼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단편들 속 키워드들이다.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노인 율라에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스키타이족의 무덤이나 흉노족, 그리고 그러한 유목민들의 마술사들. 혹은 <얼이에 대해서> 속 반두족의 왕인 아버지란 존재나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 등장하는 반두어.

 

스키타이나 흉노 모두 역사적으론 야만족처럼 취급받는 자들이었다. 고대 희랍인들은 자신과 다른 말을 쓰는 스키타이를 바르바로이로 나누었으며, 중국인들은 중원 밖에 사는 흉노를 오랑캐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문명/야만인의 이분법은 얼핏 이야기 속에서도 등장한다. 가령, 흉노와 맞서 싸우고 있는 <노인 율라에서>아버지와 그 병사들처럼.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배수아의 세계에서 주체가 되는 소녀들은 그러한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존재들이다. 흉노의 이름인 눈 아이란 이름을 가지거나 흉노 마술사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딸처럼, 그들은 이분법의 경계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경계를 허무는 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더 이상 사내아이 흉내를 낼 필요도 없어." - <얼이에 대하여>, p. 76

여자아이로 살아도 좋단다” - <노인 율라에서>, p. 146

 

소녀들은 소년으로 살다가 소녀가 되는 자들이다. 소년/소녀의 경계가 허물어지기도 한다. 때론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지기도 한다.

 

"그것참 신기하구나." 경찰관은 새삼스럽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 딸 이름도 눈 아이 였는데." -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p. 18

 

무엇보다도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이 핵심일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로 죽은 줄 알았지. 그런데 이렇게 살아 있었구나." - <도둑자매>, p. 158

 

이러한 삶/죽음의 경계선에 관한 묘사는 이 단편집의 표제작인 <뱀과 물>에서 더욱 자세하게 나타난다. 소설 속 내가 보는 터너의 그림 <The Cave of Despair>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터너의 그림은 스펜서의 <요정 여왕>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인데, 그 장면은 절망이 사는 동굴을 그리고 있다. ‘절망은 사람들을 유혹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청한다. 이에 사람들은 절망하며 그 말을 따른다.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고 절망적인 일이기에 죽음으로서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란 유혹이다.

 

하지만 이런 유혹을 받는 기사는 절망을 물리치며 그 그림을 보는 나 또한 계속 살아있다. 물론 과거 속 나는 이미 없기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속에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죽음의 전언만이 유일한 때가 곧 오리라는 사실을 아직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 <1979>, p. 115

 

내가 없는 1972년 여름 어느 하루는 존재했을 것인가? 모든 것이 시작과 동시에 늙었고, 살기도 전에 너무도 오래되었던 어느 날 나는 - <뱀과 물>, p. 192

 

무엇보다도 <뱀과 물> 속 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 과거, 죽은 과거를 생각하며 고뇌한다. 그러나 이는 비단 <뱀과 물>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 단편집의 세계는 1979년의 과거이든, 어린 시절이든 모두 과거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것에 가깝다. 지금은 다시 거기 없는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거기엔 내가 애써 잊은 악몽도 존재하며, 슬픈 이별이나 기이했던 일들, 혹은 절망의 동굴에 갇힌 것과 같은 일들도 있다. 때론 소녀가 소년이었을 때의 일이나 힘든 진실을 알기 이전의 순진할 때의 추억도 있다.

 

이 무대 위의 이야기들이 몽환적이고 어딘가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이 모든 것은 누군가의 사라진 과거이자 기억이며 이야기니까.

 

여기엔 회의적인 시선도 물론 섞여 있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 <1979>, p. 94

 

만일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모든 기억은 이토록 생생할 리가 없다. - <도둑자매>, p 188

 

어째서 그녀들은 과거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일까? 어째서 지나간 과거를 애초부터 없었던 일로 치부하는 걸까? 그들은 마치 유년시절과 과거를 꿈꾸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꿈조차 아름답게 미화되진 않는다. 오히려 때때론 그러한 꿈은 상대방에 의해 냉소의 대상이 된다.

 

"이제 꿈이 시작되는 건가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p. 31

 

이분법이 무너진 세상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며, 과거의 내가 눈 아이가 되고, 내가 흉노 마술사이자 리유진이 되는 꿈속에서, 그럼 우리는 이 무대에서 어떤 인상을 가져야하는 걸까? 마냥, 절망이 유혹하는 동굴에서처럼, 삶과 이야기에 대한 절망일까?

 

그러나 그 실마리는 역시 그러한 절망을 주는 이야기 속에서 동시에 찾을 수 있을 거 같다.

