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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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꺼내고 싶다. 나한테 도스토예프스키는 언제나 최고의 작가였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최고의 소설이다. 여기엔 단순히 소설의 내용뿐만 아니라 외적인 요인도 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내가 제일 처음 원전으로 완독해본 고전 중 하나였고, 그때부터 내게 최고의 소설이 되었다. 그 이후로도 쭉, 미화되는 과거처럼, 새로운 작가나 책을 읽어도, 결국엔 내게 있어 최고의 소설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문학동네에서 새로 번역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는다.


이 소설은 결국 카라마조프 가문의 형제들의 이야기이다. 온갖 탐욕과 악덕,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혐오스러운 인물에 가까운 아버지 표도르로부터 태어난 삼형제. 그 중엔 자신의 아버지를 경멸하는 아들도 있고, 자신의 아버지와 재산과 여자 문제로 다투며 죽이고 싶어하는 아들도 있으며 실제로 아버지 표도르는 자신의 아들들 중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렇다면 이 살인범은 누구인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방대한 분량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다루는 핵심적인 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사실 워낙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소설이며 수많은 이야기들과 인물들이 있는 소설 인만큼 이 책을 즐기는 데엔 여러 방법이 있을 거다. 언젠가 지인이 내게 왜 이 책을 좋아하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명확한 답을 알려줄 순 없었다. 그저 이 책 속의 심오한 종교적인 논쟁에서 느껴지는 현학적인 희열이나 장엄한 이야기, 혹은 여러 인물들의 풍부함 등을 읊조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대답 하나하나에 틀린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한 이유만으로 이 소설을 정당화하기엔 이 소설은 너무나도 멋지니까.


그러나 이번에 나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중 알렉세이 카라마조프, 알료샤에 대해 초점을 맞춰보고 싶다. 알료샤의 존재에 대해선 여러 해 동안 의문이었으니까.


작가는 서문에서부터 이 이야기가 알료샤의 이야기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첫 번째 이야기에 해당하며 고작해야 시작에 불과하고, 두 번째 이야기가 될 알료샤의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이렇듯 알료샤 카라마조프는 분명 작가에게 선택받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의 알료샤를 생각해보면 선뜻 독자로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알료샤의 위치에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적어도 <카라마조프> 아래에서 알료샤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서술자에 가깝다. 그는 분명 선량하고, 카라마조프 가의 유별난 존재로 보이지만, 자신의 형제들보다 그 비중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너무나도 선량한 알료샤에게 지루함을 느낄 독자도 상당하리라 장담한다.

알료샤와 반대로 카라마조프 가의 사람들은 선보단 악에 가까워보인다.


모든 카라마조프의 시초인 표도르는 말 그대로 혐오스런 인물이다. 그는 탐욕적이고 수치심을 모른다. 아니, 자신의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오히려 거기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그는 말 그대로 구제받을 길이 없다. 그는 자신 밖에 모른다. 사실 이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할줄 모르는 자가 과연 자신을 사랑할 수는 있는가? 분명 표도르라는 인물은 소설 안에서 큰 힘을 행사하긴 하지만,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 중 하나에 의하여 소설 속에서 퇴장하고 만다.


장남 드미트리의 경우, 개인적으로 나는 드미트리라는 인물에게 큰 공감을 느낀 적이 애석하지만 없었다. 이는 드미트리라는 인물이 혼란하단 점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표면적으로 아버지 표도르와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다. 방탕하고, 무절제하며 문명의 인간이라기보단 때론 짐승에 가깝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직접적으로 돈과 여자 문제로 대립하고, 아버지의 살인범으로 지목된다.

드미트리라는 인물이 마냥 부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드미트리의 삶을 향한 열정과 순수함으로 그를 표도르와는 다른 인물로 그린다. 여기에 한계가 있을 순 있다,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독자의 몫이므로.

허나 그는 결국 이 소설에서 순교자가 된다. 아무리 무절제하고 방탕해 보이는 인물일지라도,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의 누명을 쓰는 것은 허용되어선 안 되는 일이니까. 드미트리의 수난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관이 절실히 나타나는 부분이라고 본다. 이미 소설의 초반부에서 우리는 조시마 장로가 드미트리에게 입맞춤을 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드미트리는 수난을 받을 것이고, 그 수난의 진실은 분명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그 시비가 드러나는 법정은 지상이 아닌, 천상의 법정이다.

이런 수난의 과정에서 드미트리가 ‘아름다울지도 모르는 이유’는 그가 삶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적어도 카라마조프의 세계 속에서 삶은 곧 사랑이다. ‘논리에 앞서서 사랑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문제니까. 표도르와의 야만적인 대립이 아니라, 그류셴카와의 화해와 사랑을 통하여 그는 달라진다. 

드미트리의 이야기를 좋아할 사람이라면, 역시 이러한 부분 때문이 아닐까?


차남 이반은 어떠한가? 그는 냉소적인 지식인이고 이성을 대표할 인물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에게도 ‘카라마조프적인 피’가 흐르고, 그 또한 내내 여러 갈등을 하는 지식인이다.

이반이 들려주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고 현학적인 즐거움마저 가득하지만, 그의 인간적인 고뇌 또한 독자의 즐거움이다. 냉소적인 이반은 또 다른 카라마조프의 사생아인 스메르쟈코프를 자신의 분신으로 만들고, 친부살해의 교사범이 되어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두려워하고 괴로워한다.  

