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흔들리며 걷는 길
김기석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흔들리며 걷는 길

김기석, 352쪽, 2014. 11. 25 초판, 포이에마, 서울시 종로구

부제 : 잃어버린 불온함을 찾아 길 위에서 그분께 묻고 의심하고 확인했던 날들의 기록

40일 정도의 유럽을 혼자 여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테마 여행’을 스스로 기획해 본다면? 아마도 평소에 관심이 있는 것들과 직접 가서 보고 획인하고 싶은 곳을 우선 순서에 넣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미리 가볼 나라와 지역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고 현지 상황 등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짤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가장 많은 날들(5박 6일)을 머무르고 기록을 남긴 범 교파적 기독교 공동체인 ‘떼제 공동체’를 중심으로 ‘순례’라는 테마 여행을 기획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러나 기행문으로서는 이 책은 친절하지 않다. 어쩌면 육의 문제(숙박이나 음식 그리고 교통편에 관한 정보)보다는 혼과 영의 정보로 가득 채워졌다는 게 맞는 말이다. 친절한 여행의 지도(地圖)라기 보다는 저자의 지도(知圖)를 따라가는 불온한 안내서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그 불온함은 첫째, 일상을 벗어나 한 달 이상 여행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요, 그러나 우리 역시 이 시간과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그 불온함을 잠시 유보하고 현재를 담보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둘째는 현재에 머물면서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왕래할 수 있는 무한 자유함이요, 묻고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이 결국은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라는 허탈함(?)이 그 세 번째다. 그럼 이제 그 불온한 여행을 따라가 보자.

순례를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면 ‘종교의 발생지, 본산의 소재지, 성인의 무덤이나 거주지와 같이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하여 참배함’ 이라고 정리되어 있다.
순례의 첫 출발지가 로마이다. 신약 성경의 절반을 쓴 바울의 전도 여행의 종착지가 로마가 아니었던가! 천 년 이상을 세계사의 중심에 섰던 종교의 황제(敎皇)가 계신 바티칸시국이 있는 곳도 로마이고.

정답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이요 용기이다. 하지만 정답 없는 삶이라 해도 묻고 또 묻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세상에 한눈을 팔아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까닭을 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확실성을 견디고 또 그것을 자기 삶에 통합시키는 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라고 할 것이다.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 충만함과 허무함이 갈마드는 인생길, 누군들 힘들지 않겠는가? 산다는 것은 어쩌면 서럽기에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자의 말대로 예술가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그들은 땅과 일상 속에서 빛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빛을 향해 날아오르려 한다. 예수도 그러했다.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흐르고 또 흐르다가 어느 날 문득 낯선 자리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다.

무왕불복(無往不復), 가기만 하고 다시 반복되지 않는 과거란 없고 그 과거 속의 오늘이 또 다른 내일을 만들어 간다. 역사는 과거의 미래이다. 그 역사를 알아야 현재가 제대로 보인다.
역사, 문학, 예술 그리고 인문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저자가 보는 오늘의 세계는 어떨까? 저자의 영적인 깊이와 넓이를 얄팍한 잣대로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거룩한 지성이 요구된다. 말 그대로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관광의 의미가 관국지광(觀國之光)이라고 한다. 그 나라나 지역의 핵심을 보는 것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것이 여행(관광)의 묘미 아니던가!

우리가 하늘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든 전쟁을 마치고 귀향길(본질)에 만난 로터스 열매(비본질)에 취해서 고향도, 집도 잊어버리고 살든 ‘어리석은 순례자’라는 운명은 거부할 수 없어 보인다. 우리의 일상이 요구받은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바둥거리며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우리의 운명인 것을 어쩌겠는가? 익숙함이 질곡처럼 느껴질 때 길을 떠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그 낯선 길 위에서 말하지 않고, 내 판단까지도 내려놓고 열린 입을 닫는 행위, 침묵을 통해서 그분의 부재하는 현존을 경험하고 싶어진다면, 그 달콤한 침묵을 통해 내 영혼을 가득 채워 내면 깊숙한 곳에서 삼라만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솟아오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한다. 길들여진다는 것, 그것은 바로 영혼의 타락이다. 신앙이란 위험이나 시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두려움 없이 직시하는, 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도 우리의 운명이라고 믿으며 익숙한 길을 버리고 낯선 길을 택해 걷는 것인지 모른다.

