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신곡(神曲) - 센과 치히로의 성장 오디세이
윤민 지음 / 마름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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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개봉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제페니메이션의 대표작 중 하나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명작이다. '스튜디오 지브리' 특유의 감성과 교훈적인 메시지가 잘 담겨 있어서,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함께 감상하더라도 각자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영화다.

영화의 대략은 이렇다. 치히로의 가족은 이사를 가기 위해 자동차로 이동하다가 자동차는 어떤 터널을 지나는데, 어떤 마을에 도착한다. 그 마을은 사실 영혼들의 세계였는데, 허락없이 음식을 탐하던 부모는 돼지로 변하고 만다. 영혼들의 마을을 빠져나오지 못한 치히로는 영혼들이 쉬어가는 온천에 취직한다. 그리고 부모에게 걸린 마법을 풀고 가족과 함께 그곳을 무사히 나오기까지의 여러가지 사건이 펼쳐진다.

이 책의 저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통해 영적 성장의 메시지를 읽어 내려 한다. 이를 위해 성서, 스타워즈, 파르지팔 등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끌고 와 비교하며 교훈을 찾으려 한다. 이런 시도의 원점에는 세상에는 메타설화가 존재하며 메타설화를 가능케 하는 집단적 의식을 통해 지혜가 인류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분석심리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의 위대한 연구들과 융의 영향을 받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따라서 공감하는 사람에겐 관념론적인 세계의 실체에 대한 각성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를 통해 영적 성장의 메시지를 찾으려는 시도는 주관적인 영역이다. 저자는 이 알레고리적 해석을 시도한다. 알레고리란 A를 말하기 위해서 B를 가져와 유사성에 기대어 숨은 뜻을 밝히는 수사법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치히로가 엘리베이터(Elevator)를 타고 올라가는 장면을 두고 의식이 상승했음을 의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알레고리는 이렇게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런데 누군가 꼼꼼하게 따지고 들어간다면 난감해 질 수도 있다. 저자는 이를 뒷받침하는 한가지 사례로 엘리베이터의 알파벳 'EL'을 유대교에서 신을 의미하는 EL, 이슬람교에서 신을 의미하는 AL과 비교한다. 사실 이슬람교나 유대교에서 '신'을 의미하는 'EL'은 같은 어원을 가진다. 학자들은 '엘' 의 기원을 성서나 이스라엘 민족 문화의 고유성에서 찾지 않고 고대 근동에 퍼져있던 신화에서 찾는다. 대체로 만신전의 신들 혹은 천둥과 비를 관장하던 최고신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본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지고 문화 속에 녹아들어서 신을 부르는 명칭, 신과 관련된 다양한 대상들, 천사,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의 이름 등에도 사용되었다. 엘리베이터의 'el'이 농경과 자연 날씨를 관장한다고 믿었던 신과 어떤 관계가 있는 지는 사실 미지수다. 이것이 누군가에겐 알레고리의 한계로 다가올 것이고 또 누군가에겐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멋진 해석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알레고리는 숨어 있지만 심오한 깨달음과 진리가 그 대상에 담겨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한 층 더 성숙하거나 고차원의 비밀에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신비주의적 해석은 영지주의적 관점을 공유한다. 저자는 치히로가 겪는 고난, 인생의 경험, 실패 그리고 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신약성서의 유명한 '탕자의 비유'를 가지고 온다. 탕자의 비유는 대략 이런 내용이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둘째는 아버지의 재산을 나눠받아서 막 살다가 재산을 탕진한 후 반성과 후회를 하며 아버지께로 돌아온다. 그런데 탕자의 비유가 등장하는 성서의 앞뒤 맥락을 보면, 탕자의 비유는 아들의 성장에 방점이 찍혀 있지 않다. 물론 세상으로 나가 갖은 경험을 한 둘째 아들은 반성과 깨달음과 성장할 수 있는 힘을 얻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하는 주된 이유가 재산의 탕진 때문인지, 후회 때문인지, 한층 더 성장했기 때문인지는 사실 알 길이 없다. 앞 뒤의 맥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탕자의 비유는 둘째 아들의 성장에 방점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방점은 돌아오는 아들을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아버지의 사랑에 찍혀 있다. 정리하자면 성서에서 예수는 아들의 성장을 말하기 위해 탕자의 비유를 든 것이 아니라 아들이 어떤 모습이라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했다. 그럼에도 저자가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의 성장을 읽어 냈던 건 바로 고난과 더 높은 경지로의 깨달음과 성장이라는 영지주의적 관점과 만나는 알레고리 해석을 시도한 결과다.

그렇다면 이 영화 자체는 고난과 성장과 교훈과 숨은 의미가 없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든 감독도 분명 메시지를 심어 놓았다.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부모, 금에 환장하는 영혼들, 사금과 탐욕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어린 치히로의 모습은 분명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알레고리를 얘기했던 건, 지피지기면 적어도 패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된 접근법인 알레고리의 여러가지 단면들을 이해함으로써 내용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레고리는 종교나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흔히 사용하는 해석법이기도 하다. 다양한 신비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교부라 불리는 위대한 인물들도 알레고리 해석을 사용했으며, 그것을 통해 영적인 깨달음을 얻고 또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데 사용했다. 이 영화에 주된 등장인물 중 하나인 가오나시에 대한 저자의 해석에 나는 매우 공감했다. 그는 거울과 같은, 마주하는 우리의 반영이었다.

삶에는 정답이 있다기보다, 각자가 자신의 답을 찾아가는 것 같다. 따라서 같은 대상을 보면서도 다른 것을 느끼고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게 사람이며, 그런 차이를 깊이 깨닫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으며 성숙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지나가는 킬링타임용 오락거리로 즐겼을 수도 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이 책의 저자처럼 삶의 깊은 의미를 찾아가는 도구로 삼았을 수도 있다. 같은 영화라도 아이였을 때 본 것과 삶이 어느 정도 무르익은 후 다시 보는 것은 차이가 있다. 영화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해가기 때문이다. 변해가는 삶 속에서 고난과 성장의 의미를 찾고 싶은 이가 있다면 다시 이 영화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이 책도 함께 읽어본다면 더 진한 풍미의 포도주를 함께 음미할 수 있지 않을까?

- 이 서평은 서평단 참여로 무상으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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