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전에 줄리언 반스의 책을 읽고 왠지 모르게 나와 안맞는 작가라는 생각을 했다. 예쁘게 디자인된 번역본 양장과 평론가들의 극찬에 책은 어느샌가 전부 사다 모았지만, 그중 제대로 읽은 건 두어권도 되지 않을 정도로 참 손이 안갔다. 그렇다고 딱히 싫어할 이유가 있지도 않았다. 진짜로 싫다 싶으면 호평이건 디자인이건 상관없이 아예 사지 않는 작가의 책도 있으니까 말이다. 매력을 느끼면서도 알 수 없는 거부감도 느끼게되는, 내게 있어선 참 묘한 작가였더랬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 작가에게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마초성.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는 남성우월주의가 여자인 내게는 매력반 혐오반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줄리언 반스가 마초적 작가라고 단언한 건 아니다. 오히려 마초작가 라고 한다면 헤밍웨이나 로맹 가리를 먼저 꼽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리언 반스가 불편했던 이유는 그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마초성` 때문이었달까. 더구나 전형적인 `영국인 남성`이란 이미지도 강하게 느껴졌다. 젠틀맨을 표방하며 오랜 역사동안 보수성을 버리지 않은 그 이중성을.

어쩌면 그 대표적 인물이 이 책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 셜록 홈즈라는 영국의 (마초캐릭터) 아이콘을 창조한 아서 코넌 도일일 것이다. 소설 속의 그는 정의롭고 호기롭고 국가적 존경을 받는 신사지만,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불쾌해하며 가부장적인데다 심지어 자신의 불륜을 미화하는 극보수적 남성우월주의자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오만함은 끝까지 영웅적인 태도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이 줄리언 반스의 아서 코난 도일에 대한 공감의 표현인지 아니면 오히려 나처럼 반발을 느끼는 독자를 겨냥한 의도적 기술인지 솔직히 알 수가 없다. 전자라면 줄리언 반스의 책을 더이상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라고 그래도 믿게 되는 것이 이 책의 또다른 주인공 조지 때문이다. 얼핏 소설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피해자로 보여지는 조지의 위치는 뜻밖에도 아서를 객관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오로지 아서에 관해서만 전기적 기술을 했다면 전자의 의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조지를 통해 다시 한번 여과되는 아서의 모습은 영웅이 아닌 그저 타자가 될뿐인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아서 코넌 도일이 어떤 인물이었고, 역사 속에 가려진 조지 에들지란 인물이 영국 사법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가 사실상 중요하지가 않다는 것을 역설한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라는 마지막 문장을 쓰기 위해 줄리언 반스는 이 소설을 쓰게된 건지도 모른다. 바로, 나처럼 쉽게 편견을 갖게되는 독자를 향해 일갈하기 위해.

아서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조지의 억울함이 인종차별에 의한 편견에서 비롯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당사자인 조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편견 당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심령술에 취한 아서에 대해 편견을 갖는다.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그것은 다른 말로 당신은 어떤 편견을 갖고 있는가란 의미가 아닐까.

줄리언 반스가 마초적 작가라는 내 편견을 깨기 위해 뒤늦게나마 그의 이전 작품들을 꼭 정독해야겠다. 그나마 그의 소설들 중에 재미없는 건 없을 것이란 편견 아닌 편견이 있는 건 다행이지 싶다.

사족 :: 줄리언 반스의 판권이 열린책들에서 다산책방으로 바뀌게 된 것은 아쉽지만, 양 출판사가 협의한 덕분인지 팬들을 위한 배려인지 양장판형과 같은 폰트(로 보이는) 제목으로 디자인 해준 것은 참 감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