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만들어라 - 피카소의 화실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침묵까지 ㅣ 철학하는 철학사 4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으며, 솔직한 감상을 담았습니다 ***

20세기 철학은 어렵고 딱딱할 것만 같지만, 『세상을 만들어라』를 읽으면 조금 다르게 느끼게 된다. 철학자들의 사상을 단순히 시대순으로 정리하기보다 그들이 어떤 시대를 살아냈고, 무엇을 고민하며 그런 생각에 도달했는지를 따라가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야스퍼스가 말한 ‘한계 상황’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평소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왜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지 굳이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이나 고통, 죄책감처럼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마주하면 그때부터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고 한다. 나 역시 그동안 내가 겪어왔던 경험들과 사건들이 지금 나의 생각과 태도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것들 또한, 어쩌면 내가 살아오며 견뎌낸 시간의 흔적일 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 책의 철학은 단순히 ‘무엇이 옳은가’를 묻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 생각을 품게 된 사람이 어떤 시대를 살았고, 또 무엇을 겪었는지까지를 함께 탐구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철학자들이 붙잡고 있던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니 멀게만 느껴졌던 철학사상도 어느새 내 곁에 함께 있는 듯하다. 지금의 나 또한 크고 작은 한계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나만의 세계관을 만들어가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든다.

하이데거의 철학과 정치적 선택, 전쟁 속에서 흔들리는 지식인들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 비트겐슈타인의 삶까지 읽다 보면 철학은 결코 삶과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철학의 목표를 ‘유리병에 갇힌 파리에게 나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바로 이 책 전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이 아닐까 싶었다.

어렵게만 보였던 현대 철학이 조금은 가까워지고, 동시에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넓어지는 책이다. 단순히 철학을 공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고 싶을 때 읽어보면 좋을 책이기도 하다.

#세상을만들어라 #리하르트다비트프레히트 #열린책들 #철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침묵의 인형 놀이
마이크 오머 지음, 공보경 옮김 / 북로드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으며, 솔직한 감상을 담았습니다 ***

말 대신 인형으로 기억을 이야기하는 아이. 『침묵의 인형 놀이』는 이 말없는 아이의 인형 놀이이기도 하다.

15개월 만에 살아 돌아온 아홉 살 캐시는 납치된 동안의 일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대신 놀이치료실에서 인형을 물에 빠뜨리고, 목을 매달고, 모래 속에 묻는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끔찍한 일을 겪은 아이가 트라우마를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 시신이 발견되고 그 살인 방법이 캐시의 인형 놀이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순간부터 아이의 인형 하나, 행동 하나가 전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그 아이는 말을 안 한다면서요?” “돌아온 후로 한 마디도요”.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목격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로빈은 캐시에게 억지로 입을 열게 하기보다 아이가 선택하는 인형과 놀이를 가만히 지켜본다. 치료와 수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읽다보면 평범한 장난감도 어쩐지 무섭게 느껴지게 된다. 여섯 개의 인형이 하나씩 사라지고, 남은 인형의 숫자를 세게 되는 순간부터는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은 불안과 공포심이 계속 나를 쫓아오는 것만 같다. 이미 일어난 살인을 보여주는 것인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고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도 읽으면서 점차 긴장감을 높이는 요소 중 하나다.

캐시에게 인형 놀이는 끔찍한 기억을 재현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었던 현실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작은 세계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건의 진실을 밝혀가는 긴장감과 함께, 한 아이가 잃어버린 안전과 일상을 조금씩 되찾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쩐지 응원도 하게 된다.

‘저 인형은 무엇을 의미할까?’를 계속 추측하게 만들어 마지막까지 쉽게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하는 책이다. 잔혹한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보다 말하지 않는 아이의 행동을 통해 서늘한 공포를 만들어내는 스릴러라고 하겠다.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다.

#침묵의인형놀이 #마이크오머 #북로드 #스릴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에티의 여름
루시 스티즈 지음, 노진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본 게시글은 인스타그램 응뚜님 (@eungttu.loves)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은 후 작성되었으며, 솔직한 감상을 담았습니다 ***

『에티의 여름』은 책을 읽는 내내 프로방스의 뜨거운 햇살과 라벤더 향, 유화 물감 냄새가 코끝에 맴도는 듯한 소설이다. 1920년,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프랑스 남부의 외딴 농가를 배경으로 책은 시작된다. 삶의 의미를 잃은 기자 조지프가 전설적인 화가 타르튀프를 찾아오면서,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온 에티의 고요한 일상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이 소설은 ‘보고, 보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타르튀프의 거대한 재능과 명성 뒤에 가려져 자신의 그림조차 마음껏 펼치지 못했던 에티. “그냥 그림에 널 온전히 맡겨보라”던 어머니의 말처럼, 예술은 그녀에게 도피처이면서 동시에 언젠가는 스스로를 찾아야 할 공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에티가 조지프를 만나면서 자신이 어떤 삶을 원하는지 조금씩 깨닫는 과정이 너무 보기 좋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여름이라는 계절을 아주 감각적으로 사용한다고 느꼈다. 햇살과 물, 복숭아와 꿀, 땀에 젖은 피부와 붓이 캔버스를 스치는 소리까지 읽는 것만으로 잠들어 있던 오감이 깨어나는 기분이다. 동시에 아름다운 풍경 아래에는 타르튀프와 에티를 둘러싼 비밀과 불안이 깔려 있어, 평온한 여름이 마냥 평온하지만은 않다. 완성된 그림이 불타는 장면을 둘러싼 미스터리 역시 끝까지 마음을 붙잡는다.

