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 - 박보나 미술 에세이
박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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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인 중에 동양화를 전공한 알려진 화백이 있다. 이 친구는 정원을 주로 그려서 보여줬다. 나는 미술에 대해 문외한인지라 그림 그리는 장면이 궁금했었다.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 나를 초대해 줄 수 있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친구는 즉시 난처해 했다. 작업실은 난잡하고 누군가를 초대해서 보여줄게 없다고 했다. 대신 전시회를 할 때 꼭 와달라고 말했다.

친구의 전시회에 갔었다. 역시 이번 작품에도 정원을 그렸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왜 정원을 그려?"


친구 왈 : " 정원을 통해 나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어."


"많은 소재가 있을텐데 왜 굳이 정원이야? 어떤 심오한 철학적 의미가 있는거야?"


친구 왈 : "음....그냥 정원이 좋았어."



친구의 그림은 항상 포근하고 따뜻한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유복하게 자라서인지 그림에서도 안정감과 기품이 느껴진다. 물이 솟아나는 정원에는 사람을 제외한 다양한 나무와 새들과 생명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림은 이 친구의 지난 삶을 잘 담아내고 있는 듯했다.



나는 미술 전공자가 아니다. 다만 예술에 담겨 있는 사상과 철학을 읽기 좋아한다. 친구의 그림은 쉽다. 작품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누구나 방문하고 감상할 수 있는 풍성한 정원, 그 세계를 그림을 통해 만끽하면 된다. 그걸로도 친구는 충분히 즐거워 했었다. 지금까지 친구의 그림을 이야기한 것은 이 책이 주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대조적으로 이 책은 느껴지는대로 만끽하기엔 생각할 것들이 많다. 예술품에서 보여지는 장면들로부터 한번 더 생각하고 비틀어봐야 한다. 그때서야 작가의 의도가 하나씩 드러나는 여러 작품들에 대한, 저자의 해설이 담긴 미술에세이이다.

친구의 그림이 '정원'이라는 분명한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책은 이름 없는 것들이 등장한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이름붙인 대상들, 마음대로 정의해버린 대상들, 우리 인간의 논리로 구분짓고 타자화한 대상들을 말한다. 그것은 자연 속 생물이나 생태계일수도 있고, 우리 이웃 혹은 나의 정체성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소외되어 온, 이름 없는 것들에 대해 바치는 찬가와 반성이 담겨 있다.



친구의 그림이 아름답고 보기 좋은 미술이었다면, 이 책에선 그런 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저자와 저자가 해설하는 작품들은 자연, 문화 속 대상들의 경계를 흐트리고 재정의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그동안의 우리가 포착하지 못했던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자연 생태계 속 생물들이 서로 독립되어 있는 것같아도 실제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긴밀하게 얽혀있듯이 이 책에 등장하는 작품들도 서로 얽히는 듯한 잔상을 남기며 독자로 하여금 묘한 하모니를 경험하게 만든다. 그 하모니를 옆으로, 수평적으로 14개의 영역으로 작가는 엮으며 써내려 간다. 이 책의 작품들과 해설들은 예쁘게 완성된 그림이라기보다는 아직 작업실에서 다듬어지고 있는 그림과 같다. 그래서 저자의 해설이 하나의 헤게모니로 작용하기 보다는, 이 책을 읽는 독자의 수용과 해석에 따라 더 다양한 의미로 재해석될 여유 공간이 존재한다.




"미끄러운 말이 아니라 공기와 파동, 움직임과 연결을 통해 인간이 아닌 다른 종과 신호를 주고 받는 과정은 덜 '인간적'이어서 오히려 더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오스카 산틸란은 새와 인간의 신호를 섞음으로써, 공존의 순간을 속삭인다."




내게 인상적인 작가는 오스카 산틸란이었다. 새를 통해 자연과의 공존을 노래했다. 인간의 언어로는 불가능했던, 마음을 주고 받는 법을 그의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경험하게 된다. 인간의 언어가 침묵하는 곳에서 음악은 시작되고 새소리는 다른 생명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세상을 그려낸다. 그래서 깨닫게 된다. 구별과 차별을 일상화하고 앞만 보며 달려온 인류는 이름 없는 것들을 놓쳤다. 그리고 공존을 잃었다. 이제는 예술이 예언자적 기능을 담당하며 이름 없는 것들에 대한 존중과 공존을 선포한다.



이 책에는 더 많은,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책을 통해 박보나 작가의 에세이에 빠져 보시길, 보기 좋은, 전시용 미술을 넘어 다양하고 기발한 방법들을 통해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는 의미 있는 예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출판사로부터 무상으로 제공받아 서평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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