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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갈 ㅣ 김원일 소설전집 9
김원일 지음 / 강 / 2014년 7월
평점 :
강재필은 소년원을 다녀온 후 절도와 폭력에 익숙해졌다. 더구나 무기력과 자살충동을 동반한 발작은 그나마 남아있던 그의 내면을 주기적으로 휩쓸었다. 감방에 있던 강재필에게 만난 적 없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도 근원적인 물음에 이를 수 밖에 없었다. 저주받은 정신과 육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강재필의 회상으로 그의 아버지 강천동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독립투사로 알려진 그의 할아버지 강치무 역시 강재필과 같았다. 거구와 괴력과 능수능란한 언변, 그리고 강재필을 괴롭히는 파괴적인 발작은 세 남자의 공통점이었다. 신념과 신의 따위는 저버리고 생존에 집착하는 그들을 통해 한국의 20세기가 펼쳐진다. 할아버지 강치무의 눈으로 만주에서의 무장독립투쟁과 익히 알려진 731부대의 천인공노할 전쟁범죄가 묘사된다. 아버지 강천동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이룩된 고도성장기의 희생자였다.
3인에 시대가 응축되어 있다. 소설에 굉장히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기능을 떠나 인물들 자체가 생생했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한 성격의 남성들을 살면서 몇몇 목격했다. 견디기 힘든 그들을 어쩔 수 없이 곁에 두고 바라볼 때, 좌절감과 슬픔이 간간히 드러나며 뒤섞여 풍기는 냄새는 뭐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이었다. 김원일의 글은 그런 기억을 깨운다.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3대를 지켜보며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근대의 철학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운명의 족쇄에서 벗어날 자유의지를 촉구했다. 하지만 DNA 속의 유전자가 발견된 지금에 보면 어떤가.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유전자정보는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선천적인 특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돌연변이의 탄생과 후천적인 환경의 도움이 필요하다. 오로지 개인의 의지로 생의 질곡에서 벗어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강인한 육체와 외부로 투사되는 폭력적 성격이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물려받았음을 알게된 강재필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책의 결론은 보기에 따라서 생뚱맞다고 볼 여지가 많지만, 결론에 이르는 심적변화와 인물들의 인상만으로도 책과 함께한 시간이 의미있었다.
'전갈'은 김원일이라는 작가가 다시 보이는 책이다. 과거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에는 걸출한 능력을 발휘했음에도 현시대의 묘사는 어색하고 무리한 구석이 많았었다. 그러나 누아르와 역사소설의 형식을 섞어 혈통의 뿌리를 추적해가는 한 인간의 투쟁으로 귀결되는 방식은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특히 강재필의 입을 빌려 하류인생이 펼쳐지는 부분들은 소설의 백미이다. 즉흥적이고 그래서 더욱 생생한 글의 흐름과 리듬은 돌이켜봐도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