 

"꿈은 우리를 해치나요?"

"꿈은," 여승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문질러 껐다.

"꿈은 글과 마찬가지로 직관의 일종이야."

- <뱀과 물>, p. 203

 

놀랍게도, 우리의 경험이란, 사실 우리의 직관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p.266

 

미약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 읽고, 또 누군가는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슬픈 꿈처럼, 글처럼 읽고, 쓰며 우리는 스키타이 족의 무덤을 찾아 떠나게 된다. 우리가 누구인지 끝없이 질문 받으며 그에 대한 대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왜냐하면

 

"말이란 신비하니까요." -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p. 265

 

꼭 이야기를 직접 쓰거나 말할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 전해주는 이가 되어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는 아마도 훌륭한 우체국 직원이 될 거다." - <뱀과 물>, p. 205

 

이러한 없을지도 모를 과거의 이야기와 마주하는 독자들은 다시 본질적인 질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에 이야기로 답해주는 이는 없다. 우리의 눈앞엔 <뱀과 물>이란 종이와 활자로 된 침묵하는 책 한 권만이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의 의문에 대한 답을 주진 않을지라도, 어쩌면 그 의문을 그대로 품고 있을지 모르겠다.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내가 느끼는 것을

지금 그도 느끼고 있을까?

-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268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이거일지도 모르겠다. ‘눈 아이인 나와 눈 아이인 소녀는 같은 걸 느끼고 있을까? 과거의 내가 느꼈던 것을 현재의 나도 그대로 느끼고 있는가? 나와 너가, 나와 흉노 소녀와 마술사가 같을 수 있을까? 내가 나일 수 있을까?

 

, 내가 모든 사람과 모든 곳이 될 수만 있다면!”

페르난두 페소아(알바루 데 캄푸스), <승리의 송가>

 

이러한 의문은 언제나 있어왔다. 그러나 진부하기에 결코 진부하지 않은 그런 의문이다. 그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나와 소녀 모두 눈 아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며, 내가 곧 흉노 마술사인 어머니처럼 되고,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와 만나며 나는 죽고, 또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뱀과 물> 속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사실 답을 찾지 않아도 좋다. 그게 그저 사라질 희미한 인상이 되고, 사라질 글쓰기가 되어도 좋다. 언제가 깨어날 꿈이 되어도 좋다. 하지만 과거가 될 내가 그러한 직관을 한순간이나마 품게 된다면, 글을 쓴 이나, 읽는 이나 모두 성공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읽기엔 제각각 그 즐거움이 있다. 배수아의 글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말이란 신비하니까요." -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p.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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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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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꺼내고 싶다. 나한테 도스토예프스키는 언제나 최고의 작가였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최고의 소설이다. 여기엔 단순히 소설의 내용뿐만 아니라 외적인 요인도 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내가 제일 처음 원전으로 완독해본 고전 중 하나였고, 그때부터 내게 최고의 소설이 되었다. 그 이후로도 쭉, 미화되는 과거처럼, 새로운 작가나 책을 읽어도, 결국엔 내게 있어 최고의 소설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문학동네에서 새로 번역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는다.


이 소설은 결국 카라마조프 가문의 형제들의 이야기이다. 온갖 탐욕과 악덕,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혐오스러운 인물에 가까운 아버지 표도르로부터 태어난 삼형제. 그 중엔 자신의 아버지를 경멸하는 아들도 있고, 자신의 아버지와 재산과 여자 문제로 다투며 죽이고 싶어하는 아들도 있으며 실제로 아버지 표도르는 자신의 아들들 중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렇다면 이 살인범은 누구인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방대한 분량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다루는 핵심적인 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사실 워낙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소설이며 수많은 이야기들과 인물들이 있는 소설 인만큼 이 책을 즐기는 데엔 여러 방법이 있을 거다. 언젠가 지인이 내게 왜 이 책을 좋아하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명확한 답을 알려줄 순 없었다. 그저 이 책 속의 심오한 종교적인 논쟁에서 느껴지는 현학적인 희열이나 장엄한 이야기, 혹은 여러 인물들의 풍부함 등을 읊조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대답 하나하나에 틀린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한 이유만으로 이 소설을 정당화하기엔 이 소설은 너무나도 멋지니까.


그러나 이번에 나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중 알렉세이 카라마조프, 알료샤에 대해 초점을 맞춰보고 싶다. 알료샤의 존재에 대해선 여러 해 동안 의문이었으니까.


