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걸음으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4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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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유태인 혈통의 다비드 프랑크프루터는 광신적인 나치 간부 빌헬름 구스틀로프를 살해한다. 제3제국은 새로 진수되는 여객선에 구스틀로프의 이름을 붙였고, 배는 제국의 영광과 몰락을 함께 했다. 붉은 군대가 독일 국내로 밀어닥치던 전쟁 말기에 구스틀로프 호는 피난민을 실은 채 어뢰를 맞고 침몰한다.  

소설의 소재가 되는 구스틀로프 호의 침몰은 1945년 1월의 발트 해에서 있었던 실제 사고다. 정원을 초과한 1만명 이상의 피난민이 대부분 사망한 비극은 아직까지 최악의 해난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작가는 소수의 생존자의 후손을 화자로 삼아 사고의 전후를 비추고 있다.  

'게걸음으로'는 단지 사고를 재현해보려는 취지에서 쓰여진 글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여객선의 이름의 주인공이 되는 나치광신자와 유태인 암살범과 구스틀로프 호를 침몰시킨 러시아인 함장의 궤적을 짚어간다. 선형의 교차점이 구스틀로프 호의 침몰이었을 뿐이다. 특정한 사건이 당사자들의 인생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귄터 그라스의 글은 시뮬레이션과도 흡사하다.  

만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낸 배의 침몰은 분명 비극이다. 그러나 사고를 둘러싼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특정한 입장으로 단정내릴 수는 없다. 나치독일이 러시아에 행했던 무자비한 살육과 묵시적으로 침략과 제노사이드에 동의했던 독일국민들을 생각해보자. 

작가 역시 분명한 입장을 정해두지 않지만 후대의 장면들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구스틀로프 호의 생존자인 화자의 어머니는 손자에게 증오를 주입한다. 그로인해 벌어진 살인은 개인이 과거의 망령에서 자유롭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악의 사슬을 우리 대에서 끊지 못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스스로에게 촉구하게 된다.  

귄터 그라스가 말년에 발표한 '게걸음으로'는 사실 그의 대표작들만큼 와닿지 않았다. 이는 글의 과녁이 전인류적 보편성보다 독일인으로 좀 더 좁혀져 있기 때문일테다. 정치적인 이유로 묻혀있던 구스틀로프 호를 과감히 소재로 삼아 희생자들을 위로하며, 실존과 가공이 편집된 스토리로 독일 현대사를 작가다운 방식으로 재구성해 나간다. 사고를 바라보는 복잡한 심경은 독일인이 아니라면 쉽게 추측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물론 이는 반성없이 희생자들에게만 조명을 비추는 일본적인 회고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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