시간은 무덤덤하게 때로는 나른하게 흐른다. 시간이란 본래 그런 것 아니던가. 다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만이 허둥댈 뿐이지.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기 위해서는 멈추어 서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는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경험하게 하는 신비의 종교이다. 상처 입은 어린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고백하고 늙은 우주를 경험하는 종교이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초월성을 나타내는 종교가 기독교인 것이다. 그 종교가 4세기의 기독교처럼 권력의 단맛에 취하고, 소박하고 신실한 이들의 종교가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될 때, 하기아 소피아가 두 번이나 불태워졌던 역사적 사건은 오늘날에도 언제든지 다시 반복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지, 크리소스토무스를 추방한다고 덮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앙의 진실함은 일상의 삶을 통해서만 입증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는 것, 타자의 입장에 서보는 것, 다른 이들의 무거운 짐을 지기 위해 몸을 낮추는 것이야말로 십자가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땅한 자세가 아니던가! 우리가 만나야 할 신은 멀리 계신 게 아니다. 단지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만날 용기를 갖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예민한 아픔으로 세상과 만나지 않는 한 신의 현존을 경험할 수 없다. 세상의 슬픔을 관념으로 말고, 슬픔의 현장에서 무릎으로 만나야 한다. 그 나라는 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다. 아픔이 있는 자리, 사람들의 한숨과 눈물이 배어 있는 땅, 바로 그곳이 하늘이다. 깊이를 뒤집으면 높이가 된다. 사다리가 없다고 낙심할 것이 없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낮은 곳으로 흐르다보면 결국 하늘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누군가가 곤경을 벗어나도록 도와줄 때 그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다.

설령 교회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자, 불순한 자라는 억울한 시선을 받더라도 우리는 사랑하는 교회를 향해 끊임없는 애정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옥의 언덕을 천국의 언덕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 프란체스코회의 추구하는 소중한 가치(Pax et Bonum, 평화와 선)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예언자적 메시지를 내면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으로 새롭게 해석해서 건강하게 살아내는 생활 신앙인이 필요하다.

평화란 그 마음이 빚어내는 삶의 열매요, 불화(不和)는 그 마음을 잃어버린 결과일 뿐이다. 나를 기쁘게 하려니 문제지, 이웃을 기쁘게 하려는 진실한 마음만 있다면 인생이 그리 복잡할 이유가 없다. 한 사람의 마음이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면 그의 주변도 저절로 환해지게 마련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프로그램을 가지고는 해결하지 못한다. 복음 안에 확고히 서서 용감하게 세상 풍조와 맞서면서도 거칠어지지 않고 품이 넓은 사람이 등장해야 한다. 이미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이미 변형된 형태의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저항하기를 포기했기에 더 이상 고난당하지 않는다. 풍요에 길들여진 신앙생활, 값싼 위로를 탐닉하는 신자가 점점 더 늘어나는 교회, 그 교회는 이미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제국의 신민으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뿔 난 모세가 불같이 화를 내는 이 현장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돈이 행복을 줄 수 있다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언제나 행복을 지연하며 살도록 강요한다. 그 체제는 늘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야 돌아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돈이 주는 자유는 영원한 예속으로 우리를 이끌 뿐이다. 하지만 참 진리는 예속이 아니라 해방으로 이끈다. 자본주의와 맞서 싸우느라 진을 뺄 것 없이 행복을 누리는 다른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는 능력을 키워주고, 그것을 향유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또 함께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한다.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을 한 손에 들고 유럽을 여행하고 떼제 공동체에 한 동안 머무르고 싶다. 떼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우정을 확장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알로이스 원장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시적 사귐을 위한 네 가지 제안>, 첫째, 지역의 기도 공동체에 참여하라. 둘째, 우리를 제한하는 이런저런 경계를 넘어 우정을 확인하라. 셋째, 다른 이들과 정기적으로 경험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라. 넷째,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영적인 사귐이 더 잘 드러나도록 하라는 특별한 제안이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다.