작가는 서문에서부터 이 이야기가 알료샤의 이야기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첫 번째 이야기에 해당하며 고작해야 시작에 불과하고, 두 번째 이야기가 될 알료샤의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이렇듯 알료샤 카라마조프는 분명 작가에게 선택받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의 알료샤를 생각해보면 선뜻 독자로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알료샤의 위치에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적어도 <카라마조프> 아래에서 알료샤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서술자에 가깝다. 그는 분명 선량하고, 카라마조프 가의 유별난 존재로 보이지만, 자신의 형제들보다 그 비중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너무나도 선량한 알료샤에게 지루함을 느낄 독자도 상당하리라 장담한다.

알료샤와 반대로 카라마조프 가의 사람들은 선보단 악에 가까워보인다.


모든 카라마조프의 시초인 표도르는 말 그대로 혐오스런 인물이다. 그는 탐욕적이고 수치심을 모른다. 아니, 자신의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오히려 거기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그는 말 그대로 구제받을 길이 없다. 그는 자신 밖에 모른다. 사실 이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할줄 모르는 자가 과연 자신을 사랑할 수는 있는가? 분명 표도르라는 인물은 소설 안에서 큰 힘을 행사하긴 하지만,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 중 하나에 의하여 소설 속에서 퇴장하고 만다.


장남 드미트리의 경우, 개인적으로 나는 드미트리라는 인물에게 큰 공감을 느낀 적이 애석하지만 없었다. 이는 드미트리라는 인물이 혼란하단 점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표면적으로 아버지 표도르와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다. 방탕하고, 무절제하며 문명의 인간이라기보단 때론 짐승에 가깝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직접적으로 돈과 여자 문제로 대립하고, 아버지의 살인범으로 지목된다.

드미트리라는 인물이 마냥 부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드미트리의 삶을 향한 열정과 순수함으로 그를 표도르와는 다른 인물로 그린다. 여기에 한계가 있을 순 있다,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독자의 몫이므로.

허나 그는 결국 이 소설에서 순교자가 된다. 아무리 무절제하고 방탕해 보이는 인물일지라도,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의 누명을 쓰는 것은 허용되어선 안 되는 일이니까. 드미트리의 수난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관이 절실히 나타나는 부분이라고 본다. 이미 소설의 초반부에서 우리는 조시마 장로가 드미트리에게 입맞춤을 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드미트리는 수난을 받을 것이고, 그 수난의 진실은 분명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그 시비가 드러나는 법정은 지상이 아닌, 천상의 법정이다.

이런 수난의 과정에서 드미트리가 ‘아름다울지도 모르는 이유’는 그가 삶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적어도 카라마조프의 세계 속에서 삶은 곧 사랑이다. ‘논리에 앞서서 사랑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문제니까. 표도르와의 야만적인 대립이 아니라, 그류셴카와의 화해와 사랑을 통하여 그는 달라진다. 

드미트리의 이야기를 좋아할 사람이라면, 역시 이러한 부분 때문이 아닐까?


차남 이반은 어떠한가? 그는 냉소적인 지식인이고 이성을 대표할 인물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에게도 ‘카라마조프적인 피’가 흐르고, 그 또한 내내 여러 갈등을 하는 지식인이다.

이반이 들려주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고 현학적인 즐거움마저 가득하지만, 그의 인간적인 고뇌 또한 독자의 즐거움이다. 냉소적인 이반은 또 다른 카라마조프의 사생아인 스메르쟈코프를 자신의 분신으로 만들고, 친부살해의 교사범이 되어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두려워하고 괴로워한다.  

스메르쟈코프를 이반과 분리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라는 이 소설 속 또다른 악은 이반으로 인하여 탄생하였고, 이반이 나아갈 수 있는 조금 다른 방향성을 지닌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반을 통하여’ 자신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표도르를 살해하고, 드미트리에게 누명을 씌운다. 그리고 ‘모든 것은 허용된다’라는 끔찍한 믿음 아래에 거리낌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일말의 구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이런 스메르쟈코프와 달리, 이반은 결국 고난에서 승리하고, 자신의 형제들과 화해함으로서 구원받는다.  

이반의 이야기가 특히 더 감동스러울지 모르는 것은 이러한 자신의 분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그의 수난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작가가 공인한 우리의 주인공 알료샤는 이러한 형제들 사이와 여러 사람들 사이를 왕래하며 그들을 중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로 그 비중을 차지한다. 알료샤는 본래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한 선함을 담당하는 조시마 장로 아래에서 수도원에 머무는 자였다.

그러나 때론 선이 그 힘을 잠시 발휘하지 못하는 걸 상징하듯 조시마 장로는 노쇠하여 죽고 만다. 그리고 조시마는 특히나 알료샤에게 수도원을 나가라고 조언하며 알료샤는 그 말을 따른다. 

