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깨달음 내 안의 신성 자각과 신의 의식
국승규 지음 / 좋은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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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철학이 생겨나고 종교를 찾거나 깨달음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자주 '세속적'이라는 말로 요즘 세대를 표현하지만, 우리 안에는 그런 단어로 다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있다. 선사시대에 그려진 동굴 벽화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처럼 우리는 생존을 위한 일상 외에도 자연과 교감하고 초자연적인 무엇과 닿으려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영성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저자는 오랜 시간 방황을 하듯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섰다. 제도권 종교로부터 시작해서 신지학과 여러 수련단체까지 거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무엇보다 제도권 기독교에 대한 그의 비판은 매섭다. 교회에서 맹목적으로 가르치는 삼위일체에 대해 그는 비판적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 회의를 통해 강압적으로 통과시킨 불법적인 교리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본래 예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지, 자신만 신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복음서 기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예수의 어록 모음집인 도마복음서의 내용을 보다 우위에 둔다.



저자의 깨달음은 이렇다. 예수와 부처 같은 성인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너희 안에 신성과 불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깨달음의 차원이고 각자의 종교가 가진 교리적인 한계를 넘어선 영성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다. 우리 모두 안에 하나님과 동격인 성령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집이 바로 몸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각자 신성을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해 기쁨과 평화가 내면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창조의 권능을 가진바, 의식의 완전한 집중이 이루어지면 우리가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법칙을 아는 것이 최고의 깨달음이며 도의 완성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우주의 원리와 자신의 깨달음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이야기들을 한다. 다양한 종교와 사상, 심지어 양자역학까지 자신의 깨달음과 연결시키려 한다. 나는 몇가지 부분에 대해서 비판적인 읽기를 시도했고 뒷부분에서 따로 정리해보았다. 그러나 전체적인 방향성에 대해서는 공감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갇힌 시야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접하고 탐구하는 자세는 깨달음과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포기하지 말아야할 태도 아닐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도 저자와 같은 목마름으로 오랜 시간 기독교를 탐구했었고, 근본주의 기독교로부터 해방되었다. 우울 안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 우물 안에서 벗어나 다양한 기독교 교파를 존중하고 명상, 불가, 호흡수련, 인도철학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블리스로 가는 길"에서 이야기했던 것을 나도 발견하게 된다.



"영원은 시간과는 상관이 없다. 시간은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몰아낸다. 영원은 지금이다. 신화가 가리키는 것은 현재의 초월적 차원이다.... 바울이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라고 한 말은 우리 안에서 영원한 뭔가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붓다의 의식이며, 그 의식은 이 세상 만물이며 또한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캠벨의 깨달음처럼 우리 안엔 영원이 있다. 그 영원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깨어있음이다. 이것을 신성이라 부르든 불성이라 부르든 그것을 통해 모든 만물이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이 우주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어떤 관점을 택하고 어떤 우주를 만들어 나갈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그 삶의 창조에 대해 누군가의 경험을 듣기 원한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비판적으로 읽기도 하고 맞장구도 쳐보면서 말이다. 판단은 스스로 하면 된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니까.




- 저자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임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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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중 일부에 대해 비판적 읽기를 했다. 여기서부터는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도 고지식한 근본주의 기독교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비판적 읽기는 책을 이해하고 풍부히 소화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라고 말하고 싶다. 선교 역사에서 우리나라는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때 세워진 많은 교회는 당시 유행하던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나라 교회들은 여전히 그 영향이 크다. 그래서 창조과학이라는 사이비과학을 신봉하고 아직도 '진화'를 '창조'와 대립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신자들도 많다. 그러나 기독교는 근본주의 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독교 역시 수 천 년의 시간동안 이어져 오면서 매우 다양한 사상을 품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면 더 많은 사실들이 보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 회의에서 강압적으로 아타나시우스 파의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하고 통과시켰다는 점에 대해선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싶다. 이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만약 그랬다면 325년 니케아 회의 이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황제를 설득해 thyre의 회의를 소집하고, 여기서는 다시 아리우스 파가 지지를 얻고 승리한 역사적 사실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황제는 아타나시우스 파의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여야 자신의 황권과 제국도 곤고해진다는 사실을 갑자기 망각했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과 정착은 그리 단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이다. 다만 황제는 통일된 제국의 분열을 원하지 않았고, 그 무엇이 승리하든 종교 사상적으로도 통일된 교리를 가지기 원했다는 점에 학자들은 대체로 동의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복음서들의 기록 연대를 학자들은 대체로 1세기 이후로 본다. 그리고 오늘날 마가, 마태, 누가복음을 이르는 말인 '공관복음'서는 이들 복음서가 같은 관점에서 쓰여지거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베꼈기 때문에 사용된 말이 아니다. 마치 도시괴담이 유행하듯이 많은 목회자들 역시 이런 사실을 모르고 설교하는 경우가 많다. 이 단어는 syn(함께) + opsis(보다)가 결합한 합성어다. 이는 18세기 독일의 성서학자인 Johann Jakob Griesbach가 1776년에 발간한 "함께 보는 복음서"(Synopsis Evangeliorum)에서 유래한다. 그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각 내용을 마태복음을 기준으로 함께 기록해서 비교해볼 수 있도록 기록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수평적 읽기'를 시도한 것이고, '공관'은 Synopsis를 한자로 직역한 것인데, 이것을 사람들이 복음서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오해하고 있다.