• 旅情 要約 •

☼ 이탈리아, 로마서의 그 로마
콜베의 흉상이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 → 성모니카의 무덤이 있는 산타고스티노 교회→ 캄포 데이 피오리 광장 → 산타 마리아인 비아 리타 교회 →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원 → 베드로의 쇠사슬 교회
☼ 성 프란체스코의 도시, 아싸시
바바라 마카렐리 수녀원 → 천사들의 성모 성당 → 프란체스코 대성당 → 산 피에트로 성당 → 카르체리 은둔소 → (프란체스코 대성당) →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 카사 구알디
☼ 토스카나
몬테 올리베토 수도원 → 성 안티모 수도원 → 성녀 카타리나의 집 → (로마)
☼ 피렌체
아르노 강변 → 조토의 종탑 → 시뇨리아 광장 → 우피치 회랑(미술관) → 메디치가의 경당
☼ 라벤나
산비탈레 성당 → 블로냐
☼ 이스탄불
하기아 소피아 → 이레네 성당 → 코라 교회 →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
☼ 그리스 정교의 나라, 조지아(그루지아) / 트빌리시(수도)
사메바 대성당 → 다비트 가레자 수도원 → 보드베 수도원 → 시그나기 → 니노츠민다 수도원 → 아나누리 → 스테판츠민다 → 게르게티 교회
☼ 므츠헤타(옛수도)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 → 시오니 교회
☼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
예치미아진 대성당 → 흐립시메 교회 → 쇼가하트 교회 → 가야네 교회 → 코르 비랍 → 라반크 수도원 → 가르니 → 게르하트 수도원 → 하가진 수도원 → 고샤반크 → 아르메니아인 학살 기념관
(☼ 트빌리시의 사메바 대성당)
☼ 프랑스 리옹의 떼제 공동체
파르디유 역 광장 → 저항과 이산의 역사 센터 → 리옹 박물관 → 벨쿠르광장 → 로제 수사(떼제 공동체 창시자)가 묻혀 있는 작은 예배당 → 스트라스부르
☼ 독일 친환경도시, 프라이부르크
뮌스터 → 프라이부르크의 한인교회 → 롱샹 성당
☼ 콜마(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운터린덴 박물관
☼ 그 외 프로방스의 작은 도시들
오랑주리 박물관 → 엑상 프로방스(세잔의 아틀리에) → 레 보 드 프로방스 → 루르마랭 → 국립 마르크 샤갈 성서 박물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담론(談論),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427쪽, 2015.4.20 초판, 돌베개

1부 동양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곤 한다. 인생의 여정에서 신영복 선생님과 함께 했던 그해 가을과 겨울, 그 짧지 않은 여정을 한권의 책으로 만난다는 것은 행복하고 가슴 벅찬 경험이다. 1부만 읽어도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선생님의 동양학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성찰(省察)에 압도당하기에 앞서 20여 년의 감옥 생활을 관통하는 관계(삶)와 사람에 대한 애정과 애증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신영복 선생님은 스물 다섯 번의 마지막 강의를 통하여 후학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 그 중에서 중심이 되는 ‘관계와 인간’은 자연과 사람에 대한 재발견이요 매몰되어 가는 인간성에 대한 경성(警醒)이다. 그리고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공감과 연대’를 지향한다면 산다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이고 그 관계론의 실천적 버전이 ‘연대’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지당(至當)하다. 그래서 우리는 ‘더불어 숲’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동양 고전을 통하여 1부에서 밝히는 ‘관계론'은 강의(講義)라는 수단을 통하여 선생님은 시대와 공감하고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자 한다.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공감하는 공부‘인 셈이다. 고전에서 시서화(詩書畵), 시경(詩經)을 통하여 상상력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문사철(文史哲)의 추상력 또한 놓쳐서는 안되지만, 그 완고한 인식의 틀을 깨뜨리는 것 또한 ’공부의 중요한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성과 진정성에 기초한 시경과 더불어 초사(楚辭)-남방 문학-의 낭만과 창조성도 소개한다. 주역에서는 위(位)는 효(爻)가 자기 자리에 있는 것이 위이고, 비(比)는 가까이 있는 사람의 중요성을, 응(應)은 관계성의 폭을 조금 더 넓게 보는 것이고, 중(中)은 관계성이 극대화되는 자리라고 요약한다. 그 중(中)은 앞뒤, 좌우로 참 많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리인 이 네 가지 덕목을 하나로 요약한‘겸손’한 사람을 그 관계성의 중심에 놓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는 화동(和同) 담론을 소개하면서 위(位)와 여유(餘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논어에서는 논어의 세계가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에 대한 개방적 담론임을 소개하고 맹자의 ‘이양역지(以羊易之)’를 통하여 근대사회, 자본주의 사회, 상품 사회에서의 왜소해진 인간관계를 한탄한다. 바로 우리 시대의 인간 관계와 사회성의 실상,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가 상품 교환이라는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의 무위와 상선약수(上善若水)에서는 유가(儒家)가 인본, 문화 그리고 성장의 패러다임이었다면 노자는 가장 안정적인 질서가 곧 자연(self-so)이라고 단정하고, 人과 爲를 합치면 거짓 위(僞)이고 인위는 절대 참다운 것이 아니고 최고가 아니라고 역설한다. 상선약수, 즉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것인데 물의 속성 중에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 다투지 않고, 모든 이가 싫어하는 곳에도 기꺼이 처하는 것을 상선(上善)이라고 소개한다. 장자 편에서는 용두레(기계)를 예로 들면서 우리시대의 빗나간 신화를 반성하고 있다.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생명 그 자체이고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속도와 효율, 더 많은 소비와 소유라는 집단적 허위 의식에 대한 고발을 담고 있다. 묵자의 겸애사상을 통해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을 반대한다. 그리고 이 시대의 패권주의가 끝난 뒤 탈 근대사회를 준비하자고 역설한다. 이를 위하여 “교묘한 거짓은 졸렬한 성실을 이기지 못한다-교사불여졸성(巧詐不如拙誠)”는 한비자의 담론(談論)을 소개하면서 인간 관계에 있어서 ‘진정성’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고전은 오래된 미래이고 무왕불복(無往不復), 가기만 하고 다시 반복되지 않는 과거란 없고 그 고전 속의 오늘이 또 다른 내일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인간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분명하다. 아픔과 기쁨도 사람에게서 온다. 개인의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 문사철(文史哲)의 추상력과 시서화(詩書畵)의 상상력을 유연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과 품성을 고루 겸비한 사람, 현실의 조작 그림을 뛰어 넘어 진실을 창조하려고 고민하는 사람, 바로 그 이상과 현실과 결합하려는 노력하는 사람을 통하여 우리 사회는 더욱 개선되어 질 것을 고대한다.

