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중에 동양화를 전공한 알려진 화백이 있다. 이 친구는 정원을 주로 그려서 보여줬다. 나는 미술에 대해 문외한인지라 그림 그리는 장면이 궁금했었다.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 나를 초대해 줄 수 있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친구는 즉시 난처해 했다. 작업실은 난잡하고 누군가를 초대해서 보여줄게 없다고 했다. 대신 전시회를 할 때 꼭 와달라고 말했다.
친구의 전시회에 갔었다. 역시 이번 작품에도 정원을 그렸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왜 정원을 그려?"
친구 왈 : " 정원을 통해 나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어."
"많은 소재가 있을텐데 왜 굳이 정원이야? 어떤 심오한 철학적 의미가 있는거야?"
친구 왈 : "음....그냥 정원이 좋았어."
친구의 그림은 항상 포근하고 따뜻한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유복하게 자라서인지 그림에서도 안정감과 기품이 느껴진다. 물이 솟아나는 정원에는 사람을 제외한 다양한 나무와 새들과 생명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림은 이 친구의 지난 삶을 잘 담아내고 있는 듯했다.
나는 미술 전공자가 아니다. 다만 예술에 담겨 있는 사상과 철학을 읽기 좋아한다. 친구의 그림은 쉽다. 작품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누구나 방문하고 감상할 수 있는 풍성한 정원, 그 세계를 그림을 통해 만끽하면 된다. 그걸로도 친구는 충분히 즐거워 했었다. 지금까지 친구의 그림을 이야기한 것은 이 책이 주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대조적으로 이 책은 느껴지는대로 만끽하기엔 생각할 것들이 많다. 예술품에서 보여지는 장면들로부터 한번 더 생각하고 비틀어봐야 한다. 그때서야 작가의 의도가 하나씩 드러나는 여러 작품들에 대한, 저자의 해설이 담긴 미술에세이이다.
친구의 그림이 '정원'이라는 분명한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책은 이름 없는 것들이 등장한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이름붙인 대상들, 마음대로 정의해버린 대상들, 우리 인간의 논리로 구분짓고 타자화한 대상들을 말한다. 그것은 자연 속 생물이나 생태계일수도 있고, 우리 이웃 혹은 나의 정체성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소외되어 온, 이름 없는 것들에 대해 바치는 찬가와 반성이 담겨 있다.
친구의 그림이 아름답고 보기 좋은 미술이었다면, 이 책에선 그런 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저자와 저자가 해설하는 작품들은 자연, 문화 속 대상들의 경계를 흐트리고 재정의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그동안의 우리가 포착하지 못했던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자연 생태계 속 생물들이 서로 독립되어 있는 것같아도 실제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긴밀하게 얽혀있듯이 이 책에 등장하는 작품들도 서로 얽히는 듯한 잔상을 남기며 독자로 하여금 묘한 하모니를 경험하게 만든다. 그 하모니를 옆으로, 수평적으로 14개의 영역으로 작가는 엮으며 써내려 간다. 이 책의 작품들과 해설들은 예쁘게 완성된 그림이라기보다는 아직 작업실에서 다듬어지고 있는 그림과 같다. 그래서 저자의 해설이 하나의 헤게모니로 작용하기 보다는, 이 책을 읽는 독자의 수용과 해석에 따라 더 다양한 의미로 재해석될 여유 공간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