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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 모멸에 품위로 응수하는 책읽기
곽아람 지음, 우지현 그림 / 이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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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독서가 곽아람의 우아한 성장기
전문독서가 ㅡ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없다면 곽아람을 위해서 하나 만들어도 좋을만큼, 그는 어마어마한 독서가이다. 그런 그가 20권을 뽑아서 에세이 형식을 갖춘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당연히 기대할 수 밖에.아동서적 <소공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애거서 크리스티, 미셸 오바마의 <비커밍>, 루스 긴즈버그에 관한 책까지...... 리스트는 좀 의아하다 싶었다. 그러나 흡입력 강한 문장에 빠져들면서 선정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책은 독서로 표현된 한 인간의 성장기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거의 말미에 등장하는 문장은 이 책의 존재의의, 그리고 모든 책의 존재의의를 설명한다. "책 읽기란 어린 날의 내가 울고 있는 자신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건넨 최초의 악수이자, 어른이 된 내가 아직도 마음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내게 눈물과 위안으로 건네는 악수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실시한 최초의 교육이자 최후의 교육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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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용 -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데이브 히키의 전복적 시선
데이브 히키 지음, 박대정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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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속에 잊혀진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13> 데이브 히키의 『보이지 않는 용』

이진숙 kmedichi@hanmail.net | 제213호 | 20110410 입력 height=0 marginHeight=0 src="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 frameBorder=0 width=0 marginWidth=0 scrolling=no>
1 데이브 히키의 『보이지 않는 용』
책은 1988년 한 공개 토론회장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시작한다. “90년대의 주요 쟁점은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라는 데이브 히키의 발언과 더불어 토론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 히키는 상당 기간 비주류 비평가로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하버드대와 예일대 방문교수, 네바다대 교수를 거쳐 지금은 뉴멕시코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적 카우보이’라는 별명처럼 그의 경력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한때 갤러리 디렉터로 작품 판매에도 관여했고, 전시기획자, 단편 작가, 로큰롤 작곡가로도 활동했다.

그를 비주류로 만든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주장이었다. SF물이나 스릴러를 연상시키는 제목 『보이지 않는 용』(2011, 마음산책, 1만6000원)은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93년 첫 출간됐으며 2009년 ‘아름다움과 민주주의’라는 부제가 달린 5장이 추가된 개정 증보판이 나왔다. 20여 년 사이 책 밖에서 일어난 일들이 ‘보이지 않는 용’의 귀환을 환영하게 한다. 책의 본문으로 뛰어들기 전에 옮긴이 박대정의 글과 임근준의 해설을 먼저 보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위의 사건이 일어난 것은 80년대 문화전쟁이 고조되던 시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미술의 중심지로 급부상하는 과정은 미국 중심의 세계 재편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추상표현주의는 냉전시대에 자유주의 선전 수단으로 이용됐다. 추상과 형식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모더니즘 기반의 주류 비평계는 여기에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했다.

모더니즘의 뒤를 이어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 역시 제도화됨으로써 비판적인 기능을 상실했다. 특정 이론의 전횡과 레이건 대통령 시절 사회 전반의 보수화는 마침내 미국 사회에서 낙태, 총기 소지, 종교와 정치의 분리, 사생활 보호, 동성애, 검열 등의 이슈로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이 충돌하는 문화전쟁을 촉발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89년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전시를 둘러싼 대립이었다. 동성애와 노골적인 성행위 이미지를 담은 메이플소프의 작품 전시를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에 교묘한 양비론을 내세우며 히키가 주장한 것은 아름다움의 중요성이었다.