2부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

오랫동안 범생이(earole)로 살아온 저자가 보낸 감옥에서의 20년은 사내(lads)로 거듭나는 대학(大學)이었다. 저자 역시 그 대학 생활, 20년을 마친 감옥은 사회학, 역사학 그리고 ‘인간학’ 교실이었다고 자평한다. 감옥 대학 졸업 논문의 주제는 ‘사람 그리고 관계’이다. 그 결론은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고 그 자체가 최고의 가치라고 정의한다.

어쭙잖게 요약하자면...

지(知)는 지인(知人)이다.
1부, 동양의 고전을 바탕으로 이해한다면 춘추전국시대를 법가(法家)가 통일했다면 근대사회는 자본가가 통일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자본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속한 구조를 제대로 보는데 유용한 수단이 된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한마디로 자본축적의 역사이다. 그래서 인간관계마저 경제적 관계로 왜소화하는 자본주의에서 사람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 그 속성(정체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교환 가치로만 존재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칼 폴라니는 상품화 되어서는 않아야 하는 3가지, ‘자연과 인간 그리고 화폐’라고 역설했다. 자연과 인간은 우리가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화폐는 실물이 아니라 시스템이기 때문이라고 통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극단적인 ‘Living is shopping’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가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빵 없이 살수 없지만 빵만으로 살수도 없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실업이나 빈곤이란 이론이나 개념에 앞서 실업자와 가난한 사람이 연상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왜냐하면 메마른 이론과 개념은 창백함을 넘어서 비정함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탈 근대적 철학이 필요하다.
자연의 풀 한포기를 꽃 한송이를 조용히 들여다보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 속에 우주가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사람이 꽃보다 풀 한 포기보다 못하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경청이다. 경청(傾聽)이 최상의 독서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마다의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나는 관계다.
인간의 정체성은 인간관계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아픔과 기쁨도 사람으로부터 온다. 돌이켜보면 가장 통절한 아픔이나 가장 뜨거운 기쁨은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기억된다. 개인의 변화도 인간관계로 완성되고 개인의 변화를 가슴이라고 한다면 인간관계의 완성은 발인 것이다. 관계와 애정 없이는 인식이 없고 ‘예술’ 또한 관계라는 맥락에서 보면 우리의 무심함을 깨우치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뜻은 ‘알다. 깨닫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위악과 위선은 어떠한가? 위악이 약자의 의상이라면 위선은 강자의 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의상은 의상이되 위장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날 것일 뿐 본질은 아닌 것이다.