도마복음을 다른 복음서보다 기록 연대가 앞서거나 우위에 두려는 시도는 몇가지 사실에 의해 의문시된다. 이를 긍정하려는 사람들은 도마복음이 내러티브가 아닌, '어록'이라는 점에서 내러티브의 복음서들보다 앞선 시점으로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입장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지주의나 깨달음으로 이르는 구원에 무게를 두려한다. 즉, 정작 해당분야의 전문적 학자들의 견해는 소외시킨다. 학문적이거나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하기보다, 자신의 사상과 일치하는 바를 따라서 예수의 본래 사상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복음서보다 시대적으로 앞서 기록된 것을 바울의 서신서로 본다. 약 20~30년 정도의 간격이 있다. 그리고 도마복음에 대한 두 판본중 보다 앞선 옥시링쿠스 판본은 그리스어로 적혀 있다. 도마복음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디두모스 토마가 받아적다'이다. 그런데 토마가 과연 그리스어로 받아적을 수 있었는지부터 의문스럽다. 당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 문자로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은 제한된 사람들만 가능했던 일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대체로 2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본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런 문제들을 통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예수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했었다고 정리하고 있다.각 기독교 공동체 간에는 분명 견해의 차이가 있었고, 그것은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서에도 나타나 있다. 교리화 작업을 통해 승리한 공통체의 입장은 '정통'이 되었고, 교리화 작업은 통일된 제국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도 요구되었다. 종교란 그렇게 인간적인, 여러가지 요소들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만들어지고 생명을 이어간다. 분명한 건, 신앙인들은 신앙적 대상으로서 예수를 교회에서 접하고 믿지만, 예수는 어떤 인물이고,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가르쳤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자료는 사실 없다. 복음서 간에는 불일치하는 내용이 상당하고 복음서가 탄생한 각 기독교 공동체 간의 서로 다른 사상이 담겨 있고 서로를 견제하는 내용도 있다. 신앙인들은 덮어두고 믿으니 모를 뿐이다. 위에서 소개한 수평적 읽기처럼 일어난 사건이나 시간 순서, 등장 인물들을 하나씩 비교하면서 정직하게 읽는다면 모순점들을 누구나 발견할 수 있다. 학계에서 '역사적 예수' 논쟁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결과다. 이런 사실들은 나로 하여금, 사람들은 동일한 대상을 두고도 결국 자신이 보고싶어 하는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명상인들 가운데 최신과학이론이나 양자역학을 가지고 독특한 해석을 시도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사실 과학자라면 결코 동의하지 않을 해석들인데, 독특한 자신들의 경험을 무리하게 과학의 이름을 빌려서 설명하려는 심리가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양자는 어떤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 준위가 불연속적으로 정해진 값을 말하고, 우리 인간의 생각에 반응해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전자모형에서 전자의 위치에너지를 설명하는 모형에 적용되는 값이다.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거시 세계가 아니라 미시 세계에 적용되다보니 신비하게 느껴질 수 있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밝혀진 과학적 사실과 거리 있는 것에 까지 무리하게 적용하려는 시도는 정작 사이비 과학을 낳을 수 있고 지지를 받기 힘들다. 과학의 이름을 빌리지 않아도 그냥 자신의 깨달음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학으로 밝혀진 사실과 위대한 발견을 한 과학자 혹은 사상가의 깊은 깨달음은 서로 다른 영역이다. 서로의 영역을 확인하고 구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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