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테리아 7호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 / 엘릭시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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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년 특집답게 알찬 글들로 꽉 차 있음에도 역시나 ˝쎈˝ 글은 정성일의 <곡성>의 비평 아닌 비평. 거기서 그렇게 해석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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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 퓨처클래식 4
세라 워터스 지음, 김지현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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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찬란했지만 전쟁 후 몰락한 젠트리 가문의 짐덩어리 같은 저택을 힘겹게 지켜내는 아가씨와 노모. 그들 앞에 낯선 이방인이 침입하여 갈등을 일으킨다. 여기까지는 <리틀 스트레인저>의 동어반복이다. 거기에 덧붙여 주인공 아가씨인 프랜시스와 세입자인 릴리안이 동성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묘사는 <핑거스미스>의 수와 모드, <벨벳 애무하기>의 키티와 낸시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핑거스미스>의 애절함과 <벨벳 애무하기>의 격정보다 못하다는 인상이다.

동성애의 코드를 빼고 보면 프랜시스와 릴리안의 사랑은 진부한 불륜치정극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레즈비언 소설로서의 강점도 약한데, 로맨스물로서의 매력도 그닥 없는 것이다. 이 진부한 스토리는 결국 진부한 파국을 낳고, 서사는 뜬금없이 두사람의 도덕적 회의감 일색으로 흐른다. 결말에 이르러선 <죄와벌>을 어정쩡한 해피엔딩으로 만든 인상마저 든다.

이 작품이 정녕 그간 믿고 읽어왔던 세라 워터스의 필력인가. 기대치가 높았던 내 눈에는 자기표절과 짜깁기로 밖에 안보인다. 그나마 우호적으로 평가할 부분은 현장감 있는 시대 묘사인데, 이건 이미 전작들을 통해 실력을 증명해왔던 바라 새삼스럽지는 못하다. 작가가 이 소설의 집필을 위해 참고한 서적 목록으로 어림짐작 해본다면 릴리안을 통해 플래퍼로 불리던 1920년대 여성의 모습과 허술했던 20세기 초반의 영국사법부를 그려내고 싶었던 듯 한데, 그 어느 쪽도 충분할만한 치밀함이 떨어진다. 주인공 프랜시스의 우왕좌왕한 심리묘사에 무게중심이 너무 몰린 탓이다.

그렇다고 프랜시스가 공감할만한 인물로 그려졌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초반에 여성 참정 운동가로서 당시의 진취적 여성을 대변하는가 싶더니만, 사랑에 빠지면서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온데간데 없다. 심지어 당대 여성운동가로 이름을 떨친 에머린 팽크허스트에 대한 언급조차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여성들은 프랜시스의 흐릿한 뒷배경으로 전락한다. 차라리 최근에 개봉한 영화 <서프러저트suffragette>를 보는 쪽이 당시의 시대상과 여성의 역할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쉬울 것이다.

도대체 이 소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전후 몰락하는 젠트리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성과 계급을 뛰어넘은 애절한 동성 사랑 이야기도 아니고, 남성우월주의와 여성차별을 통렬히 비판한 소설도 아니고, 뛰어난 묘사력의 시대극으로서도 아쉽기 그지없다. 작중에서 몇차례나 <안나 까레니나>를 언급하며 프랜시스와 릴리안의 사랑을 그에 빗대는데, 유감스럽게도 철저히 메일-게이즈malegaze로 그려진 안나 까레니나의 비련함보다도 피메일게이즈로 그려진 프랜시스-릴리안의 그것이 훨씬 못하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소설로 명성을 얻은 세라 워터스의 패착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아직 50초반의 전성기이고, 레즈비언 소설로 이만한 성취를 보인 작가도 드물다. 그래서 아직까진 이 작품 하나로 실망하기는 이를지도 모른다. 모쪼록 차기작은 그의 인생작이라고 불릴만한 역작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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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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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비슷하다. 자기 방식을 강제하는 엄마가 있고, 그에 억눌려 순종하듯 살다 어느날인가부터 반기를 드는 딸이 있다. 클리셰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설정은 지긋지긋하다가도, 어느새 타인의 소문을 듣듯 나도 모르게 귀기울게 된다. 모녀의 이야기, 부모자식간의 이야기는 결국 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이야기 같은 내 이야기를 읽으며 가능한한 내 자신을 객관화하고, 돌아보고, 반성하며, 또한 위안받는다. 딸로서의 어리석었던 실수가, 엄마로서의 무수한 시행착오가 오로지 나만이 저지른 대역죄가 아님을 깨닫고 과거의 형벌같은 이 삶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치뤄야 할 시련을 겪으며 성장 혹은 체념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 역시 그 순간으로 강제로 돌아가 나의 비루했던 과거와 그때 그 심정을 복기하게된다. 그래서 소설의 초반에는 전적으로 딸인 에이미의 감정에 이입되어 엄마 이저벨에 대한 원망과 비난을 함께 품는다. 잔소리하는 엄마, 간섭하는 엄마, 감시하는 엄마, 딸에게 화풀이하는 엄마. 이런 엄마는 싫어. 다른 엄마였으면 좋겠어,하고 간절히 바라는 에이미의 소망은 아마도 거의 모든 딸들이 한번쯤은 품어봤을 소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쉬는 시간에 학교 뒷편에서 몰래 담배를 피는 정도의 일탈은 나름 수긍한다.