2 카라바조의 ‘성 토마스의 불신’(1601),캔버스에 유채, 피렌체 베키아 포스터 궁
잊혀졌던 카라바조의 그림을 루벤스가 직접 구입하거나 구매를 권했던 것도 그 작품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아름다움은 이미지가 교회나 국가를 통하지 않고 곧장 개인에게 가는 유일한 직행 통로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미지에서 구경꾼에게 가는 통로는 표면상 교회나 국가와는 다른 대안적인 기관을 거쳐 우회한다”고 일갈했다. 제도화된 비평계와 미술관을 포함한 각종 미술기관 등을 ‘마취 전문가’와 ‘치료 기관’이라 비아냥거리며 비판한다. 전시를 반대하건 찬성하건 미적 담론을 독식하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개정 증보판이 나온 2009년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그 효력을 다한 것처럼 보이는 시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이론에 미술비평이 기대기 시작하면서 ‘아름다움’에 관한 논의는 잊혀졌다. 그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 예술작품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도 잊혀진 듯했다. 이론의 부적절한 적용과 남용은 안타까운 상황을 연출했다. 미술작가는 유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에 맞추어 작품을 만들고 미술비평가는 그 작품을 상찬하는 무의미한 동어반복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히키의 표현에 따르면 “언어의 벽이 미술작품을 수많은 말로 두르고 작품들의 수명을 단축”했다. 인용문으로 뒤덮인 미술 비평은 읽을 수 없는 글이 되어 버렸다. 현대미술 작품이 난해하다고는 하지만, 작품을 해석한 비평은 더 난해했다. 후손들이 번창한다고 해서 모두 기뻐할 일이 아닌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중 열성인자를 유전한 못난 후손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면, 그 종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철저한 자기 점검과 반성이 필요해진 시점에 도달했다고 본다.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을 토론의 중심에서 추방한 제도화된 이론의 세력이 약화된 것은 이런 내적 발전의 결과만은 아니다. 90년대 초반 새로운 변수가 미술계에 그 실체를 드러낸다. 바로 시장이다. “이제는 모두 아트 페어에 다닌다!”는 감탄문으로 히키는 상황을 요약한다. 그러나 변화된 상황과 아름다움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아직 없다.

임근준의 지적대로 “이리저리 우회하며 산보하는 용은 불을 뿜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안이 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구체적인 전략이 제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메이플소프의 예에서처럼 아름다움은 상당한 위력을 가질 수 있다고 히키는 거듭 주장한다. 아름다움이 가진 직접적인 호소력은 기존 관념에 위배되는 새로운 생각을 전파하는 데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히키는 도덕적 책무로부터 미술작품을 해방시키려고 하지만 전복적인 힘을 가진 아름다운 예술은 기존의 도덕적 관념과 충돌하며 수정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변화하는 사회에서 더 많은 사회 구성원을 포용하고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도덕 자체도 부단히 개선되어야 한다. 개선의 중심에는 인본주의에 대한 끊이지 않는 성찰이 놓여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럴 때만이 히키가 주장하는 ‘아름다움과 민주주의’는 의미 있는 관계를 갖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파란 하늘과 탁 트인 고속도로”라고 히키는 말한다. 이 말은 미술 이론적 표현이라기보다 미국 서부지역을 자동차로 여행했던 쾌감의 표현처럼 들린다. 그는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것으로 쉽게 규정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무정부주의는 특정 정부를 해체시키는 무기는 될 수 있다. 장례식장에서 시체를 염하면서 조산원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내는 일을 동시에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낡은 흐름의 조종을 울리는 일이, 어떤 사람은 새로운 흐름의 탄생을 알리는 일이 역사적 사명이 된다.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기가 맡은 시체가 관을 열고 나와 거리를 횡행하는 좀비가 되지 않도록 마무리를 잘하는 게 중요한 법이다. 데이브 히키는 장례식장의 호객꾼 정도로 자기를 보여준다. 구제해야 될 것은 잠시 잃어버렸던 가치다.

히키의 말대로 아름다움은 죽지 않는다. “왕조는 소멸하며 국가는 붕괴한다. 학설은 효력을 상실하며 기관은 영락한다. 그러나 작품은 살아남는다.” 이 불멸의 비밀을 풀 새로운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지점에서, 이 책은 ‘보이지 않는 용’의 귀환을 촉구하는 기원제로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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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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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눈과 마음으로 느껴보는 옛 그림의 깊은 맛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12>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2003)과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 2』(1999년 초판 발행)

이진숙 kmedichi@hanmail.net | 제211호 | 20110327 입력 height=0 marginHeight=0 src="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 frameBorder=0 width=0 marginWidth=0 scrolling=no>
1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2003)2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999)
미술 시장에서 전통 회화와 한국화의 가격은 현대 미술품과 비교해 볼 때 이해할 수 없이 낮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가격이 작품의 질을 무조건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의 이런 편중 현상은 전체 미술계 발전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오래된 미술에 대한 부당한 평가는 2~3년 만에 사라지는 반짝 작가들의 존재, 갖가지 비리와 어우러져 시장의 피로감을 누적시키고 미술계 전체의 발전을 지체시킨다. 물론 전통 미술품 가격의 답보 상태는 각종 위작 사건 등과 관련된 불신, 주택 구조의 변화에 따른 장식성의 저하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전통 미술이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데는 근본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우리 것을 알아보는 안목의 결여’, ‘심미안의 부재’, ‘전통의 단절’이 바로 그것이다. 눈앞에 세계 최고의 명화가 있다 한들 알아보지 못하면, 그것은 불쏘시개용 종이에 지나지 않게 마련이다.

