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 회의에서 강압적으로 아타나시우스 파의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하고 통과시켰다는 점에 대해선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싶다. 이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만약 그랬다면 325년 니케아 회의 이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황제를 설득해 thyre의 회의를 소집하고, 여기서는 다시 아리우스 파가 지지를 얻고 승리한 역사적 사실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황제는 아타나시우스 파의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여야 자신의 황권과 제국도 곤고해진다는 사실을 갑자기 망각했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과 정착은 그리 단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이다. 다만 황제는 통일된 제국의 분열을 원하지 않았고, 그 무엇이 승리하든 종교 사상적으로도 통일된 교리를 가지기 원했다는 점에 학자들은 대체로 동의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복음서들의 기록 연대를 학자들은 대체로 1세기 이후로 본다. 그리고 오늘날 마가, 마태, 누가복음을 이르는 말인 '공관복음'서는 이들 복음서가 같은 관점에서 쓰여지거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베꼈기 때문에 사용된 말이 아니다. 마치 도시괴담이 유행하듯이 많은 목회자들 역시 이런 사실을 모르고 설교하는 경우가 많다. 이 단어는 syn(함께) + opsis(보다)가 결합한 합성어다. 이는 18세기 독일의 성서학자인 Johann Jakob Griesbach가 1776년에 발간한 "함께 보는 복음서"(Synopsis Evangeliorum)에서 유래한다. 그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각 내용을 마태복음을 기준으로 함께 기록해서 비교해볼 수 있도록 기록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수평적 읽기'를 시도한 것이고, '공관'은 Synopsis를 한자로 직역한 것인데, 이것을 사람들이 복음서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오해하고 있다.
도마복음을 다른 복음서보다 기록 연대가 앞서거나 우위에 두려는 시도는 몇가지 사실에 의해 의문시된다. 이를 긍정하려는 사람들은 도마복음이 내러티브가 아닌, '어록'이라는 점에서 내러티브의 복음서들보다 앞선 시점으로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입장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지주의나 깨달음으로 이르는 구원에 무게를 두려한다. 즉, 정작 해당분야의 전문적 학자들의 견해는 소외시킨다. 학문적이거나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하기보다, 자신의 사상과 일치하는 바를 따라서 예수의 본래 사상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복음서보다 시대적으로 앞서 기록된 것을 바울의 서신서로 본다. 약 20~30년 정도의 간격이 있다. 그리고 도마복음에 대한 두 판본중 보다 앞선 옥시링쿠스 판본은 그리스어로 적혀 있다. 도마복음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디두모스 토마가 받아적다'이다. 그런데 토마가 과연 그리스어로 받아적을 수 있었는지부터 의문스럽다. 당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 문자로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은 제한된 사람들만 가능했던 일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대체로 2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본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런 문제들을 통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예수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했었다고 정리하고 있다.각 기독교 공동체 간에는 분명 견해의 차이가 있었고, 그것은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서에도 나타나 있다. 교리화 작업을 통해 승리한 공통체의 입장은 '정통'이 되었고, 교리화 작업은 통일된 제국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도 요구되었다. 종교란 그렇게 인간적인, 여러가지 요소들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만들어지고 생명을 이어간다. 분명한 건, 신앙인들은 신앙적 대상으로서 예수를 교회에서 접하고 믿지만, 예수는 어떤 인물이고,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가르쳤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자료는 사실 없다. 복음서 간에는 불일치하는 내용이 상당하고 복음서가 탄생한 각 기독교 공동체 간의 서로 다른 사상이 담겨 있고 서로를 견제하는 내용도 있다. 신앙인들은 덮어두고 믿으니 모를 뿐이다. 위에서 소개한 수평적 읽기처럼 일어난 사건이나 시간 순서, 등장 인물들을 하나씩 비교하면서 정직하게 읽는다면 모순점들을 누구나 발견할 수 있다. 학계에서 '역사적 예수' 논쟁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결과다. 이런 사실들은 나로 하여금, 사람들은 동일한 대상을 두고도 결국 자신이 보고싶어 하는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명상인들 가운데 최신과학이론이나 양자역학을 가지고 독특한 해석을 시도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사실 과학자라면 결코 동의하지 않을 해석들인데, 독특한 자신들의 경험을 무리하게 과학의 이름을 빌려서 설명하려는 심리가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양자는 어떤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 준위가 불연속적으로 정해진 값을 말하고, 우리 인간의 생각에 반응해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전자모형에서 전자의 위치에너지를 설명하는 모형에 적용되는 값이다.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거시 세계가 아니라 미시 세계에 적용되다보니 신비하게 느껴질 수 있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밝혀진 과학적 사실과 거리 있는 것에 까지 무리하게 적용하려는 시도는 정작 사이비 과학을 낳을 수 있고 지지를 받기 힘들다. 과학의 이름을 빌리지 않아도 그냥 자신의 깨달음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학으로 밝혀진 사실과 위대한 발견을 한 과학자 혹은 사상가의 깊은 깨달음은 서로 다른 영역이다. 서로의 영역을 확인하고 구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