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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동물원
진 필립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평점 :
<밤의 동물원>이라는, 살아있는 것도 죽어있는 것도 아닌 듯한 공간을 상상하게 하는 제목을
접했을 때만해도 나는 이 소설이 그저 스릴러일 것이라는 가정을 했다. 그리고 비가 억수로
세차게 쏟아붓던 날 밤, 딱 그 이틀 동안 소설을 맨 끝부터 거꾸로 보고 싶은 숱한 욕망을
뿌리치며 읽어야 했다. 마침 그 때는 텍사스의 어느 고교에서 총기난사가 '또' 일어난 날이다.
공포라는 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인류 모두에게 공통분모를 가지는 것들이 있지만,
이 소설이 제시하는 공포는 장르 그 자체에서 오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장르를 떠받치는 구조와 인물들에서 오는 것들이 꽤 크다.
이 소설 속에서는 폐장이 되는 시간 동물원에서 벌어지는 총기 난사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총기 난사라는 것이 흔하디 흔한 그것이 된 이후에는 이런 사건이
배경이 되는 콘텐츠들이 비일비재하겠지만, 이 소설은 그 안에서 '엄마'의 시선을 택한다.
주인공 조앤은 엄마이고, 나는 둘을 키워봤기 때문에 어두워지는 동물원이 아니라
어두컴컴한 극장에서조차 4살짜리 링컨과 같은 아이들이 얼마나 시끄러울 수 있는지
얼마나 쉬지않고 조잘대는지 잘 알고 있다. 일단 등장 인물의 설정부터가
나같은 엄마에게는 대략 거대한 공포가 된다.
그러나 이 책이 그러한 단순한 스릴러로 나를 붙잡아두지 않는 것은
이 공포스럽거나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상황 속에서 조앤이 아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그 어떤 명확한 목표 이상의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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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레껏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지면, 그 뒤에는 희생자들의 면면을 이야기하는
형식적인 기사들이 뒤를 따르고, 총기를 휘두른 아이가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는지
또 SNS에는 어떤 암시글들을 올렸고, 어떤 락밴드의 음악을 좋아했는지,
학교 생활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글들이 나온다. 하지만 일단 아직 10대일 뿐인 아이가
불특정다수에게 그런짓을 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 뿐만 아니라,
희생된 이들과 저지른 이들 개개인의 면면이 구체화되어 하나의 현실로서
구조를 갖추는데까지도 우리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 자리에 있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있었던 수많은 연쇄의 고리들이 형체를 갖추도록 하는
이해력이나 상상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분명히 말한다. 이러한 폭력과 분노의 한가운데에 있는
'엄마'라는 존재가 느끼는 아주 투명하고도 차가운 공포같은걸 말이다.
내 아이를 문밖에 내놓을 때에 당장 그 아이가 어떻게 될까봐 부들부들 떠는 류의
부모가 아니라도 우리는 그 현실을 잘 안다. 엄마에게는 두가지 양극단의 공포가
있다. 내 아이는 총을 맞는 아이가 될수도 있고, 혹은 닥치는대로 쏴죽일 수 있는
아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어느 쪽도 되지 않도록 키우는 일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또 그 어느쪽이 되든 뿌리를 엄마에게서 가장 먼저
찾으려고 하는 것이 사회의 심리라는 것도 잘 안다.
이 소설은 그래서 그 몇시간 되지 않는 시간적 배경 속에서, 아주 짧고 간결한
문장들로 공포를 키우면서 동시에 부드럽게 감정 및 심리 묘사로 독자들을 이끈다.
단순한 스릴러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심리 묘사는 주인공인
엄마 조앤 뿐만 아니라 사건을 저지르고 있는 녀석들과 한때는 이 아이를 가르쳤던
은퇴한 여교사, 또 함께 살아남고자 애쓰는 10대 소녀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둘러싼 가족과 관계, 과거의 이야기들을 타고 넘는다.
이 섬세함과 탁월한 묘사가 이 소설이 가지는 가장 큰 강점이자,
이 죽지도 살지도 않은 공간에서 공포를 극대화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 공포는 심리묘사를 타고 넘으면서 커졌다가 이완되었다가 다시 극대화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우리가 늘상 짤막한 신문기사로 지나쳤던 수많은
'사건'들의 단면들을 엮어 이야기로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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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가 이런 공포와 분노를 엄마의 입을 통해 이야기해주어 고맙다고 느낀다.
비록 우리는 아들래미가 총기 난사를 할만큼 위험한 나라에서 살고 있진 않지만
대신 동급생에게 성매매를 알선하든 왕따를 시키든 집단 구타를 하든,
상상하기 힘들었던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세대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 탁월한 표현 가운데 하나를 일기에 적었다.
내 아이가 양쪽 중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공포가 문득문득 떠오를때,
또 그렇게 되든 되지 않든, 책임은 결국 엄마라는 존재에게 대다수 지워질거라는걸
잘 알고 있는 이 불균형한 세상에서... (그렇다, 우리는 이미 아기가 통제할 수 없이
울어대는 갓난아기였던 시절부터 맘충이네 어쩌네 소리를 들어온 세대다)
이런 위안을 주는 스릴러라니 아이러니가 아닌지.
"그녀는 제 역할을 해내야만 한다. 결코 그녀는 아이들에게 익히지 않은
쿠키반죽을 먹지 못하게 하거나, 보호자가 없으면 한 블록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공포를 다루지 못하면 결코 아이가
현관을 걸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다. ...(중략) 그런 생각을 할 경우
자신이 어떤 짐승을 풀어놓게 될지, 얼마나 거대한 틈새가 쩍 벌어지게 될지
막연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이가 생기면 그렇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부모는 스스로를 상상 불가능한 고통에 드러내놓은 다음 그럴 가능성이 없는 척 한다."
- <밤의 동물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