음악에는 ‘귀명창’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 음악 연주는 하지 못하지만 탁월한 청음으로 좋은 음악을 분별해낼 줄 아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음악 애호가들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담긴 멋진 개념이며 저변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귀명창들은 좋은 음악에 열광하며 공연, 음반 판매 등 음악 유통 과정의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내는 일등 공신들이기도 하다.

3 작자 미상, ‘이재(李縡) 초상’, 비단에 채색 97.9 x 56.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술에서도 직접 작품을 제작하지는 못하지만 좋은 작품을 알아보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심미안을 갖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눈대가’라는 말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미술 작품에 대한 안목과 식견이 중요한 교양의 잣대가 될 수 있도록 서로를 고무해보자는 말이다. 이는 미술 시장 및 미술계 전반이 특정 경향에 쏠리는 것을 막고 건전하고 다양한 취향의 작품이 존중받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귀명창’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듯 ‘눈대가’ 역시 부단한 노력으로 이루어질 터다. 심미안을 갖춘 ‘눈대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본인의 의지이며 두 번째는 당연히 좋은 스승이다. 좋은 스승의 눈을 빌려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몸으로 체득하며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가게 될 것이다. 오주석은 이런 의미에서 미술에 대한 열정과 한국 전통 미술의 아름다움을 눈뜨게 해주는 좋은 스승 중 하나다.

그는 2005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만 49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여러 책은 여전히 살아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2003, 솔출판사, 1만8000원)은 그의 다른 저서들과 전통미술 전반에 대한 좋은 입문서다.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열성이었던 그는 대중 강연에도 열심이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러한 강의 녹취를 기초로 했다. 책을 읽고 나면 그의 생전에 강의를 한번 들어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더 궁금하면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 2』(1999년 초판 발행, 솔출판사, 각 1만5000원)를, 그다음에는 더욱 상세한 논의로 『단원 김홍도』『이인문의 강산무진도』를 읽어나가면 좋겠다. 우리 옛 그림 ‘읽기’의 치열함과 즐거움에 매료될 것이다. 김홍도의 ‘씨름’은 이 책에 관련 도판만 8개가 실려 있다. 각 세부에 대한 설명에 따라 도판을 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품을 뜯어보고, 이리저리 굴려보고, 엮어보는 재미가 꿀맛이다.

이 책은 우선 옛 그림 감상의 두 원칙을 제시하고, 나아가 그림에 담긴 선인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며, 궁극적으로는 옛 그림으로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본다는 점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서화일률(書畵一律)의 전통에 따라 그려진 전통 회화는 옛 글씨를 쓰는 원칙대로 좌상우하의 법칙에 따라 읽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주장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는 가로쓰기에 몸이 굳어진 현대인들의 미술감상법을 우선 신체적으로 교정하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먼저 미술을 이해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설명 방법이다. 이러한 자세 교정은 “옛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사람의 마음으로 느끼기”를 위한 첫걸음이다. 개별 작가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만이 이 책을 읽는 보람의 전부가 아니다. 그가 작품을 설명하는 방법을 보면 심미안을 갈고 닦는 다양한 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주석은 잔재주만 품은 그림은 높이 보지 않는다. 손끝의 솜씨에 현혹되지 않고 그림 속에 깃들어 있는 위대한 인간의 마음을 우선으로 친다. 다른 책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 2』에서는 김명국의 ‘달마도’ 읽기를 통해 “작품에 대한 생각은 오래고, 그 구상은 깊되, 드러난 필획은 매우 간결하다”라고 우리 그림의 덕성을 집어낸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화풍과 비교하여 담백하고 독특한 우리의 회화 미학을 관통하는 말이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작가 김홍도는 어떤 것을 그려도 한국적인 특색을 드러내는 특출한 재주를 가졌다는 점에서 높게 평한다. 더 나아가 작자 미상의 ‘이재 초상’을 “인류 회화를 통틀어 최정상급 초상화”로 “렘브란트에 한 치도 밀리지 않는다”고 상찬해 마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음양오행론을 근간으로 하는 주역의 세계관이 우리 옛 그림의 바탕을 이루는 마음이며 우리 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미술에 대한 이해와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 땅에 대한 자부심으로, 국민적인 자존감으로 연결된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세종대왕 시절의 수준 높은 문화를 웅변하며, 김홍도의 작품들은 영·정조간의 치세를 배경으로 한다. 이런 위대한 미술품을 탄생시킨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논하면서 성리학적 민본주의에 기초한 “조선은 문화와 도덕이 튼실했던 나라”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떤 역대 대통령도 심어주지 못한, 국민적 자부심을 고양하는 발언이다. “예술에 국경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국경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높다”라는 그는 주장을 들으면 그림을 보는 심미안을 가진 ‘눈대가’가 되는 것은 더 나아가서 이 땅을 사랑하는 다른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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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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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가 있을 뿐”

