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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사람을 위한 미술관 - 명화가 건네는 위로의 말들
추명희 지음 / 책들의정원 / 2024년 11월
평점 :

정신분석 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무의식적 '방어기제'가 있다고 한다.
부정, 억압, 반동형성, 전이, 투사 등 듣기만 해도 부정적인 어감을 자랑하는 말 그대로 방어적인 기제도 있지만 그 와중에 승화라는 것이 있다.
승화란 본인의 부정적 특성과 욕구를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선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예가 예술로서의 발현이다. 가장 바람직한 방어기제 중 하나로 미술치료 이론의 거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가들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것은, 그들의 아픔과 고독, 상처를 굳이 굳이 찾아보는 것은 어쩌면 그 승화의 기록을 살펴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 속으로 기꺼이 고통을 끌어안은 17인의 예술가, 상처는 어떻게 작품이 되었는지, 어떤 고독과 아픔이 예술로 승화되었는지 이번 책을 통해 마주할 수 있다. 아픔을 녹아든 그림이 명작이 되듯, 상처를 견대낸 삶은 작품이 된다.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나온 그림, 프란시스코 고야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극중 흐름상 경고의 의미로 나온 그림이다. (제목을 진짜 못 외우겠네, 지금까지 부잣집 막내아들인 줄 알았다)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프란시스코 고야.
자신의 아들에게 권좌를 빼앗긴다는 신탁을 받은 사투르누스는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면 자식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많은 화가들은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그림을 그릴 때 위협적인 포즈만 취하지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자식을 뜯어먹는 광기의 모습을 그리지는 않았다. 이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스페인 화가였던 고야는 전쟁을 직접 여러 번 겪으면서 스페인 편에 붙었다, 프랑스 편에 붙었다가를 반복하며 살아남은 화가다. 보통 침략을 당하면 왕가에 있던 사람을 모두 죽이기 마련이건만, 고야는 실력과 아첨으로 살아남았다.
젊은 시절부터 욕망 하나로 스페인 궁정 화가로 가장 잘 나갔지만, 지옥 같던 전쟁을 겪으면서 보았던 인간의 잔인한 군상과 살아남기 위해 떨었던 아부. 이런 것들이 인간의 영혼을 온전하고 평온하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야는 부와 명예 모두 지녔지만 결국 귀가 멀게 되며 점점 은둔 생활을 하며 집에 '검은 그림' 연작 시리즈를 미친 사람처럼 그리다 생을 마감했다.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도 이 검은 그림 연작 중 하나다.
<모래 늪의 개> 또한 검은 그림 연작 중 하나로 모래 늪에 빠져 죽음을 앞둔 개의 모습을 그렸다. 발버둥 치는 것은 오래전에 포기했을 터이고 곧 모래바람이 닥치며 모래 속으로 깊이 침전할 터이다. 두려움보다는 허공을 응시하는 개의 눈빛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 작은 개는 곧 고야 자신이 아닐까.
쓸쓸함과 고독, 두려움 그 사이에서 죽음을 앞둔 이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공경 받고 성공한 인생 한 번 살아보겠다고 전쟁도 하나의 소재로 삼아보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공허한 마음만이 고개를 들었을 것이다.
먼지 한 톨도 반짝거린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요하네스 베르메르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림도 37점 정도밖에 없고, 생애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만큼 사랑받는 화가도 또 없다.
무엇보다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는 귀족이나 왕족, 신이 없다. 일을 하고 있는 하녀나 악기를 연주하고 편지를 보는 여인 등 당시 네덜란드의 일상 속의 여성들만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 부끄럽지만 나는 이전에 그런 일상을 따분하다고 생각했다. 별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루하루를 소박하고 주어진 일을 착실히 하는 것은 재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반드시 뭐가 되어야만 멋진 삶이라고 생각해 마음만 앞서가다 다치기 일쑤였고, 그렇게 넘어지면 스스로를 루저라고 여겼다.
아름다움과 빛나는 것이란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마주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일상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임을 그런 일생이 숭고한 삶임을 베르메르의 그림은 알려준다.
베르메르 자체도 그런 사람이었던 듯하다. 고요하고 소박하고 하루하루를 그림으로 성실히 채웠던 사람. 다른 화가들처럼 막장 스토리를 얹지도 않았고 전쟁을 겪지도 않았지만 일상이 주는 아름다움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전에는 빵값이 외상으로 밀렸고 작업 속도도 더뎌 큰 인기와 부를 누리지는 못했던 화가로, 죽고 나서도 오랜 시간 동안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진주 귀고리의 세부 묘사 대문이 아니라 소녀가 마치 진주처럼 내면의 광채로 빛나기 때문에 이 그림이 특별해졌다고 한다.
먼지 한 톨에서도 반짝이는 햇빛을 알아보는 것, 일상의 아름다움을 고요히 마주하는 눈빛,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면서 나의 영혼을 시들지 않게 지키는 방어기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