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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어째서 갑자기 조용해지는가, 이 혼란은 무엇인가?
(사람들의 얼굴이 얼마나 어두워졌는지 보라)
어째서 도로와 광장이 갑자기 텅 비고
모두 사색이 된 채 집으로 가고 있는가?
왜냐하면 밤이 되었어도 야만인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경에서 온 자들이 말하기를
이제 그곳에 야만인이 없다고 한다.
이제 야만인이 없는 우리에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 사람들은 분명 한 해결책이었다.
-콘스탄틴 P. 카바피, <야만인을 기다리며> 中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하여 비난을 받았었고,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항하였으며 그 후유증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이러한 환경적 특성상 오늘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남아공 출신 작가들은 나딘 고디머나 아돌 후가드와 같이 이러한 아파르트헤이트를 비판하며 대항한 이들이 그 주가 되었고, 그러한 목록엔 역시 J.M. 쿳시가 있다.
대개 이러한 류의 작가는 흔히 참여문학처럼, 보다 직접적인 고발과 비판을 하는 이들이 많지만, 쿳시는 역시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였고, 같은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나딘 고디머와는 조금 방향성을 달리한다. 그는 보다 직접적인 고발 대신 우회적인 상징과 우화를 주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방식엔 자연스레 각자의 장단점이 있는 법이다.
물론 이는 사실 작가라는 개인에겐 조금은 위험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대개 이러한 방식은 반대든, 찬성이든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회색분자로 남을 수 있으니까. 허나 쿳시는 자신의 글로 성공했고,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는 작가 중 하나로 남았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그의 작가로서의 뛰어난 실력 때문일 거다.
J.M.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그러한 맥락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사실 이 소설의 제목 자체는 위에서 인용한 그리스 시인 카바피의 동명의 시에서 따온 것이며 그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이미 카바피의 시에서도 전부 나타난다. 물론 시와 소설의 차이가 있든 각각 카바피와 쿳시는 다른 형식을 사용하여 같은 것에 대해 말하므로 한쪽을 안다고 하여 다른 쪽을 안다고 할 순 없다.
허나 '야만인들이 분명 해결책 중 하나'란 것은 이 소설에서도 필연적인 기반 중 하나다.
이 소설은 하나의 거대한 우화다. 이곳에 나오는 모든 것은 애매하고 직접적이지 않다. 배경이 되는 익명의 제국은 야만인들과 맞서고 있고, 거의 격리에 가깝지만, 이를 직접적인 현실의 남아공으로 볼 순 없다. 현실과 동떨어진 듯 보이면서도, 결국 현실 어느 곳에서나 일어났을 그런 배경이 곧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세상이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국경에서 이러한 야만인과 맞서는 군대와 마을을 관리하는 이들 중 하나이며 지식인이고, 자연스레 이러한 환경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자다. 그는 우연히 잡혀온 침묵하는 야만인 여자를 고향으로 데려다줄 만큼 행동적인 면도 있으나 그는 개인에 불과하고, 곧 제국의 탄압을 받으며 몰락한다.
쿳시의 핵심적인 내용 중 하나는 결국 이러한 제국/야만인을 가르는 이분법 자체가 결국 제국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위선을 통한 탐욕을 폭로하는 것이 그 주다. 카바피의 시에서처럼, 분명 야만인을 만드는 것은 제국을 위한 어떤 해결책 중 하나에 불과하며, 그들은 실체 없는 무언가와 싸우며 이익을 취한다. 야만인을 몰아내고 탄압하면서도, 정작 그 야만인들이 정말로 사라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이는 야만인을 뜻하는 원제의 ‘Barbarian’이 희랍어 '바르바로이'의 유래를 생각하면 간단할 거다. 옛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관점으론 똑같이 '문명인'일 페르시아인조차 바-바- 거리며 자신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한단 이유로 바르바로이라 칭한다. 자신들과 남들을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야만인’을 이용한 것이다.
옛 중국의 국가들이 자신을 제외한 바깥의 존재들을 전부 오랑캐로 분류하고, 그리스인들이 자신들과 다른 말을 쓰는 이들을 바르바로이로 분류하듯,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제국 또한 ‘야만인’이라는 해결책으로 제국의 원동력을 만든다.
사실 이 소설 자체는 조금 심심한 면이 없잖아있다. 어찌되었든 이 소설은 하나의 거대한 우화고, 우화 자체는 단조로운 구석이 없잖아 있으므로 이는 배경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단순히 한 주제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상징적인 우화란 점에선 더욱 그러하다. 다만 쿳시는 야만인/제국의 이분법을 거부하듯, 이러한 인물들의 단조로운 선/악의 이분법을 탈피함으로서 조금은 이 단조로울 소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대표적으론 역시나 주인공 그 자체일 거다. 결국 그가 지식인이고 선인일 수도 있으나 그 역시도 제국의 관리로서 이러한 과정에 동참한 이이자 결국 제국의 폭력에 몰락하는 한 나약한 개인이기도 하다. 선함을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간 중간 ‘야만인 여자’와 그의 관계를 보면, 어쩌면 개인적인 탐욕으로 움직이는 음습한 이가 아닐까, 그렇게도 의심되기도 한다.
하지만 단조로운 알레고리로 변할지도 모를 이 소설은 그러한 두리뭉실한 주인공의 존재로 다층적인 소설로 변한다. 이는 어떤 점에선 쿳시 개인의 고뇌의 투영일지도 모른다. 백인이 만든 아파르트헤이트를 비판하는 백인이라는 정체성은 분명 그 당사자에겐 여러모로 오묘한 기분일 테니까.
무엇보다도 이러한 종류의 지식인은 쿳시의 다른 소설에서도 흔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사실 쿳시의 작품세계에 입문하기 좋은 작품일 거다. 무엇보다도 이 제국에 대한 우화는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도 있는 그런 음습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분명 오늘날 어디인가에서도 ‘야만인’은 분명 해결책으로 작용하는 곳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야만인을 기다려야하는가? 더 이상 그들이 없는 때를 맞이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