씨 과실을 먹지 않는다.
‘씨 과실을 먹지 않는다(碩果不食)’으로 대단원을 희망적으로 갈무리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①엽락(葉落), ‘환상과 거품을 청산하고, ②체로(體露), 우리의 삶과 우리 사회의 근본적 구조를 직시하고 ③분본(糞本), 뿌리가 곧 사람임을 아는 것으로 우리 미래에 희망의 씨를 뿌리고 새싹이 되고, 나무가 되고, 숲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은 없다. 중요한 것은 두 발걸음의 완성이 아니라 한 발 걸음이라는 자각과 자기 비판 그리고 꾸준한 노력만 있을 뿐이다. 입장의 동일함을 훨씬 뛰어 넘어 서로를 따뜻하게 해주는 관계, 깨닫게 해주고 키워주는 관계,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관계로 나아갈 지평을 열고자 할 뿐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그 어둠(?)의 20여 년을 작은 추억을 빛삼아 친구삼아 묵묵히 걸어왔다. 그 엄혹한 감옥에서도 자신을 반듯하게(?) 세울 수 있게 한 것은 자신이 가족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이자 국가 권력에게 자신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고결한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술회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견디기 힘든 고충이 고스란히 배어 있기도 하다.

“인생의 여행은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다. 그리고 종착지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 변화된 자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라는 저자의 표현대로 이제는 그 흐르는 강물에 흘려 보낸 언약들이 우리들의 삶의 길목에서 만나 꽃처럼 피어나도록, 또 다시 석과불식(碩果不食)하는 것만이 살아남은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각박한 언어로 제시되어서는 안되고 더 큰 인간적인 애정 속에서 융화될 때 진정한 담론이 되고 진정한 사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가장 먼 여행은 ‘사람의 머리에서 가슴(From Head to Heart)까지’라고 했다. 그렇게 신영복 선생님은 그 여행이 가슴에서 그치지 않고 손과 발에서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실천하며 치열하게 살다가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2016년(丙申年)을 시작하는 1월의 그 어느 날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떻게 죽을 것인가 (Being Mortal : 죽는 것)

아틀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주)(서울) / 400쪽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노인들의 소원이 하나 있다. 구구팔팔이삼사(九九八八二三四), 아흔 아홉 살까지 팔팔하게 살고 2~3일 아프다가 죽고 싶다는 의미이다. 노인들에게 물어보면 십중팔구 죽는 것보다 아픈 것이 더 무섭다고 한다. 어쩌면 그 두려움은 죽음이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다시 말해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잃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속에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삶에 대한 계획은 많지만 자신의 죽음이나 그 과정에 대한 준비는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이 책은 노인들이나 불치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성공적으로 살기 위한 일관된 관점의 필요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들의 독립적인 삶에 대한 보장, 그로 인하여 잃게 될 수 있는 삶의 주도권, 치료 행위,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 등 이 모든 과정에서 의학과 기술의 태도와 위치에 대한 저자의 문제 인식과 해결책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마흔 다섯 살의 판사, 환자 이반 일리치의 고통에서 시작하여 가완디 박사(의사)의 임종까지 많은 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임상의 사례로 소개한다.

노화나 질병은 넝쿨이 자라는 것처럼 점차적이면서 가차 없이 진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존중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일단 육체적인 독립성을 잃으면 가치 있고 자유로운 삶은 불가능하다는 개념을 별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심각한 질병이나 노환으로 사생활과 삶에 대한 주도권을 포기할 수 밖에 없을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노화 과정에서 우리 몸속의 예비 장치마저 모두 고장날 때 우리는 어떤 의학적 도움을 어디까지 받을 것인가? 늙고 병들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은 그 삶(병원이나 요양원에서의 삶)으로 생을 마감하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완화 치료든 연명 치료든 마지막 일주일 동안의 삶의 질을 누가 결정할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마지막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인간은 가능한 한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이 듦, 병듦... 자연스러운 인생의 과정이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는 중요하다. 무엇보다 그것을 보는 관점과 이해도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출발이 될 수 있다. 이야기에 있어서는 결말이 중요하듯이 우리 인생의 이야기에서 마지막인 병듦과 늙음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
첫째, 안전한 환경에서 더 오래 사는 것 이상의 우선 순위와 욕구를 갖고 있다는 것, 둘째,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나갈 기회를 갖는다는 건 삶의 의미를 지속시키는 데 매우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라는 것 셋째, 우리의 마지막 장에 남아 있는 가능성을 혁신적으로 바꾸기 위해 제도와 문화 그리고 대화 방식을 변화시켜 나갈 기회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고 차원 높은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우리 삶의 질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몰이해가 한 개인에게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노인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 중에서 일상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중요한 부분이다. 죽음을 앞 둔 마지막 순간에 인간이 진심으로 바라는 게 뭘까?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끝까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것, 자신의 정체성과 충성심을 흩트리지 않고 평화롭고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게 아닐까! 인생의 끝에서 내 인생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얘기를 가족과 함께 나누고 자신의 원하는 방식으로 살다가 가족에게 둘러 싸여 평화롭게 임종을 맞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용기는 우리가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지식을 직면할 수 있는 힘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 앞에서 반드시 나눠야 하는 대화를 통한 모색과 삶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요구된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 앞 둔 죽는 자의 역할을 마지막까지 남겨 두는 것은 꼭 필요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사람들과 추억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고,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이 괜챦으리라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끝까지 미치고 싶어 한다.
한 사람의 종말이 가까워오면 혹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책임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시점-많은 경우가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는 시점이 온다.-이 오더라도 평소 이 문제를 온전하고 충분히 얘기해 두었다면 그건 타인의 결정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을 따르는 게 되는 셈이 될 것이다.