타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얼마나 빛나는지. “삶을 맛보고 깨물고 싶다”던 에티의 마음이 단순한 욕망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다. 누군가가 정해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쉽게 자신의 빛을 잊어버리곤 한다. 뜨겁고 아름다웠던 에티의 여름을 따라가다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게도 묻게 된다.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걸까?

화려한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과 분위기에 천천히 스며드는 소설이다. 올여름의 마무리를 『에티의 여름』으로 한다면 더할 나위없이 완벽할 것 같다.

#에티의여름 #다산책방 #루시스티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괴물의 탄생 - 우리가 찍은 낙인의 역사
수레카 데이비스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으며, 솔직한 감상을 담았습니다 ***

『괴물의 탄생』을 읽고 나니 ‘괴물’이라는 말이 생각보다 훨씬 불편하게 다가온다. 고대의 기괴한 생명체나 늑대인간, 미노타우로스 같은 상상의 존재들을 이야기하는 책일거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읽을수록 이 책이 말하는 괴물은 결국 우리가 만들어낸 ‘타자’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저자가 말하는 괴물은 사실 인간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과 비인간,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경계에 놓인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괴물이라고 부르며 경계를 긋고, 그 바깥에 누군가를 밀어냄으로써 내가 속한 세계를 ‘정상’이라고 믿어왔다. “괴물 만들기는 가치를 판단하는 행위”라는 문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책 속 사례들이 꽤 충격적이었다. 고대에는 머리가 둘 달린 송아지가 신의 형벌이나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고, 임신부가 무서운 것을 보거나 고양이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물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더 섬뜩한 것은 이런 괴물 만들기가 단순히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라오스에서 납치된 크라오는 ‘다윈의 잃어버린 고리’라는 이름으로 런던에 전시됐고, 실제 인간의 신체적 차이가 박물관과 프릭쇼 (freak show)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가장 마음이 무거워진다. 사람들은 괴물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열광했고, 그 호기심을 이용해 누군가를 전시하고 소비했다. 결국 괴물은 존재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를 괴물로 규정하는 순간 발생하는 폭력인 것이고, 그 점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저자가 “괴물의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라고 말하는 이유가 이 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류는 시대마다 인종, 젠더, 종교, 신체, 성적 정체성 등 서로 다른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 밖에 있는 사람을 ‘정상’에서 밀어내곤 했다. 괴물에 대한 기록은 사실 인간이 누구를 우리 편으로 인정했고, 누구를 인간 이하로 취급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인 셈이다.

풍부한 옛 그림과 광고 전단, 지도와 기록물을 함께 보는 재미가 상당히 매력적인 책이다. 다만 ‘현재의 우리는 지금 누군가를 어떤 기준으로 괴물처럼 바라보고 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괴물을 구경하러 펼쳤다가 인간을 들여다보게 되고 마는 것이다. 『괴물의 탄생』이 생각보다 훨씬 묵직한 메세지를 던지는 책이 된 이유다.

#괴물의탄생 #수레카데이비스 #현암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극한 진화의 세계 -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발견한 생존의 법칙
이정모 지음 / 다산초당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으며, 솔직한 감상을 담았습니다 ***

이정모 관장의 책은 『찬란한 멸종』 이후 두 번째인데, 이번에는 조금 주제가 바뀌어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생명들의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극한 진화의 세계』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재미있었던 점 발견! 각 장의 주인공들이 직접 “나”라고 1인칭 시점에서 말한다. 폼페이웜도, 벨처바다뱀도, 사막여우도, 오리너구리도 각기 자기 몸과 환경을 설명한다. 덕분에 따분한 과학책을 읽는다기보다 각각의 생명체가 들려주는 생존담을 바로 옆에서 듣는 기분이 들어서 더 흥미진진하다.

특히 400도에 가까운 열수분출구 옆에서 살아가는 폼페이웜이나, 바다에 적응했지만 결국 숨을 쉬기 위해 수면으로 올라와야 하는 벨처바다뱀의 이야기가 아주 신기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사막여우는 작은 몸으로 적은 에너지를 쓰며 살아남고, 오리너구리가 인간의 단순한 생물학적 분류를 아무렇지 않게 무너뜨린다. 이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다가도 문득 우리가 그동안 생명을 얼마나 인간의 기준으로만 이해해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무엇보다 진화가 더 강해지고 완벽해지는 것이라는 이전까지의 무언의 공식을 뒤집는 방식이 재미있던 책이다. 눈을 없애고, 먹이를 포기하고, 심지어 호흡마저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생명들을 따라가다 보면, 생존이란 결국 강해지는 일이 아니라 환경에 맞춰 자신을 바꾸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때로는 덜어내고, 작아지고, 포기하는 것이 가장 영리한 생존법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후반부에 이르면 인간이 등장한다. 옷과 집, 불과 도구를 이용해 몸의 한계를 확장해온 인간은 그 자체가 결국 다른 생명들에게 가장 가혹한 ‘극한 환경’이 되어버렸다. 이 대목에서는 앞선 이야기들의 경이로움이 씁쓸함으로 바뀌고 만다.

『찬란한 멸종』에서 느꼈던 이정모 관장님 특유의 유쾌한 과학 이야기는 여전하지만, 이번 책은 그 웃음 끝에 묵직한 펀치를 날린다.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건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다른 생명에게 어떤 환경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신기한 생물들의 재미있는 이야기와 더불어 결국 인간의 생존 방식까지 돌아보게 되는 책이다.

#극한진화의세계 #이정모 #다산북스 #다산책방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