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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걷는 길
김기석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12월
평점 :
흔들리며 걷는 길
김기석, 352쪽, 2014. 11. 25 초판, 포이에마, 서울시 종로구
부제 : 잃어버린 불온함을 찾아 길 위에서 그분께 묻고 의심하고 확인했던 날들의 기록
40일 정도의 유럽을 혼자 여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테마 여행’을 스스로 기획해 본다면? 아마도 평소에 관심이 있는 것들과 직접 가서 보고 획인하고 싶은 곳을 우선 순서에 넣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미리 가볼 나라와 지역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고 현지 상황 등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짤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가장 많은 날들(5박 6일)을 머무르고 기록을 남긴 범 교파적 기독교 공동체인 ‘떼제 공동체’를 중심으로 ‘순례’라는 테마 여행을 기획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러나 기행문으로서는 이 책은 친절하지 않다. 어쩌면 육의 문제(숙박이나 음식 그리고 교통편에 관한 정보)보다는 혼과 영의 정보로 가득 채워졌다는 게 맞는 말이다. 친절한 여행의 지도(地圖)라기 보다는 저자의 지도(知圖)를 따라가는 불온한 안내서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그 불온함은 첫째, 일상을 벗어나 한 달 이상 여행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요, 그러나 우리 역시 이 시간과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그 불온함을 잠시 유보하고 현재를 담보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둘째는 현재에 머물면서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왕래할 수 있는 무한 자유함이요, 묻고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이 결국은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라는 허탈함(?)이 그 세 번째다. 그럼 이제 그 불온한 여행을 따라가 보자.
순례를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면 ‘종교의 발생지, 본산의 소재지, 성인의 무덤이나 거주지와 같이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하여 참배함’ 이라고 정리되어 있다.
순례의 첫 출발지가 로마이다. 신약 성경의 절반을 쓴 바울의 전도 여행의 종착지가 로마가 아니었던가! 천 년 이상을 세계사의 중심에 섰던 종교의 황제(敎皇)가 계신 바티칸시국이 있는 곳도 로마이고.
정답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이요 용기이다. 하지만 정답 없는 삶이라 해도 묻고 또 묻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세상에 한눈을 팔아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까닭을 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확실성을 견디고 또 그것을 자기 삶에 통합시키는 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라고 할 것이다.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 충만함과 허무함이 갈마드는 인생길, 누군들 힘들지 않겠는가? 산다는 것은 어쩌면 서럽기에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자의 말대로 예술가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그들은 땅과 일상 속에서 빛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빛을 향해 날아오르려 한다. 예수도 그러했다.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흐르고 또 흐르다가 어느 날 문득 낯선 자리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다.
무왕불복(無往不復), 가기만 하고 다시 반복되지 않는 과거란 없고 그 과거 속의 오늘이 또 다른 내일을 만들어 간다. 역사는 과거의 미래이다. 그 역사를 알아야 현재가 제대로 보인다.
역사, 문학, 예술 그리고 인문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저자가 보는 오늘의 세계는 어떨까? 저자의 영적인 깊이와 넓이를 얄팍한 잣대로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거룩한 지성이 요구된다. 말 그대로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관광의 의미가 관국지광(觀國之光)이라고 한다. 그 나라나 지역의 핵심을 보는 것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것이 여행(관광)의 묘미 아니던가!
우리가 하늘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든 전쟁을 마치고 귀향길(본질)에 만난 로터스 열매(비본질)에 취해서 고향도, 집도 잊어버리고 살든 ‘어리석은 순례자’라는 운명은 거부할 수 없어 보인다. 우리의 일상이 요구받은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바둥거리며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우리의 운명인 것을 어쩌겠는가? 익숙함이 질곡처럼 느껴질 때 길을 떠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그 낯선 길 위에서 말하지 않고, 내 판단까지도 내려놓고 열린 입을 닫는 행위, 침묵을 통해서 그분의 부재하는 현존을 경험하고 싶어진다면, 그 달콤한 침묵을 통해 내 영혼을 가득 채워 내면 깊숙한 곳에서 삼라만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솟아오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한다. 길들여진다는 것, 그것은 바로 영혼의 타락이다. 신앙이란 위험이나 시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두려움 없이 직시하는, 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도 우리의 운명이라고 믿으며 익숙한 길을 버리고 낯선 길을 택해 걷는 것인지 모른다.
시간은 무덤덤하게 때로는 나른하게 흐른다. 시간이란 본래 그런 것 아니던가. 다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만이 허둥댈 뿐이지.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기 위해서는 멈추어 서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는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경험하게 하는 신비의 종교이다. 상처 입은 어린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고백하고 늙은 우주를 경험하는 종교이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초월성을 나타내는 종교가 기독교인 것이다. 그 종교가 4세기의 기독교처럼 권력의 단맛에 취하고, 소박하고 신실한 이들의 종교가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될 때, 하기아 소피아가 두 번이나 불태워졌던 역사적 사건은 오늘날에도 언제든지 다시 반복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지, 크리소스토무스를 추방한다고 덮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앙의 진실함은 일상의 삶을 통해서만 입증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는 것, 타자의 입장에 서보는 것, 다른 이들의 무거운 짐을 지기 위해 몸을 낮추는 것이야말로 십자가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땅한 자세가 아니던가! 우리가 만나야 할 신은 멀리 계신 게 아니다. 단지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만날 용기를 갖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예민한 아픔으로 세상과 만나지 않는 한 신의 현존을 경험할 수 없다. 세상의 슬픔을 관념으로 말고, 슬픔의 현장에서 무릎으로 만나야 한다. 그 나라는 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다. 아픔이 있는 자리, 사람들의 한숨과 눈물이 배어 있는 땅, 바로 그곳이 하늘이다. 깊이를 뒤집으면 높이가 된다. 사다리가 없다고 낙심할 것이 없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낮은 곳으로 흐르다보면 결국 하늘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누군가가 곤경을 벗어나도록 도와줄 때 그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다.