현대 의학과 기술은 매우 높은 차원의 진보와 발전을 이루었다. 그래서 현대 의학은 우리 삶의 궤적을 생물학적으로 변화시켰고 이 궤적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문화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인간 수명의 연장이라는 괄목(刮目)할 성과를 이루었다. 암이나 에이즈 그리고 기타 불치병이라고 여겼던 많은 종류의 질병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화나 질병으로 인해 심신의 능력이 쇠약해져가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면 순수한 의학적 충동을 제한 할 필요가 있다. 너무 깊이 개입해서 손보고 고치고 제어하려는 욕구를 참아야한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치료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풀 수 있는 생명의 실타래가 정확히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의 연한을 몇 개월이니 1~2년이니 하는 수치로 표현하는 데는 신중하고 또 신중하자는 얘기다. 자칫하면 인간의 안전과 생존을 우선시하는 의학계의 언어가 범할 수 있는 오류, 죽음(삶)에 대한 몰이해로 삶(죽음)에 대한 잔인함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자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평상시 죽음을 직시하거나 성찰하지 못해서 죽음 앞에서 허둥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죽음은 실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죽음이 우리의 적일지는 모르지만, 사물의 자연스런 질서이기도 하다.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일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다.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삶에는 끝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조상들의 DNA와 기질이 합류한 만남의 장소 같은 존재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끝까지 자신의 정체성이나 충성심을 희생하지 않고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범일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백범 김구 자서전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 돌베개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백범 일지를 읽고

김구 지음 / 도진순 엮어 올림, 돌베개, 330쪽

백범 일지는 상하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권은 53세(1928년)에 유서를 대신하여 썼고 하권은 67세(1942년)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책이다.
백범 김구의 삶은 매우 부침(浮沈)이 심하고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구한말 우리 민족의 운명과 궤를 같이한다. 백범은 황해도 해주에서 몰락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백범은 열 일곱에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하고는 관상(觀相)을 공부하며 소일하다가 동학에 입도하면서 이름을 창암에서 창수로 개명하게 된다. 그리고 백범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고능선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함을 평생 가슴 깊이 간직하고 산 듯하다. 백범은 후조(後凋) 고능선의 표현대로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신성하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1896년(丙申年 21세) 백범은 인생의 큰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른바 치하포 사건이다. 황해도 치하포라는 포구에서 백범은 왜인 쓰치다(土田讓亮)을 살해하게 되는데... 재판 과정에서 그 살인의 동기가 국모(명성왕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인을 살해했다는 것이 고종에게 까지 알려지면서 사형을 면하게 되고 덕분에 전국적인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백범은 치하포에서의 자신의 속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게 될까 미리 걱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이때가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은 아닌가? 드디어 죽을 작정을 하고 임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백범은 그 이후 감옥에서 탈옥하여 마곡사에서 원종 스님으로 출가하고, 다시 환속(還俗)하여 기독교에 입문하여 구국 운동을 벌이고, 신민회를 조직하고 31세에는 장련공립 소학교의 교사가 되어 의병에서 근대적 애국계몽운동가로 전환, 투신한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44세)에 상해로 망명하여서는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으로 시작하여 1936년(57세) 일본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만든 한인애국단을 창단하고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배후 주도한다. 그리고 1940년(65세)에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되고, 환국(還國)하여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벌이지만 아쉽게도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향년 74세로 운명한다.