스메르쟈코프를 이반과 분리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라는 이 소설 속 또다른 악은 이반으로 인하여 탄생하였고, 이반이 나아갈 수 있는 조금 다른 방향성을 지닌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반을 통하여’ 자신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표도르를 살해하고, 드미트리에게 누명을 씌운다. 그리고 ‘모든 것은 허용된다’라는 끔찍한 믿음 아래에 거리낌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일말의 구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이런 스메르쟈코프와 달리, 이반은 결국 고난에서 승리하고, 자신의 형제들과 화해함으로서 구원받는다.  

이반의 이야기가 특히 더 감동스러울지 모르는 것은 이러한 자신의 분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그의 수난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작가가 공인한 우리의 주인공 알료샤는 이러한 형제들 사이와 여러 사람들 사이를 왕래하며 그들을 중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로 그 비중을 차지한다. 알료샤는 본래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한 선함을 담당하는 조시마 장로 아래에서 수도원에 머무는 자였다.

그러나 때론 선이 그 힘을 잠시 발휘하지 못하는 걸 상징하듯 조시마 장로는 노쇠하여 죽고 만다. 그리고 조시마는 특히나 알료샤에게 수도원을 나가라고 조언하며 알료샤는 그 말을 따른다. 

어째서 조시마는 알료샤에게 이러한 ‘명령’을 내렸을까? 그는 드미트리의 수난을 예언헀고, 지상의 법정에선 때론 진실조차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지상이 혼란함, 그 자체란 걸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선량한 알료샤를 굳이 그런 진흙탕으로 내몰았을까?

물론 표면적으론 조시마란 선함이 사라진 수도원조차 더 이상 속세와 별 차이점이 없는 곳이 되어버렸음이 소설 속 조시마의 장례 직후 드러난다. 여기에 알료샤도 미련을 느끼지 못하고 수도원을 완전히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 해답은 알료샤가 정리한 조시마 장로의 생애에서 얼핏 찾을 수 있을 거 같다.

 

조시마 장로는 지옥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곳으로 정의한다.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은 지옥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카라마조프 가의 사람들의 운명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랑할 수 없는 표도르와 스메르쟈코프는 말 그대로 허무로 돌아가지만, 사랑을 통하여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인간성을 회복하고, 화해하며 정신적인 구원에 이른다.

물론 현실은 때때로 지옥처럼 느껴진다. 때론 선함이 힘을 잃은 듯 보이고, 진실이 거짓에게 패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 이 대지는 지옥은 아직 아니다. 아무리 혼란스럽고, 탐욕과 허영이 숨을 쉬며 때론 진실이 박해받는 곳일지라도 아직은 지옥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누군가는 삶을 찾고, 사랑을 하는 이곳에선 희망이 남아있으니까. 드미트리가 외쳤던 것처럼 인간의 마음이란 신과 악마의 전장이다. 천국을 만드는 것도, 인간을 만드는 것도 결국 인간의 몫이다.

알료샤가 수도원을 떠나 지상의 삶을 살아야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몽상가처럼 구름 위의 천국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직접 살아보고, 사랑해보라는 것이 알료샤를 향한 조시마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알료샤는 지상으로 내려와 수난을 목격하고, 소년들과의 우정을 체험하며 형제와의 사랑을 회복하곤 인간 알료샤가 된다. 

그렇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인간 알료샤의 탄생을 보여주고, 어째서 알료샤가 이 소설의 주인공인지 독자들에게 긴 과정을 통하여 납득시킨다. 그렇다, 이리하여 알료샤라는 인간이 있었고, 그의 삶이 시작된다. 


앞서 말했듯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즐기는 독자라면, 모든 고전이 그러하듯 제각기 수많은 방법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것 또한 그들 자신의 문제일 테니까.

이 소설은 분명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 중에서도 유독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지만, 종교가 있든 없든, 삶의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소설을 읽고 느끼는데 문제는 없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무척이나 방대하여 모든 내용과 인물들을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벅차다. 이 감상에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였지만, 카체리나나 그루셴카, 리즈나 일류샤와 친구들 등 형제들과 버금가는, 아니 때론 능가하는 매력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는 아직 이 소설을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 그리고 또 다시 즐길 독자들을 위해 남겨두겠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번역은 이미 시중에도 많지만, 문학동네라는 좋은 출판사를 통하여 또 다른 카라마조프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무척이나 기쁘다. 한국어로 된 카라마조프를 읽는 독자들 상당수는 러시아어로 된 카라마조프를 만날 수 없을 테니 서로 비교할 대상과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하나 더 생기는 건 무척이나 환영할 일이다. 더군다나 외관상으로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플랫폼에 맞게 예쁘다면 더더욱 환영이다. (책을 선택하는데 표지 또한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니까)


이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왜 알렉세이 카라마조프, 알료샤가 이 소설의 주인공인지 우리에게 기나긴 프롤로그로 소개해주었다. 이제 우리는 남은 이야기에서 알료샤가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거란 걸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그 이야기를 직접 볼 수 없다. 불행히도 도스토예프스키에겐 20년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인간 알료샤의 삶은 미완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것 또한 아무래도 좋다. 이미 도스토예프스키는 조시마 장로의 입을 통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을 전달하였다. 이제 살아가는 것은 이 이야기를 읽은 우리의 몫이다.  


<대지에 입 맞추며 끊임없이 끝없이 사랑하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모든 것을 사랑하라, 이 환희와 황홀을 구하라, 그대 기쁨의 눈물로 대지를 적시고 그대의 이 눈물을 사랑하라. 이 황홀을 부끄러워 말고 소중히 여길지니, 이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많은 사람이 아니라 선택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2,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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