이진숙의 ART BOOK 깊이읽기 <11> E.H.곰브리치의『서양미술사』

이진숙 kmedichi@hanmail.net | 제209호 | 20110313 입력 height=0 marginHeight=0 src="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 frameBorder=0 width=0 marginWidth=0 scrolling=no>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 207x209.5cm, 패널에 유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오늘은 내 자랑부터 해야겠다. 내 책꽂이에는 에른스트 곰브리치(1909~2001)가 지은 『서양미술사』 세 권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하나는 예경출판사에서 1997년 나온 한국어 책이고, 다른 하나는 1998년 모스크바에서 출판된 러시아어 책이다. 또 다른 한 권이 정말 자랑할 만한 것인데, 1950년도에 영국 파이든사가 발행한 영어 초판본이다. 출판된 지 60년이 넘은 이 책은 손때가 묻어 표지가 누렇게 변했다. 뉴욕에서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는 작가 변종곤 선생에게 선물로 받은 것이다. 앞 장에 쓰인 사인들을 보건대 적어도 변 선생이 네 번째 주인이고, 내가 다섯 번째 주인이다. 앞선 소장자들이 그랬듯 나도 자랑스럽게 내 이름을 썼다.

여섯 번째 주인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시 미술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이 책을 소중하게 다룰 사람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가장 좋은 서양미술사 개론서가 뭐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꼽는다. 미술사 공부에 관한 한 내게는 첫사랑 같은 책이기도 하거니와, 그 이후로도 더 나은 미술사 개론서를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68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과 작은 활자가 주눅들게 만들기도 하지만, 읽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100쪽, 200쪽을 훌훌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첫 발행 이래 30개국 언어로 번역돼 수백만 권이 팔린 미술 서적계의 신화적인 책이다.

이 신화의 원동력은 ‘이야기의 힘’이다. 원시미술부터 시작되는 긴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굽이굽이 넘어간다. 딱딱한 연대기와 사조별 분류에 의존하지 않는 곰브리치의 독특한 방법론 덕분이다. “1888년 겨울, 쇠라가 파리에서 주목을 끌고 있고 세잔은 엑스에 은거하며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 때, 젊고 성실한 한 네덜란드 화가가 남국의 강렬한 햇살과 색채를 찾아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로 왔다. 그가 바로 빈센트 반 고흐다”라는 식의 서술은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독자를 몰입시킨다.

이 책은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런 열린 태도는 각 나라와 각 시대의 다양한 미술 현상을 바라볼 때 대단한 장점으로 작용한다. 문화 간의 차이만 존재할 뿐 차별과 서열화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아프리카 원시 부족 미술이 서양의 미술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말이다. 다만 다른 미적인 가치를 가진 다른 미술품들일 뿐이다.

예술의 장르와 방법 형식에 제약을 두지 않는 이러한 입장은 미래를 향해서도 열려 있다. 자신의 예술적 과제에 맞추어 각종 미디어 아트 등 새로운 매체를 수용하는 미술가들의 존재가 적극적으로 용인될 수 있다. “미술의 모든 역사는 기술적인 숙련에 관한 진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 곰브리치의 기본적인 태도다.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를 곰브리치는 ‘아는 것’과 ‘보는 것’의 변증법적인 발전으로 기술하고 있다. 미술은 처음부터 독자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집단의 주술이나 종교 등 다른 목적에 종속돼 있었다. 그러므로 원시 미술과 이집트 미술에서는 인간이 ‘아는 것’을 표현해 내는 명확성이 가장 중요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눈으로 ‘보는 것’을 배워나갔다. 다른 목적에서 벗어난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찬란한 고대미술이 펼쳐졌다.