백범은 유학, 동학, 불교, 기독교 그리고 근대 사상을 거치면서 유학의 의리와 동학의 만인 평등사상, 불교의 유연함 그리고 기독교의 독립 정신과 구국 운동까지 다양한 가치와 종교를 두루 섭렵하며 민족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다진다.

백범 일지의 일화(逸話)들은 백범의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병세가 위중한 아버지에게 왼쪽넓적다리 살을 한 조각 베어 불에 구워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는 대목에서 유학에서 배운 효(孝)의 실천과 ‘구식 양반은 임금에 대한 충성만으로 자자손손 혜택을 입었지만, 신식 양반은 삼천리 강토 이천만 민중에 대한 충성으로 자기 자손과 이천만 민중의 자손에게 만세토록 복음을 남길지라, 그 얼마나 훌륭한 양반이냐?’는 대목에서는 근대 사상 계몽 운동가로서의 면모, ‘죽는 날까지 왜놈의 법률을 하나라도 파괴할 수 있다면 그리하고, 왜놈 희롱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보통 사람으로서는 맛보기 어려운 삶의 진수를 맛보리라!’ 결심하였던 구국 운동가로서의 오롯한 의지 그리고 말년에는 백범의 고백이자 소원인 ‘우리도 어느 때 독립 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로 하여금 그 집의 뜰도 쓸고 창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는 절절한 나라 사랑의 고백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준다.

“우리 민족의 비운은 대체로 사대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민의 실질적인 행복은 내 모른다하고, 창시자 주희(朱熹) 이상으로 성리학만 주창하여 사색당파로 수 백년이나 다투어 왔으니, 민족 원기는 다 닳아 없어지고 남에게 의지하려는 생각만 남았다. 이러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으리오.”라는 한탄에서는 민족 지도자로서의 절절함과 탁월한 안목이 엿보인다.

“우리가 주연 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 우리 민족이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자는 것이다.” 대목은 세계화가 이루어진 현재도 주목해야할 대목이다.

그리고 “공원의 꽃을 꺾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자유에 대한 이해는 계몽 사상가로서의 일면도 보여주고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 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 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그것은 헤겔의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에, 아담 스미스의 노동 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을 일점일획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하는 것도 엄금하여, 위반하는 자를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 조선의 사문난적(斯文亂賊)에 대한 것 이상이다.” 라는 대목에서는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자로서의 탁월함도 엿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나의 소원’을 통해 처음 접할 당시 백범 김구는 민족주의자 애국자로 이해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백범 일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의리(義理)와 실리(實理) 사이’에서 고뇌하는 여느 사람들이었고 자기애와 민족애 사이에서 갈등하고 행동하는 의사(義士)이거나 변절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기개와 영웅적인 행동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들의 행동은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대장부로다.(得樹攀枝無足奇 懸崖撒手丈夫兒)’라는 표현에 걸 맞는 의거를 이룬 분들임에 분명하다.

새해가 밝았다. 먼저 지난 한해를 돌아보니 바쁘다는 핑계로 내밀(內密)한 내 안의 작업들을 소홀히 한 것 같아서 내 자신에게 가장 미안하다. 그래서 신년 첫 작업으로 백범일지를 읽고 난 후감(後感)을 정리해보면서, 하층민 백정(白)과 평민인 범부(凡夫)를 자처했던 백범(白凡)의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궁금해졌다. 반면에 백범은 통일 국가의 문지기일지언정 그렇게도 원했던 신식 양반 즉, 삼천리 강토 이천만 민중에 대한 충성으로 자기 자손과 이천만 민중의 자손에게 만세토록 복음을 남기고 싶었던 인물로 후손들에게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관찰의 인문학 -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세상을 보는 법
알렉산드라 호로비츠 지음, 박다솜 옮김 / 시드페이퍼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길을 걸어도 다른 세상을 보는 법

- 호로비츠의 ‘관찰의 인문학’을 읽고

우리는 주목하는 능력은 있지만 그것을 잊고 잘 사용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시각에는 프랑스인들이 직업적 왜곡이라고 이름 붙인 특정한 편향성이 존재한다. 월리암 제임스는 말했다. 내가 무엇을 경험하느냐는 내가 어디에 주목하느냐에 달렸다고.
어쩌면 우리는 보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다. 우리는 눈을 사용하지만, 시선이 닿은 대상을 경박하게 판단하고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기호를 보지만 그 의미는 보지 못한다. 남이 우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흥미를 끄는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 관심을 쏟는 한편 나머지는 전부 어둡고 먼지 쌓인 구석에 내버려두는 것을 심리학자들은 스포트라이트 이론이라고 한다.

