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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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비슷하다. 자기 방식을 강제하는 엄마가 있고, 그에 억눌려 순종하듯 살다 어느날인가부터 반기를 드는 딸이 있다. 클리셰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설정은 지긋지긋하다가도, 어느새 타인의 소문을 듣듯 나도 모르게 귀기울게 된다. 모녀의 이야기, 부모자식간의 이야기는 결국 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이야기 같은 내 이야기를 읽으며 가능한한 내 자신을 객관화하고, 돌아보고, 반성하며, 또한 위안받는다. 딸로서의 어리석었던 실수가, 엄마로서의 무수한 시행착오가 오로지 나만이 저지른 대역죄가 아님을 깨닫고 과거의 형벌같은 이 삶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치뤄야 할 시련을 겪으며 성장 혹은 체념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 역시 그 순간으로 강제로 돌아가 나의 비루했던 과거와 그때 그 심정을 복기하게된다. 그래서 소설의 초반에는 전적으로 딸인 에이미의 감정에 이입되어 엄마 이저벨에 대한 원망과 비난을 함께 품는다. 잔소리하는 엄마, 간섭하는 엄마, 감시하는 엄마, 딸에게 화풀이하는 엄마. 이런 엄마는 싫어. 다른 엄마였으면 좋겠어,하고 간절히 바라는 에이미의 소망은 아마도 거의 모든 딸들이 한번쯤은 품어봤을 소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쉬는 시간에 학교 뒷편에서 몰래 담배를 피는 정도의 일탈은 나름 수긍한다.

그러나 에이미가 순진한 사랑에 눈이 멀어 유부남인 수학선생에게 기꺼이 몸을 내어주려고 할때, 돌연 시점은 이저벨의 그것으로 바뀐다. 그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작가는 이저벨의 안쓰러운 사연들을 연이어 배치한다. 이 무렵이 되면 더이상 엄마 이저벨을 비난할 수 없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딸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죽도록 노력했던 이저벨의 모습 위로, 엄마의 위치에서 숱하게 좌절하고 자책해온 내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사건, 한번의 계절로 이저벨이 완전히 뒤바뀌지는 않지만 엄마로서의 이저벨은 깨닫는다. 자식에 대한 헌신과 사랑은 오로지 자기 몫의 숙명일뿐이라고. 때가 되면 자식은 그들이 원할때 기꺼이 떠나보내야하며 그동안 부역해왔던 보상심리는 자기 인생의 또 다른 출구 앞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이런 이야기의 결말이 늘 이렇게 끝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잊지않고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 솔직하지 못한 딸이며 자식을 구속하려드는 엄마다. 성숙해지길 원하면서도 이미 성숙했다고 오만한 착각을 할까 두렵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을 또 찾아 읽고, 듣는다. 시행착오를 하지 않는 내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 앞으로 수없이 시행착오를 해나가더라도 나 자신과 내 자식에게 보다 너그럽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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