그러나 종교가 지배적이었던 중세에는 다시 ‘아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 르네상스 이후로는 ‘보는 것’이 다시금 중요한 문제가 됐다.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서술은 이 책의 가장 매혹적인 대목이다. 눈으로 ‘보는 것’이라는 관념이 극대화된 것이 인상주의다. 그러나 세잔은 인상주의자들의 화면에 등장하는 시각적인 현상의 무질서함을 극복하고 ‘아는 것’과 ‘보는 것’을 통합하려 했고, 이러한 입장은 피카소의 입체주의로 발전해 나간다고 책은 정리한다.

이렇게 미술 내적인 발전논리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가운데에도 각각의 미술들이 발전할 수 있었던 사회문화상이 명료하게 이해되는 것은 저자가 모든 역사적인 배경을 꿰뚫어 글 속에 완전히 녹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럽 교회의 장식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교회를 바라보며 중세 유럽인들이 느꼈을 종교적 경외감을 상기하라고 말한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좋은 미술서적은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품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1950년 처음 발행된 이 책은 20세기 초반까지의 미술사가 주 내용이다. 그중에서도 17세기 이전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20세기 미술에 관해서는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 또 동양미술의 대부분이 빠져 있고, 러시아를 포함한 옛 사회주의권 국가의 미술을 다루고 있지 않다. 책의 원제가 ‘The Story of Art’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서양미술사’로 번역된 이유다. 또한 저자의 조국인 영국의 미술을 다른 미술사 서적보다 많이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앞서 열거한 여러 탁월한 장점에 비하면 이런 문제들은 사소한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내게 미술사 서술의 또 다른 측면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진실 말이다. 처음 미국의 현대미술관(MoMA)에 갔을 때 나는 감탄을 연발했다. 책에서 본 모든 작품이 거기에 있었으니, 현대미술의 교과서 같은 미술관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미술사가 대부분 미국 미술을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번 다룬 『예술과 그 가치』의 저자 매튜 키이란 역시 영국 학자인데, 그는 “영국미술사를 기술하고 나면 미국에서 일어난 발전의 못난 사촌동생쯤으로 여겨지는 지적인 유행 좇기”를 통탄했다. 자국의 역사 전체가 홀대받고 있는 나라 한국. 한국 미술은 이러한 지적인 유행 좇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문득 서구의 학자들이 우리에게 말을 한다. 너희의 길을 가라고. 너희의 역사를 너희가 기록해야 한다고. 작가들이 외국에서 인정받은 후에나 덩달아 인정하는 몰지각한 일은 그만 하라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작가를 기록해서 알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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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그 가치
매튜 키이란 지음, 이해완 옮김 / 북코리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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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낯설게 하면서 마음에 맺히는 작품을 본 적 있습니까”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10> 매튜 키이란의 『예술과 그 가치』

이진숙 kmedichi@hanmail.net | 제207호 | 20110227 입력 height=0 marginHeight=0 src="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 frameBorder=0 width=0 marginWidth=0 scrolling=no>
서상익의 ‘길들여지지 않기’(2010), 145.5x112.1㎝, 캔버스에 유채
젊은 작가 서상익의 그림 ‘길들여지지 않기’에는 텅 빈 캔버스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관람객들이 묘사돼 있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좋은 작품이라니까 열심히 바라보지만 요령부득의 현대 미술은 관람객들에게는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텅 빈 무엇인지도 모른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제프 쿤스를 괜찮은 작가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형편없는 작가라 한다. 이런 논쟁 속에서도 그의 작품을 240억원에 구입한 ‘세계적인 바보’가 있으니 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그 ‘세계적인 바보’의 혜안을 이해 못 하는 우리야말로 궁극의 바보가 아닐까?

불행하게도 현대 미술을 이해 못 해서 악명을 떨치는 바보들의 리스트는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다. 미국의 상원의원 알폰소 다마토는 의회에서 안드레 세라노의 ‘오줌예수’ 복사본을 찢어버리는 사고를 쳤다. 전 뉴욕 시장인 줄리아니는 ‘센세이션’전에 출품된 크리스 오필리의 작품에 대해 반대하다 미술 관련 책자에 그 이름이 실렸다.

이 분야에서 가장 높은 악명을 얻은 것은 단연 히틀러다. 1937년 나치 주도로 개최된 ‘퇴폐미술전’은 독일의 위대한 정신을 타락시키는 미술들을 선보이는 전시였다. 여기엔 당시 독일 뮤지엄이 소장하고 있던 칸딘스키, 샤갈, 몬드리안, 말레비치, 파울 클레, 코코슈카, 뭉크와 피카소 등 20세기 초반의 최고 작가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의 작품 100여 점이 소각되거나 헐값으로 경매에 넘어갔다. 어리석은 지도자가 국부를 어떻게 탕진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런 악명 높은 ‘바보들’의 대열에서 벗어나 똑똑한 관람자가 될 수 있을까? 도대체 좋은 작품이란 어떤 것인가?

