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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 온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2
알베르토 푸겟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마티아스는 수학여행으로 떠났던 브라질에서 칠레로 돌아오자마자 숨막혀한다. 자신을 둘러싼 모두에 시큰둥해하며 때론 증오한다. 특권층 자제끼리 뭉친 칠레판 오렌지족에 끼여서 클럽과 바를 오가며 코카인과 섹스와 알코올에 의존한다. 한국적 시각으로 사춘기의 방황이라기엔 수위가 쎄지만 마티아스가 속한 계층과 남미 특유의 개방적인 문화를 떠올리면 납득이 된다.
밤거리를 쏘다니고 개학한 학교에서 공부를 지속할 의미를 찾지 못하며 저마다 막장 사연을 가진 가족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일주일를 보노라니 기시감이 든다. 다름아닌 '호밀밭의 파수꾼'과 판박이다. 이는 작가의 의도이다. 마티아스가 매료된 몇안되는 책이 샐린저의 그것이었고, 책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를 열렬히 사랑하기에 가출해서 그의 행적을 따라하기에 이른다. 이는 확고한 자아가 자리잡지 못해 외부의 영향에 취약한 사춘기 소년의 내면을 잘 보여준다. 가족 구성원 중 존경하고 조언을 구할만한 롤모델이 없는 소년의 비극이다.
그래서 '말라 온다'가 단순히 '호밀밭의 파수꾼'을 오마주한 성장소설인가. 그렇진 않다. 9개의 단락마다 1980년 X월 X일을 명시하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방황하는 마티아스의 뒤로 당시 칠레의 시국은 언뜻 과다할만큼 묘사된다.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는 두번째 임기를 위해 요식행위일 뿐인 선거 캠페인을 전개한다. 기득권에 속한 마티아스의 가족들은 당연히 피노체트를 지지하지만, 8년 전 쿠데타에 대항해 장렬히 사망한 아옌데를 그리워하는 이들도 간간히 등장하며 아물지 않은 사회갈등을 추측케 한다. 또한 친미적인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칠레 고유문화라는 것을 적어도 소설 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들 미국을 동경하고 영미권의 문화에 종속되어 있다.
때문에 마티아스를 중2병에 걸린 비행청소년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소년의 기저에는 성호르몬의 과다분비 뿐만 아니라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체제에 있었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통금시간을 고수하는 억압적인 사회이면서도 매춘과 마약이 공공연하게 거래되는 위선적이고 타락한 1980년의 칠레는 전체주의 독재 국가의 전형이다. 소설에 흐르는 시대정서를 공감하는 한국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같은 시기에 같은 처지에 있었던 우리의 과거를 떠올려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