같은 동네를 십여 차례 산책하는 경험, 지질학자, 일러스트레이터, 의사, 시각장애인, 아기, 음향 엔지니어, 곤충박사, 타이퍼그라포, 야생동물 연구가, 도시 사회학자, 반려견과 함께 익숙해 보이지만 낯선 길을 걸어 보는 경험은 우리에게는 특별하다.

아이들은 세상에 태어나고 첫 5년 동안 깨어 있는 두 시간마다 단어 하나씩을 배운다고 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팔을 이용해 시선이 머무는 지점을 확장시켜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본 것을 같이 볼 수 있게 하는 것, 즉 아이들에게 산책은 공유의 시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지질학자의 눈으로 보면 도시의 대부분의 인공물이란 것도 자연적으로 발생한 재료들을 해체하고 조합해 사람의 목적에 맞게 다시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이 도시는 아니 모든 도시는 분해되어 다음 세대가 건물을 쌓아 올리는 데 쓸 재료가 될 것이다. 암석과 암석으로 쌓아 올린 건물로 가득한 거리를 거니는 것이 이제 영겁의 시간을 누비는 여행이 곧 도시에서의 산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타이퍼그라포에게는 우리가 보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단순한 기호 몇 개에도 과거의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이다.

곤충박사에게는 우리가 지나친 거의 모든 나무에 벌레 흔적이 있고 그 잎사귀는 구멍투성이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리고 한 종류의 식물, 심지어는 단 하나의 식물이 벌레에게는 온 우주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야생동물 연구가에게 탐색 이미지란 혼돈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하는 기대의 시각적 형태이다. 우리는 집중과 기대의 결합을 이용해 세상의 감각적 혼돈을 쉽게 이해하는 단위로 분류하고, 비로소 사람으로서 기능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에게 누가 어떻게 ‘본다’는 단어를 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녀)는 “저는 볼 수 있어요. ‘본다’는 단어의 말 뜻은 하나가 아니라고요.”라고 답할지 모른다. 그(녀)에게 비는 시야의 모든 것을 두드리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에 색채라는 담요를 덮어씌우기도 할 것이다. 불규칙적이고 조각난 세상에서 꾸준히 떨어지는 빗방울은 단숨에 상황 전체를 충만하게 보여 주고,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는 잔디밭, 언덕, 울타리, 길, 덤불을 또렷이 그려낼 것이다. 빗방울이 이리저리 튀고 똑똑 떨어지는 소리로 사물의 거리와 변화와 높이 그리고 재질과 곡선이 단번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각장애인에게 소리는 세상을 보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자세히 살펴보는 행위에 가치를 두는 새로운 문화의 일원이 될 수 있다. 관찰하는 사람의 눈앞에는 하찮은 동시에 굉장한 것들의 어마어마한 지층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반드시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먼 곳을 여행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보통 멀리 여행할수록 결과는 나쁠 뿐이다. 단지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아차리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지닌 지식으로 말미암아 시선이 변화하는 방식, 즉 아는 만큼 보는 능력이야말로 정말 소중한 것이다. 세상의 온갖 요소들 중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 보아야 하는 것, 반대로 무시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하는 메카니즘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어디를 봐야 할지 아는 게 추적의 절반이고 그곳을 보는 게 나머지 절반이다. 한 곳에 더 오래 멈춰 서 있을수록 더 많은 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지닌 지식으로 말미암아 시선이 변화하는 방식, 즉 ‘아는 만큼 보는 능력’이야말로 정말 소중한 것이다. 진정한 여행이란 낯선 땅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갖는 것, 다른 사람의 눈으로, 그것도 백 명이나 되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우주를 보는 것, 우리는 저마다 보고 있으며 우리 자신이기도 한 백가지 우주를 보는 것이다. 다양한 시선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이 잘 정리된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살만한 세상, 공존의 행복을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참 지식은 나를 위한 것임과 동시에 남을 위한 것이 된다. 그래서 제대로 보고 심도 있게 안다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중요한 수단이요 방편이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