매튜 키이란의 『예술과 그 가치(Revealing Art)』(북코리아, 2010, 1만7000원)는 좋은 작품, 평범한 작품, 나쁜 작품에 대한 우리의 고민에 힌트를 준다. 이 책의 첫째 장점은 사고의 구체성이다. 점잔 빼는 영어 문체의 미묘한 뉘앙스 때문에 무턱대고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논지를 따라가다 보면 어떤 지점에서 어떤 사유가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것, 즉 사고의 조직화 과정도 배울 수 있다.

르네상스 작가로부터 현대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에 대한 풍부한 레퍼런스도 훌륭하다. 기괴하게 뭉그러진 사람을 그린 프랜시스 베이컨, 시체를 그리는 제니 사빌, 벌거벗은 나체를 그리는 루시앙 프로이트의 같은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론적 축복이 내려진다. 데미언 허스트나 트레이시 예민 같은 작가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훌륭한 우군이 생길 수 있다. 지적이면서도 세련되고 점잖은 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작품을 구별하는 안목을 키우고 싶다면 “예술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반응을 탐험하라”고 매튜 키이란은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좋은 예술이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삶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세계를 보는 방식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다. 반면 나쁜 작품은 당대의 취향에 굴복하며, 경험의 확장이라는 문제의식이 없고, 단선적인 주장을 반복하는 작품들이다.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면서 정신의 지평을 확대하는 예술이 제시하는 내용은 때로 상식을 넘어서 부도덕해 보이기도 하고 그 형식은 새롭다 못해 기괴하고 낯설어 보일 수 있다. 지금 당신을 불편하게 하면서도 마음에 맺히는 작품이 바로 그런 작품일 확률이 높다. 바로 “그런 그림들을 꾸준히 바라보고 그것들에 반응하는 것은 우리를 보다 식별력 있는 지각자로 만든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좋은 작품들은 ‘시간의 테스트’를 견디어내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클래식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문제는 테스트할 시간을 갖지 않고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소위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이다. 이 중 옥석을 가려 미래의 클래식을 알아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계적인 바보’에서 ‘세계적인 성공한 컬렉터’가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저자가 제시하는 기준은 여전히 막연해 보인다. 삶에 대한 어떤 측면에서의 통찰력인지, 어떤 새로운 지각 경험을 제공하는지는 작품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절대로 몇 개의 기준으로 표준화가 되지 않는 영역이 바로 예술의 영역이다. 통계학적인 지표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다수의 오류가 가장 잘 드러나는 영역이 미술의 영역이기도 하다. 1907년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처녀’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지구상에 열 명이 채 안 되었다. 사정은 30여 년이 흐른 뒤에도 마찬가지여서 프랑스 정부는 이 작품의 구입을 망설였고, 결국 이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은 미국에 팔려갔다.

저자는 동시대를 시장의 압박이 점점 교묘해지는 가운데 창작력이 고갈돼 ‘재활용된 것의 끝없는 재활용’ 현상이 두드러진 시대라고 진단한다. 데이비드 호크니를 포함한 일부 탁월한 예를 제외하고는 “그저그런 평범한 작품들의 시대”라는 것이다. 르네상스와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시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대가 그래왔듯 말이다.

결국 이야기는 다시 ‘안목’이라는 비학구적인, 직관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 같다. 서구식 표현으로는 ‘취향의 형성’인데, 키이란은 이것을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 속에서 경향적으로 체득되는 것이라 말한다. 포도주나 커피를 마셔봐야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해낼 수 있는 것처럼, 예술 감상은 직접적인 감상의 반복을 통해서만 세련되어진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충고로 책을 끝맺는다.

“무엇보다도 감상자는 예술가가 하려는 것에 개방적이어야 하고,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취미의 섬세함을 위한 노력은 도덕적인 분별력이나 이해와 마찬가지로 끝이 없는 과정이다. 내적인 삶을 도야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당신이 히틀러의 대열에 서지 않으려면 몸을 더 낮추어야 하고 예술가들이 쏟아내는 다양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미술 관련 글을 쓰는 것이 주업인 나의 경험에 비춰 말하자면 이 ‘내적인 삶을 도야’하는 과정은 힘든 만큼 즐겁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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