설령 교회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자, 불순한 자라는 억울한 시선을 받더라도 우리는 사랑하는 교회를 향해 끊임없는 애정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옥의 언덕을 천국의 언덕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 프란체스코회의 추구하는 소중한 가치(Pax et Bonum, 평화와 선)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예언자적 메시지를 내면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으로 새롭게 해석해서 건강하게 살아내는 생활 신앙인이 필요하다.
평화란 그 마음이 빚어내는 삶의 열매요, 불화(不和)는 그 마음을 잃어버린 결과일 뿐이다. 나를 기쁘게 하려니 문제지, 이웃을 기쁘게 하려는 진실한 마음만 있다면 인생이 그리 복잡할 이유가 없다. 한 사람의 마음이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면 그의 주변도 저절로 환해지게 마련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프로그램을 가지고는 해결하지 못한다. 복음 안에 확고히 서서 용감하게 세상 풍조와 맞서면서도 거칠어지지 않고 품이 넓은 사람이 등장해야 한다. 이미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이미 변형된 형태의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저항하기를 포기했기에 더 이상 고난당하지 않는다. 풍요에 길들여진 신앙생활, 값싼 위로를 탐닉하는 신자가 점점 더 늘어나는 교회, 그 교회는 이미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제국의 신민으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뿔 난 모세가 불같이 화를 내는 이 현장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돈이 행복을 줄 수 있다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언제나 행복을 지연하며 살도록 강요한다. 그 체제는 늘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야 돌아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돈이 주는 자유는 영원한 예속으로 우리를 이끌 뿐이다. 하지만 참 진리는 예속이 아니라 해방으로 이끈다. 자본주의와 맞서 싸우느라 진을 뺄 것 없이 행복을 누리는 다른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는 능력을 키워주고, 그것을 향유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또 함께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한다.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을 한 손에 들고 유럽을 여행하고 떼제 공동체에 한 동안 머무르고 싶다. 떼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우정을 확장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알로이스 원장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시적 사귐을 위한 네 가지 제안>, 첫째, 지역의 기도 공동체에 참여하라. 둘째, 우리를 제한하는 이런저런 경계를 넘어 우정을 확인하라. 셋째, 다른 이들과 정기적으로 경험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라. 넷째,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영적인 사귐이 더 잘 드러나도록 하라는 특별한 제안이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다.
• 旅情 要約 •
☼ 이탈리아, 로마서의 그 로마
콜베의 흉상이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 → 성모니카의 무덤이 있는 산타고스티노 교회→ 캄포 데이 피오리 광장 → 산타 마리아인 비아 리타 교회 →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원 → 베드로의 쇠사슬 교회
☼ 성 프란체스코의 도시, 아싸시
바바라 마카렐리 수녀원 → 천사들의 성모 성당 → 프란체스코 대성당 → 산 피에트로 성당 → 카르체리 은둔소 → (프란체스코 대성당) →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 카사 구알디
☼ 토스카나
몬테 올리베토 수도원 → 성 안티모 수도원 → 성녀 카타리나의 집 → (로마)
☼ 피렌체
아르노 강변 → 조토의 종탑 → 시뇨리아 광장 → 우피치 회랑(미술관) → 메디치가의 경당
☼ 라벤나
산비탈레 성당 → 블로냐
☼ 이스탄불
하기아 소피아 → 이레네 성당 → 코라 교회 →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
☼ 그리스 정교의 나라, 조지아(그루지아) / 트빌리시(수도)
사메바 대성당 → 다비트 가레자 수도원 → 보드베 수도원 → 시그나기 → 니노츠민다 수도원 → 아나누리 → 스테판츠민다 → 게르게티 교회
☼ 므츠헤타(옛수도)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 → 시오니 교회
☼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
예치미아진 대성당 → 흐립시메 교회 → 쇼가하트 교회 → 가야네 교회 → 코르 비랍 → 라반크 수도원 → 가르니 → 게르하트 수도원 → 하가진 수도원 → 고샤반크 → 아르메니아인 학살 기념관
(☼ 트빌리시의 사메바 대성당)
☼ 프랑스 리옹의 떼제 공동체
파르디유 역 광장 → 저항과 이산의 역사 센터 → 리옹 박물관 → 벨쿠르광장 → 로제 수사(떼제 공동체 창시자)가 묻혀 있는 작은 예배당 → 스트라스부르
☼ 독일 친환경도시, 프라이부르크
뮌스터 → 프라이부르크의 한인교회 → 롱샹 성당
☼ 콜마(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운터린덴 박물관
☼ 그 외 프로방스의 작은 도시들
오랑주리 박물관 → 엑상 프로방스(세잔의 아틀리에) → 레 보 드 프로방스 → 루르마랭 → 국립 마르크 샤갈 성서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