그러나 에이미가 순진한 사랑에 눈이 멀어 유부남인 수학선생에게 기꺼이 몸을 내어주려고 할때, 돌연 시점은 이저벨의 그것으로 바뀐다. 그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작가는 이저벨의 안쓰러운 사연들을 연이어 배치한다. 이 무렵이 되면 더이상 엄마 이저벨을 비난할 수 없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딸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죽도록 노력했던 이저벨의 모습 위로, 엄마의 위치에서 숱하게 좌절하고 자책해온 내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사건, 한번의 계절로 이저벨이 완전히 뒤바뀌지는 않지만 엄마로서의 이저벨은 깨닫는다. 자식에 대한 헌신과 사랑은 오로지 자기 몫의 숙명일뿐이라고. 때가 되면 자식은 그들이 원할때 기꺼이 떠나보내야하며 그동안 부역해왔던 보상심리는 자기 인생의 또 다른 출구 앞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이런 이야기의 결말이 늘 이렇게 끝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잊지않고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 솔직하지 못한 딸이며 자식을 구속하려드는 엄마다. 성숙해지길 원하면서도 이미 성숙했다고 오만한 착각을 할까 두렵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을 또 찾아 읽고, 듣는다. 시행착오를 하지 않는 내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 앞으로 수없이 시행착오를 해나가더라도 나 자신과 내 자식에게 보다 너그럽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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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고요히
김이설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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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나 끔찍한 인생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살만하다고 위무하자니 내가 이들과 몇십보 차이인지 거리를 재게된다. 내 과거와 별 차이없는 사연도 있고, 지금 당장은 이들만큼 당장 절박하지 않아도 외줄 타는 하루하루,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알 수가 없다. 현실적 계산기만 두드려봐도 미래는 조금도 나아질 가망이 없어보이고 어쩌면 이들의 처참한 막장이 곧 내 얘기가 될 것도 같아보인다.

그러니까 이 얘기는 어디선가 있을 법한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설마 나한테 그런 일이 있겠어 싶은 일은 최소 한번쯤 반드시 찾아온다. 정말 한두번 정도만 겪은 사람이 있다면 그걸 인생의 훈장쯤으로 여기고 내심 뿌듯해하며 살아갈지 모르겠으나, 세번 네번도 부족해서 이게 어쩌다 오는 시련이 아니라 그냥 내가 삶이라는 지옥에서 받는 형벌이구나를 깨닫는 사람은 희망도 미래도 꿈도 뭣도 없이 그냥 목숨줄이 끊어질 때까지 썩어만간다.

그 썩은 내를 오롯이 나 자신만 맡으면 좋으련만, 어쩔 수 없이 가까이 사는 피붙이에게 그 냄새가 배어들어간다. 절망의 대물림이 그렇게 이어진다. 그래도 자식이 희망이지 살길이지 하며 우왁스럽게 자식목을 붙잡고 흔들어대면 더 빠르게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어간다. 자식과 같이 죽겠다는 심산이 아니라면 빨리 그 손을 놓아야하는데, 동앗줄 마냥 비틀어쥔 자식의 목을 놓지 않으면 결국 생존본능을 찾아 자식이 먼저 그 붙든 부모 손을 잘라내버린다.

그러니, 희망도 미래도 꿈도 없는 늙고 지친 내가 살고 싶어 사는게 아니라 자식 때문에 산다, 는 말은 매번 자기기만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식은 희망이 아니다. 살아야하는 지옥에서 필히 받아야하는 형벌이다. 죽음이 올때까지 복무해야 하는 감옥에서의 속죄다. 오로지 내몫이기에 자식에게는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생채기를 내선 안된다. 내 살점를 뜯어내 먹이고 내 피를 부어 목을 축이게한들 괴로운 내색없이 기꺼이 내줘야한다. 그게 억울하다 생각하는 순간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따위의 말이 기어이 나가고 그때부터 자식은 자식이 아닌 나와 함께 형벌을 받는 부모의 노예가 된다.

그런 노예로 살아온 내가 부모의 악취에 절어 몸도 마음도 망가진 채로 또 자식을 낳았다. 사람이 밥한끼 먹자고 이토록 살아간다는게 우습도록 허탈해서 까짓 미련없다 하고 내멋대로 죽자니 그 죽음의 악취가 또 자식에게 고스란히 배길까 그러기도 쉽지 않다. 나 하나 망가졌음 됐지 자식은 망가뜨리지말자 하고 꾸역꾸역 사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자식에게 보상을 받으려하면 그 또한 악취나는 지옥이 되니 애초에 보상 따윈 바라지도 말고 바라서도 안된다.

<˝나도 따라 죽을거야.˝ 이렇게 되뇌니, 세상처럼 마음도 고요해졌다. (p110)>

나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 더 떨어질 데 없을 것 같았던 절망의 어느날, D-day를 계산해주는 어플을 받았다. 날짜를 2***년 *월 *일로 입력했다. 그 부근쯤 되면 아들은 스스로 독립할만도 하고 어미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무심해질 때이다. 그 날을 죽는 날로 하자 하고 며칠 남았나 계산해보니 1***일 남았다고 알려줬다. 고작 1***일. 내 삶의 형기가 그만큼만 남았다 생각하니 짓눌리던 숨통이 트였다.

삶의 보상이 죽음인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생명은 고귀하니 어떻게든 사는게 옳은 것이라 강요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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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 소설가 박완서 대담집
김승희 외 지음, 호원숙 엮음 / 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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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책이긴한데, 어째서 ˝김연수˝의 신간이라고 알림 문자가 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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