어째서 조시마는 알료샤에게 이러한 ‘명령’을 내렸을까? 그는 드미트리의 수난을 예언헀고, 지상의 법정에선 때론 진실조차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지상이 혼란함, 그 자체란 걸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선량한 알료샤를 굳이 그런 진흙탕으로 내몰았을까?

물론 표면적으론 조시마란 선함이 사라진 수도원조차 더 이상 속세와 별 차이점이 없는 곳이 되어버렸음이 소설 속 조시마의 장례 직후 드러난다. 여기에 알료샤도 미련을 느끼지 못하고 수도원을 완전히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 해답은 알료샤가 정리한 조시마 장로의 생애에서 얼핏 찾을 수 있을 거 같다.

 

조시마 장로는 지옥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곳으로 정의한다.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은 지옥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카라마조프 가의 사람들의 운명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랑할 수 없는 표도르와 스메르쟈코프는 말 그대로 허무로 돌아가지만, 사랑을 통하여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인간성을 회복하고, 화해하며 정신적인 구원에 이른다.

물론 현실은 때때로 지옥처럼 느껴진다. 때론 선함이 힘을 잃은 듯 보이고, 진실이 거짓에게 패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 이 대지는 지옥은 아직 아니다. 아무리 혼란스럽고, 탐욕과 허영이 숨을 쉬며 때론 진실이 박해받는 곳일지라도 아직은 지옥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누군가는 삶을 찾고, 사랑을 하는 이곳에선 희망이 남아있으니까. 드미트리가 외쳤던 것처럼 인간의 마음이란 신과 악마의 전장이다. 천국을 만드는 것도, 인간을 만드는 것도 결국 인간의 몫이다.

알료샤가 수도원을 떠나 지상의 삶을 살아야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몽상가처럼 구름 위의 천국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직접 살아보고, 사랑해보라는 것이 알료샤를 향한 조시마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알료샤는 지상으로 내려와 수난을 목격하고, 소년들과의 우정을 체험하며 형제와의 사랑을 회복하곤 인간 알료샤가 된다. 

그렇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인간 알료샤의 탄생을 보여주고, 어째서 알료샤가 이 소설의 주인공인지 독자들에게 긴 과정을 통하여 납득시킨다. 그렇다, 이리하여 알료샤라는 인간이 있었고, 그의 삶이 시작된다. 


앞서 말했듯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즐기는 독자라면, 모든 고전이 그러하듯 제각기 수많은 방법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것 또한 그들 자신의 문제일 테니까.

이 소설은 분명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 중에서도 유독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지만, 종교가 있든 없든, 삶의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소설을 읽고 느끼는데 문제는 없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무척이나 방대하여 모든 내용과 인물들을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벅차다. 이 감상에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였지만, 카체리나나 그루셴카, 리즈나 일류샤와 친구들 등 형제들과 버금가는, 아니 때론 능가하는 매력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는 아직 이 소설을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 그리고 또 다시 즐길 독자들을 위해 남겨두겠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번역은 이미 시중에도 많지만, 문학동네라는 좋은 출판사를 통하여 또 다른 카라마조프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무척이나 기쁘다. 한국어로 된 카라마조프를 읽는 독자들 상당수는 러시아어로 된 카라마조프를 만날 수 없을 테니 서로 비교할 대상과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하나 더 생기는 건 무척이나 환영할 일이다. 더군다나 외관상으로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플랫폼에 맞게 예쁘다면 더더욱 환영이다. (책을 선택하는데 표지 또한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니까)


이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왜 알렉세이 카라마조프, 알료샤가 이 소설의 주인공인지 우리에게 기나긴 프롤로그로 소개해주었다. 이제 우리는 남은 이야기에서 알료샤가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거란 걸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그 이야기를 직접 볼 수 없다. 불행히도 도스토예프스키에겐 20년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인간 알료샤의 삶은 미완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것 또한 아무래도 좋다. 이미 도스토예프스키는 조시마 장로의 입을 통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을 전달하였다. 이제 살아가는 것은 이 이야기를 읽은 우리의 몫이다.  


<대지에 입 맞추며 끊임없이 끝없이 사랑하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모든 것을 사랑하라, 이 환희와 황홀을 구하라, 그대 기쁨의 눈물로 대지를 적시고 그대의 이 눈물을 사랑하라. 이 황홀을 부끄러워 말고 소중히 여길지니, 이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많은 사람이 아니라 선택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2,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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